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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감리교 안에서도 충돌하는 두 개의 기독교 간의 분쟁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7-06-11 05:11 조회(3629)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b001/113 




감리교 안에서도 충돌하는 두 개의 기독교 간의 분쟁   
이번 감신사태를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창출을 위한 계기로 삼기를..!
 
 
 
들어가며

먼저 이 글을 쓰는 나는 감리교나 감신대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감리교단 외부의 사람임을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비록 타교단이라도 이번의 감신사태 역시 결국은 기독교라는 범주 안에서 발생된 사건이며, 또한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운동을 함에 있어서도 너무나도 부당하게 여겨지는 이번 처사를 도저히 묵과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되었기에 비록 이렇게 글로서나마 얘길 드리는 바이다.

감리교단이 아닌 사람으로서도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마음은 정말 착잡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나 자신은 우연하게도 비정년 트랙 교수임용에 지원했던 김준우 교수의 공개강좌에도 참석했었다. 적어도 당시에 내가 느낀 바로는 김준우 교수의 강의의 퀼리티가 그 비교에 있어 분명하게 훨씬 더 높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학교측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지 않았는지 김준우 교수를 끝내 거부했다.

어차피 이번 사태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건의 내막들은 이미 언론에 공개된 여러 기사와 자료들도 있기에 굳이 여기서까지 세세하게 언급하진 않겠다. 지금부터 나 자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정치권력과 신학적 입장의 상관성과 또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감리교단의 심각한 폐해에 대해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감신의 문제만이 아닌 기독교 전반에서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바다.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를 극복하고자 하는 김준우 교수의 신학적 연구
 
이번 사태에 대하여 감사모(감리교를사랑하는모임)는 이 사태의 본질을 “신학적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법 시도”로 보고 있다. 쉽게 말해, 신학적 성향, 또는 노선이 다른 사람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김준우 교수의 신학적 성향은 주로 북미 진영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보수 근본주의가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신학과 목회현장에 어떻게 하면 역사적 예수의 삶을 우리 안에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고민들을 모색해오던 학자였다. 그는 교회성장 이후 시대, 혹은 탈기독교 시대에 이제는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가 아니라 보다 설득력 있게 공감할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거치고서 이를 넘어서는 기독 신앙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입장은 한국교회의 지적인 위기와 윤리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차원에서 특히 외국의 좋은 저작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함으로써 나름대로 한국 신학계에 보다 풍요로운 신학적 담론들을 생산해내는 데에도 분명한 이바지를 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러한 소신있는 학자를 실력이 없다고 짤라버릴 수 있는지 나로선 도무지 의문이 안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이 정도만 해도 현재의 진보 진영의 신학교를 다 포함해서 웬만한 교단신학대에 계신 교수님들보다도 훨씬 의미 있는 행보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교단 상층부의 보수시스템에 길들여진 한국 기독교의 입장으로선 받아들이기가 힘든 현실이었나 보다. 끝내 김준우 교수는 거부당하고만 것이다. 이필완 목사는 이를 일컬어 학교측의 합법을 가장한 <패대기>라고 부르고 있다.
 
▲ 모든 이해관계의 권력게임은 결국 진리게임, 곧 진리를 향한 투쟁과 필연적으로 얽혀있다. ⓒ 정강길
 
정치권력 이해관계의 문제도 결국은 신학적 진리의 문제로서 표명될 수밖에

그렇다면 이렇게 된 연유는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입장의 충돌 때문일까? 아니면 헤게모니를 둘러싼 정치권력의 이해관계가 본질일까? 얼핏 생각해보면, 이번 일은 전자로 드러난 것 같으면서도 아마도 후자를 본질로서 보는 사람들도 많을 것으로 본다. 아무래도 헤게모니를 가진 자들 혹은 제도권에 눌러 앉은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자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기에 여념이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결국 신학적 충돌의 문제로서 풀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권력이나 기득권 수호의 문제는 어차피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성향이라 여기엔 누구하나 자유로울 순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이란 동물적 존재는 꼭 그에 걸맞는 명분이나 근거를 찾는 자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집단에서 싫어하는 한 특정한 사람을 배제하고자 할 때는 막무가내로 쫓아내지 않는다. 무언가 나름대로 정당화하려는 명분이나 구실들을 내세운다. 물론 무법천지의 시대에선 완전히 일방적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자들도 있겠지만, 좀더 개화된 문명을 경험한 자들일수록 자신의 권력 획득과 폭력성을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 어떤 명분이나 구실들을 찾는 것이다.

