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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우리가 흔히 쓰는 신앙적 언명들의 무기력함과 공허함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7-06-19 01:23 조회(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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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쓰는 신앙적 언명들의 무기력함과 공허함
추상적 모호함이 아닌 보다 구체적이고 솔직 당당함의 기독 신앙으로!
 

신앙의 결론이랍시며 제시하는 하나마나한 말들

우리가 신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네교회 목사님이나 신실하다고 여겨지는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할 경우 곧잘 듣는 얘기들이 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선 어떤 사안이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결론이랍시고 강조하거나 제시되는 하나마나한 표현들이다. 기독교인이라면 흔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들어본 적이 많을 것으로 본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성경적으로 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예수님/성령님 중심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한다.”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서만 판단할 수 있다.”
“교회는 가장 복음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신본주의 중심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신비(or 은혜)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덧입힘을 받아야 한다.” 
(* 이외에도 이런 식의 추상적인 신앙적 표현들은 찾아보면 무지 많음)


오늘날에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얘기한다. 물론 나는 이러한 얘기들이 지니고 있는 뜻 자체에 대해선 기본적으론 부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우리는 성경적으로 살아야 하고, 복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신비와 영으로 드러나야 한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 언명들이 정작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 도대체 무슨 설득적인 힘이나 던져줄 수 있겠는가.

알고보면 늘상 공허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은 바는 신앙적 자세를 가리키는 이런 추상적인 표현들이 지니고 있는 치명적이고도 비생산적인 무기력함에 대해서다. 왜냐하면 이런 얘기들은 결국 “가장 올바른 것을 추구함이 정답이다”라는 말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면에선 그냥 하나마나 한 얘기일 뿐이다.

때로는 이것이 사유의 폭력으로서 작동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성경(혹은 기독교)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고 얘기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의 근거는 필요없으니 "묻지마!" 라는 것이며,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뿐이라는 것이다. 아, 이런 레퍼토리들은 이젠 지겹지도 않나!

이런 식의 얘기들을 기독교인들이 하도 많이 내뱉다보니 이젠 우리 사회의 일반인들조차도 대충 기독교인들의 레퍼토리들을 알고 있을 정도고 그런 기독교에 대하여 냉소를 보낼 지경이다. 솔직히 기독교가 혹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는지 안하는지를 또 어떻게 안믿는 일반인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보여줄 것인가?

바로 그래서 우리네 기독교가 결국은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건강한 기독교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자족적인 폐쇄적 집단이 되어선 곤란할 것이다. 우리끼리만 자족적으로 믿고 통용하는 비밀언어들이 전체 일반 사회에서 볼 때는 한낱 웃음꺼리로 전락될 수도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언명일수록 많은 것들이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겠지만, 그것은 한편으론 너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에 결국은 모호하게도 들릴 따름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두루뭉술한 추상적 표현의 언명들은 가급적 지양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어차피 그러한 표현들은 알고 보면 별로 생산적인 게 전혀 못되는 피곤한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성이 결여된 이러한 결론의 도출은 우리 앞에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전혀 못풀고 있는 자기 한계만을 노출할 따름이다.

자신의 신앙을 두루뭉술한 추상적 표현이 아닌 가능한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는 보수든 진보든 누구든 간에 많은 이들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추상적인 명제이다. 이러한 명제만 놓고 볼 경우 서로 갈등을 하진 않는다. 첨예하게 서로 부딪히는 문제들은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언명들 혹은 더 명료하게 파고드는 해석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나아갈수록 그 의견들이 시끄럽게 분분해질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나아갈수록 명료함을 획득한다.

가급적 싸움이나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서로 무리 없이 동의할 수 있는 두루뭉술한 추상적인 명제들로서 결론짓기도 한다. 분명하게 부딪히는 지점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확답은 회피하고 대충 얼버무리거나 좀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얘길 꺼내어서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태도는 다소 시간을 지연시키는 미봉책일 뿐이지 문제에 대한 직접적 해결은 결코 못된다. 이런 사례들은 보수측 신학교 안에서 좀더 진보적인 신학에 눈떴을 때, 혹은 진보적인 신학자가 보수적인 목회현장에서 자기 입장을 밝힐 때 주로 야기되는 사례에 해당된다. 이른바 밥줄 때문에라도 그다지 명료하지 않게 나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서 믿지 않는 신학자가 있더라도 그가 몸 담고 있는 학교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결국 분명하고도 명료하게는 표현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두루뭉술한 언명으로서 끝을 맺곤 하는 경우다. 하지만 솔직 당당한 신앙이고 뭐고 간에 자기 밥통이 걸려 있다고 하는데 뭐라고 탓할 것인가. 그렇기에 이들은 ‘약간만 비겁하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라는 격언을 아주 잘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혹자는 이런 나의 문제제기에 대해 오히려 환원주의자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두루뭉술한 언술들을 가능하면 구체적이고도 정합적인 명료한 표현으로 바꾸는 일을 환원주의라고 비판한다면, 그렇게 따질 경우 우리네 학문의 역사에서 도대체 환원주의가 아닌 게 어디 있느냐고 더욱 되묻고 싶다. 모호함을 극복하고 구체성을 향해 가는 것은 인류 지성사의 뚜렷한 행보이다.

결국 나로서는 신비하기만 하고 모호하기만 했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실화되도록 하는 것조차도 환원주의로 전락되는 것인지도 더욱 궁금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제아무리 구체적이고 명징하게 신에 관한 언명들을 기술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는 법이기에 인간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란 근원적으로 힘들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두루뭉술하지 않도록 나가는 일은 그저 명료한 이해를 위한 최선일 따름이다.

물론 때에 따라선 모호한 메타포들이 요청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테면 그 시대와 관련한 시적 풍자들 같은 것들이다. 특히 시대가 어둡고 억압적이며 절망적일 때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들은 많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성경의 묵시문학도 그 중 하나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은 의사표현 자체에 대한 통제를 받는 전근대적인 시대도 아니잖은가. 그렇기에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선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면 구체적이고도 솔직 당당하게 표현함이 보다 장구한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도 그나마 뒷끝도 없는 가장 최선의 신앙적 자세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분명하게도 솔직 당당한 분이셨다.
 
- 『미래에서 온 기독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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