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111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111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새로운 기독교 운동
월례포럼
기획강좌
연구소 활동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327
어제 719
최대 10,145
전체 2,507,018


    제 목 :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10-22 08:02 조회(1079)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b001/529 




 
 "넌 왜 살어?"
 "죽지 못해서 살지". "먹기 위해서 살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지", "난 살기 위해서 살어"....
 "그럼 산다는 건 뭘까?" 

- <어느 바보들의 대화> 중에서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기존의 진보 기독교 운동에서 새로운 제3의 주체 세력으로서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으로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에 따른 기존 기독교의 전체 지형 분류 (현재)
 
일반적으로 기존 기독교의 지형은 크게 보면 보수와 진보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나누어지는 보수와 진보에 대한 기준은 대체로 성경을 읽을 때 결국은 어떻게 이를 이해하고 있느냐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걸로 보인다. 아무래도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인지라 성경에 대한 이해들을 빼놓고 기독교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성경을 통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바로 그것(교리든 사상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에 따라 크게 기독교 지형을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이점에 대해선 본인이 예전에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라는 글에서 이미 그 맥락을 언급하면서 아래와 같이 분류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분류 자체가 확연하게 선을 긋듯이 나누어진다고 보진 않아도 그렇게 볼 여지가 있는 대체적인 특성으로서 나름대로만 분류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위의 분류에 대한 보다 자세한 맥락적 이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31 참조 바람).
 
 
기독교 지형에서 보수와 진보가 나누어지는 보다 구체적인 신학적 지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서를 보는 관점에 따른 것이지만 이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의 수용여부에서 서로 갈라지고 있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현실은 그러하다. 보수 기독교의 입장에선 성서의 역사비평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오히려 신앙의 변질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사실상 보수 기독교 진영은 근대적 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전근대적 차원에 머물고 있다고 여겨진다. 보수 근본주의 신학(이들이 자신들을 표현할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노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신정통주의로 대변되는 바르트 신학마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도되고 있는 실정이잖은가. 하지만 정작 오늘날은 근대마저 넘어서는 탈근대의 시대라고도 밀한다. 그러한 탈근대 시대에 아직까지도 전근대를 살고 있으니 보수 기독교 진영이 얼마나 시대에 뒤쳐져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만일 이 민감한 문제가 서로 간에 합의가 된다면(학문적으로는 이미 개념 정리가 끝난 문제라 고집을 피우는 이상 별로 합의될 것 같지도 않지만) 몰라도 성서의 역사비평 수용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 정리 없이 그저 순진한 열망만으로 보수 기독교 진영과 진보 기독교 진영을 함께 통합적으로 아우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가당찮은 주장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행여 이런 신학적 문제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더 웃기는 얘기일 뿐이다. 현재 WCC총회의 한국 유치를 놓고 개신교의 보수와 진보 기독교 교단들이 서로 간에 티격태격 싸우는 사건들은 아예 눈에도 보이지 않는단 얘긴가( http://freeview.org/bbs/tb.php/d004/291 참조). 또한 어차피 보수 기독교 진영과 그리고 미분화되어 혼재된 채로 보수와 진보에 걸쳐 있는 중간 복음주의 진영의 한계에 대해서도 앞서 말한 새로운 성서해석의 글에선 이미 언급한 바라, 여기서는 기존의 진보 기독교 진영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진영을 중점적으로 비교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기존의 진보 기독교 진영의 성격을 말한다
 
기독교 전체 판세를 놓고 보면 거의 대부분은 보수 근본주의 진영이 차지하고 있다(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한 좋은 자료로선 http://freeview.org/bbs/tb.php/d004/1 참조). 그에 비해 진보 기독교 진영은 거의 소수에 가깝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성서비평을 받아들이고 있는 진보적인 교단이라고 하더라도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의 이분화로 인해 교회현장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교회가 역시 많은 실정이다.
 
놀랍게도 이 사정은 한국의 개신교만 그렇지 않다. 대표적인 개신교 국가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서의 오류와 비평 문제에 대해선 미국의 개신교 현실 역시 대학과 교회가 이분화되어 있는 실정인 것이다(이 문제와 관련해 바트 어만은 <성경 왜곡의 역사>와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 이를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다).
 