고대에는 주술적 종교가 그러한 명분과 구실의 역할을 하였다. 이를테면 왕권강화의 이데올로기로서 종교가 도입되고, 그 종교의 이론에 의해 왕의 권력과 정복욕은 종교적으로 승화될 정도로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히틀러가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그냥 죽이는 게 아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이를 정당화하는 입장의 이론들-이를 테면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론들-을 만들어내며 죽이는 것이다. 즉, 권력의 문제는 언제나 진리게임의 언어들을 도입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한다.

설령 그 본질이 진리게임이 아닌 권력게임이라고 해도 권력게임은 결코 진리논쟁이라는 그 진리게임 자체만큼은 배제하지를 못한다. 어차피 누구나 권력게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누구나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자기 권력을 확보하고자 애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관건의 여부는 결국 진리게임을 통해 인지 받고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리교 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는 두 개의 뚜렷한 흐름

감신대 김외식 총장이 겉으로는 신학적 입장의 충돌 때문에 김준우 교수를 임용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 했을는지 몰라도 사실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이필완 목사가 확인했던 바대로 그 같은 신학적 충돌의 흐름은 분명하게도 있었으며, 이것은 내가 보기에 감리교단 자체 안에 근원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있는 두 개의 신학적 흐름이 뚜렷하게 잠복된 채로 계속적으로 흘러왔음을 예증하고 있다.

사실 김준우 교수의 신학적 입장은 낡은 패러다임에 머물고 있는 기존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흐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중보종교 체제라는 기존의 기독교를 역사적 예수의 삶에 기반한 하나님 나라의 기독교로서 대체하고자 하는 신학자이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김준우 교수의 그 같은 신학적 입장은 당연히 불온시되고 위협적으로도 느낄 수밖에 없다. 불온한 신학사상가가 어찌 성스러운 감신의 선지동산에 발을 들여놔서야 되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의 사건이 이번 김준우 교수한테만 소급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도 우리는 분명하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감신의 분쟁이자,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도 고질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처절한 분쟁이기도 하다.

예전에 고(故)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가 감리교에서 출교를 당한 사건 역시 크게 보면 기존의 낡은 교리적 보수 기독교가 보다 새로이 등장하는 열린 기독교의 새로운 흐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출교시킨 사건이다. 물론 신학적 문제는 단지 표면적 얘기에 불구하고 당시로선 정치적 이해관계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되어 발생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신학적 문제를 굳이 표면적이라고 생각지 않는 이유에는 이러한 패턴의 충돌 혹은 그 유형들이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잠복되어 왔었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문제는 당시 하나의 계기로서 촉발된 점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 감리교의 현실에는 그만큼이나 기독교에 대한 이분화된 흐름들이 분명하게 있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때로는 매우 뚜렷한 전선으로서 나타날 때가 있었고, 때로는 유야무야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서로 묻어가고자 할 때도 있어 왔다.

이를테면, 똑같이 감리교단 소속이라는 이현주 목사와 김홍도를 한 번 떠올려보라. 둘은 같은 교단의 목사라고 하는데도 너무나 이질적이잖은가. 한편 이현주 목사와는 다른 교단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종교인에 해당하는 법륜스님을 떠올려보라. 전자와 비교했을 때 그만큼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지긴 하는가? 이현주 목사와 법륜 스님 사이에서는 이현주 목사와 김홍도 사이만큼의 이질성이 정말이지 온데 간데도 없는 느낌이다. 이것은 진보적이라는 향린교회와 보수적이라는 순복음교회의 괴리만큼이나 느껴지는 이분화된 흐름인 것이다.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의 흐름과 충돌하는 작금의 한국 기독교 신학의 현실

이러한 대립과 괴리는 오래전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김재준 목사와 박형룡의 신학적 충돌에서도 볼 수 있는 유형이다. 같은 장로교인데도 신학적 입장이 다르다보니 결국 김재준 목사는 박형룡이라는 보수신학자로부터 “Go Out~!”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김재준 목사는 한국 현대 역사에도 찬연한 족적을 남긴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따로 세우게 된다.

보수적인 신학의 입장일수록 자신이 믿는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그 마인드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위협성의 느낌도 더 크게 느낀다. 그래서 자기 입장과 충돌하는 자들에게는 극렬하게 배타적이고 가능하면 저들을 배제하려는 습성을 보이곤 하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 출사표나 안정적 직장을 위해 잠시 자신의 입장을 접어두고 전략적으로 보수측에 빌붙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알기에 현재 감신에 있는 박종천 교수도 아주 초창기 때(아주 오래전 ‘상생의 신학’ 어쩌구 할 때)는 나름대로 진보에 대한 관심과 일말의 똑똑성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스며든 영향도 있었을 것이리라.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교단신학대 교수님들이 자신의 밥통 때문에 교단상층부의 눈치를 보며 안정된 밥통을 유지해나가려 한다는 사실은 조금만 들여다보더라도 캐치할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죄다 그렇진 않다고 해도 대부분은 안정된 밥통을 차고 나올 사람이 어디겠는가.

물론 이미 감신대 안에 계신 몇몇 분들도 기존의 교리적 기독교가 아닌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지향하는 교수님들도 없잖아 있다. 내가 보기엔 그런 점에서 감신의 이정배 교수는 분명하게도 그러한 흐름에 있고 제도권 안에서도 이 분은 매우 소신있게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피력한다는 점에서 아마도 보수적인 교단상층부의 껄끄러운 눈총도 받을 만큼 눈에 가시거리로도 여기지 않을까 싶다.
 
(* 어쨌든 이 자리를 빌어 제도권 안에서도 나름대로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위하여 투쟁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리는 바이다.)

사실 한국 신학계는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나마 신학대 안에서조차 토착화신학 담론이나 우리나라의 민중신학 같은 제3세계의 신학담론을 들을 수 있었고 나름대로 활발하게 모색해왔었던 지점도 있었지만, 90년대 이후로는 진보 교단도 예외 없이 대부분이 교단시스템에 발맞추어 보수화 되는 현상으로 말미암아 눈에 뜨게 퇴행하였으며, 교단신학자들은 너무나 곱게만 신학생들을 자기 교단체제엔 잘도 순응하는 목회자로서 기르고 있기만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 기독교계에선 신학적 입장이 상대방과 다르기 때문에 패대기를 쳐버리는 사건들은 심심찮게 일어났었다. 앞서 말한 변선환ㆍ홍정수 교수 사건 뿐만 아니라 강남대의 이찬수 교수 역시 그러한 점도 있다고 보도되며, 최근 어느 한 교수는 불상에 예불을 했다고 해서 겸임교수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단다.

그만큼이나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이 민감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신학적 충돌의 무대는 현재에도 여전히 곳곳에 잠복되어 있다. 단지 지나친 충돌을 피하기 위해 -특히 서로의 경제적 밥통을 건들지 않을 경우라면- 겉으로는 서로 좋은 사이인양 웃는 표정들을 보일 뿐인 거다. 만일 서로 틀어지게 되는 그 어떤 조그만 계기라도 형성될라치면, 평소 맘에 들지 않던 상대방에 대해선 얼마든지 패대기 혹은 마녀사냥 식의 축출도 가능한 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 신학계의 현장이 되버렸다.

그래서인지 내가 아는 통합측 신학대 교수는 매우 래디컬한 신학적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예방책으로서 논문을 쓸 때 일부러 어렵게 글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모호하게 가려버리는데 그 이유는 쉽게 쓰면 자신을 쫓아낼 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소리 아닌 우스개 소리로서 들려준 적 있다. 또한 어느 교수님은 신학대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예수의 믿음>과 <예수에 관한 믿음>을 구분해야 한다고 해서 그 발언이 갖는 신앙적 혼란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다고 들었다.