흔히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학문적으로는 자유분방한 반면에 실천적으로는 주로 사회정의 운동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예를 들어,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등 이러한 분야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진보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이냐라고 물어보면 거의 십중팔구 그러한 사회정의 운동을 많이 하는 데모꾼 같은 기독교인들을 곧잘 떠올린다.
 
반면에 기존의 보수 기독교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대사회적 행태는 주로 교리적 신앙에 따른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서의 영혼구원 운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미션을 가리켜 <전도> 혹은 <선교> 또는 <복음화>라는 명칭으로 얘기된다. 거의 자신이 속한 기독교의 종파확장에 가깝다. 따라서 교세확장이 이들의 지상과제로 인식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성향이 매우 수구우익적인 면과 부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 한미동맹과 반공주의를 제일로 강조하는 집단이 보수 기독교 진영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과 충돌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최근 한상렬 목사의 방북 사태를 두고 기존의 보수와 진보 기독교 진영은 매우 대립적이다. 실제로 내가 아는 보수 기독교인(고신측)은 한상렬 목사를 하나님이 용서치 않을 빨갱이라고 얘기하면서 기장 교단은 빨갱이 교단이요 마귀 사탄 소굴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다. 내가 볼 땐 보수 기독교 교단의 각 교회들에까지 많은 교인들에게 그러한 얘기들을 전파하고 있는 듯 했다.
 
도대체 이 괴리와 간격은 근원적으로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더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정치 사회적 행태에 대해선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비판적이지만 정작 보수 기독교인들이 신앙으로서 믿고 있는 교리 체계에 대해선 자신들의 정치 사회적 행보만큼이나 그다지 비판의 날을 세우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지점에 더 큰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은 보는 성경 이해는 거의 <민중해방> 혹은 <생명평화>에 꽂혀 있는 실정이다. 예전에 7, 80년대에는 민중해방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났었다면 '생명평화'라는 테마는 90년대 중후반 이후로부터 서서히 자리한 담론이다. 이것이 김지하류의 생명평화 담론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현재 진보 기독교 진영에서의 핵심 테마는 <생명평화>라는 주제를 거의 교리 신봉하듯이 하고 있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면서 영혼구원 운동을 벌인다면, 이들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은 “생명평화”를 얘기하면서 통일/민주화/인권/생태/여성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즉, 대체적으로 정리하자면, 기존의 보수 기독교 진영의 주관심사는 종파운동에, 기존의 진보 기독교 진영의 주관심사는 사회운동에 많이 기울어져 있는 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실제적으로는 서로 관심의 핀트가 어긋난 측면이 있다. 물론 90년대 이후 보수 기독교인들의 정치세력화가 시민사회 안에 형성되면서 정치 사회적 차원에서는 양 진영의 입장과 관심사에 따라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이는 86항쟁의 성과들이 대중속에 스며들면서 본격적으로는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 이후에는 여러 분야의 다양한 시민사회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 맥락과도 결부되어 있다.
 
또한 알다시피 기존의 진보 기독교 인사들 중에 몇몇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 그 밑에 요직으로 들어가기도 했었다. 주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경력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격과도 잘 맞아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장애물로 인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한계와도 맞물려 종종 기존의 진보 기독교 인사들 역시 비판을 듣기도 했었다.
 
이 즈음 한국의 진보 기독교 진영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널리 알려진 NCCK 역시 타성에 젖어 실제적인 현장활동가들로부터는 많은 비판적 얘길 듣기도 했었다(기독교사상 2006년 2월호 이근복 목사의 글 참조). 왜냐하면 한국의 진보 기독교 진영을 대표한다는 NCCK가 실제적인 현장활동가들을 대변하는 <기독운동의 협의체>가 되지 못하고 그저 교단의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교단협의체> 성격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현장운동에 많이 참여했던 기존의 진보 기독교 목회자들의 모임으로 구성된 <예수살기>가 결성된 것도 당시 NCCK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은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크게 보면 <예수살기>역시 기존의 진보 기독교 운동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아 대변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그 옛날 7, 80년대 진보 기독교인들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의 방식과 크게 다르진 않다. 오히려 7, 80년대 시절의 운동 관성을 그대로 이어와서 단지 분야만 다양하게 확대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7, 80년대에는 거의 없었던 생태환경운동의 활발한 전개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최근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의 관심사는 <2010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에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물론 나 역시 이 선언을 지지하기에 여기에도 참여한 바 있지만, 주로 명망가 중심의 진보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앞세워서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한 나름대로 의미있는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다지 새롭게 다가오진 않는다. 즉, 그 역시 여태껏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사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선언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예전의 진보 기독교 인들의 대사회적 선언과 큰 변별성은 없다고 본다. 물론 그 선언만 따로 떼놓고 볼 때 단지 사회적으로 시대적 외침의 소리를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공표했다는 점에선 매우 의미있다고 본다. 하지만 적어도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의 관심사적 특성 자체는 결코 새롭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이 없다는 얘기다.
 