또한 어떤 보수교단의 신학대에 있는 교수들의 절반은 조심조심 혹은 몰래몰래 진보적 신학서적들을 구입해서 읽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참고로 나로서도 누가 누구인지 밝히고 싶긴 하지만 행여 이로 인해 부당한 처우라도 받을까봐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이니 양해를 바란다). 학문의 현장에서까지 왜 조심하면서 몰래몰래 봐야 하는 것인가? 무슨 사이비나 이단도 아니고 같은 기독교 서점에서 파는 기독교 서적인데도 말이다. 정말 마음 아픈 비극적 현실이 아닐 수 없다.
 

▲ 김준우 교수문제는 김준우 교수문제만의 일이 아닌 감신과 전체 기독교의 일이다. ⓒ 정강길
 
 
나오며 : 앞으로의 전망

내가 알기에 이번 김준우 교수임용문제와 관련한 감신사태에 대해 대부분의 감신대 학생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질 않고 관망의 자세로 있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으로 안다. 그나마 감신의 동문들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해주고 있다. 7,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선배들과는 다른 상황에서 성장한 세대 차이로 봐야할는지 아니면 서로 충돌하는 신앙적 입장들을 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고서 무심함을 표방한 결론적 입장인지는 모르겠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감신, 한신, 장신 할 것 없이- 한국교회 현장에선 대체로 기존의 주류 보수신앙의 텃밭으로부터 커왔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 세대들에겐 <경배와 찬양>과 <경건 예배모임> 같은 것들에 더 호감을 보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서로 피곤하게 쌈박질이나 하는 <데모현장>에 말려든다는 것은 요즘 세대들의 표현 말마따나 <완전 비호감>인 것이다. 신학교 들어와서 목사 되기도 바쁜데, 부흥강사 되기도 바쁜데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생들이 나중에는 한국 기독교계에 보수적인 입지를 더욱 곤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점도 분명하게 직시한다면 현재의 이러한 현상들은 매우 심각하게 고찰되어야 한다. 결국 낡은 패러다임의 기독교가 악순환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면, 앞으로는 이현주 목사나 청파교회의 김기석 목사나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양재성 목사 같은 분들은 감리교단에선 점점 더 줄어들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것과 맞물려 신학현장도 마찬가지로 점점 더 옥죄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유롭게 생산적이어야 할 신학 현장까지도 결국은 보수적인 목회자들에 의해 교단상층부를 점유당함으로서 이번 사건처럼 여전히 저들의 통제와 패대기침을 받게 되는 경우가 앞으로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 이것은 배우는 감신대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매우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의 다양한 신학적 성과와 연구들에 대하여 온전하게 들어보기도 전에 그 배움의 기회부터 아예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아직까진 그래도 건강하고 훌륭한 목회자분들이 많은 감리교단으로선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볼 때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는 암담한 전망인 것이다. 물론 이런 나의 얘기에 대해 괜히 남의 교단 걱정일랑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전체 기독교에서 볼 때도 우려스러운 것임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즉, 한국 기독교에서 볼 때도 고(故) 변선환 교수 같은 훌륭한 분들이 정작 감리교단에서 다시 회복되고 제대로 평가받게 될 그날이란 것도 결국은 점점 더 물 건너 가게 되었다는 얘기인 거다. 게다가 내년에는 감리교단의 감독회장으로서 김홍도와도 아주 가까운 보수 근본주의 라인의 목사가 잡게 된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럴 경우 내가 보기에 감리교 현장은 이젠 점점 더 기로에 서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기로에 선 감리교 신학, 퇴행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창출할 것인가?
제발, 다시 한 번 뜨겁게 일어서라! 감신이여!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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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환기의 한국 기독교와 건강한 기독 공동체를 위한 대안찾기 정강길 3338 06-14
4 그것은 과연 <종교개혁>이었나? (1) 정강길 4400 06-09
3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신론) (2) 관리자 7159 05-28
2 새롭고 건강한 2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신앙선언서 (26) 관리자 6909 05-23
1 새로운 기독교 운동 (3) 정강길 5269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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