적어도 나 자신이 볼 때 유효한 의미로서의 진보 기독교 운동의 맥락을 말한다면, 아무래도 7-80년대 진보 기독교 운동의 효과들을 잘 보여주고 있었던 박형규 목사님과 조화순 목사님의 세대까지였다고 본다. 이후의 세대에선 앞선 진보 기독교의 성과들을 재평가한 후 이를 딛고서 또다른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창출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은 전혀 그러질 못했었다. 나는 적어도 그러한 점에선 작금의 기존의 진보 기독교를 너무나 진부한 관성에 젖어 여기에서 전혀 헤어나오고 있지 못하는 낡은 진보 기독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폄하적 의미로서의 낡았다는 얘기라기보다 현재 새로운 기독교 운동 진영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이와 대비되는 '기존의 진보'라는 의미로서 낡았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의 활동 자체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결코 아니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단지 그 범주적 한계 안에서는 그들 또한 충분히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진영이 비슷한 진보 기독교 진영으로 보일는진 몰라도 우선적인 관심사부터가 서로 다르기에 하는 얘기인 것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진보 기독교 운동이 분명하게 간과하고 있는 점들이 있다.
 
[*간단정리]
 

보수 기독교 진영

진보 기독교 진영

새로운 기독교 진영

주 관심사

종파운동

사회운동

종파운동(을 통한 사회운동)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해선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그 전에 기존의 진보 기독교 운동이 도대체 어떤 점을 놓치고 있는지부터 분명하게 먼저 말하두고자 한다.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신념에 빠져 있는 것
- 왜 내가 민중해방(생명평화)에 힘써야만 하는 것인가? 이는 당위적 전제인가?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신념은 앞서 말했듯이, 간단하게만 표현하자면 민중해방 그리고 생명평화 추구의 신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주로 사도신경적인 교리를 그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다면,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민중해방(생명평화)을 그 핵심 교리로서 내세우고 있다.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민중해방(생명평화) 관점은 거의 교리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들이 성경을 보는 모든 이해와 해석들은 바로 여기에 초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볼 때, 이미 성서의 예언자들과 역사적 예수가 그렇게 살았었다는 얘기다.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의 뇌 속에는 민중해방(생명평화)가 당면한 지상과제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점은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이 써내고 있는 대부분의 신학 서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존의 민중신학자들의 쓴 서적들도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 김경호 목사가 발행한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라는 성경공부 교재시리즈 역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서읽기를 꿰뚫어내는 지점은 민중해방[생명평화]의 관점에서 오로지 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성서의 주인공인 하나님과 예수는 물론이고 성서의 주요 인물과 사건들 대부분이 바로 민중해방과 생명평화를 향해 있다.
 
물론 이를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보수 기독교인들이라면 한 번쯤 이러한 성경공부 내용도 접할 필요는 있다고 보기에 본인 역시 이를 높이 추천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다지 만족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가? 만일 "내가 왜 민중해방(생명평화)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면 어떠할까? 그럴 경우 나 자신은 반역적인 반동사상가가 되는 것인가?
 
먼저 오해가 없길 위해 말한다면, 나 역시 성서의 역사적 예수와 예언자들이 민중해방[생명평화]를 위해서 살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당연히 동의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 점 자체에 대해선 토를 달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정녕 그뿐인가? 예수와 예언자들이 민중해방(생명평화)를 위해 그렇게 살았다고만 하면 그냥 끝나는 것인가? 그래서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은 말하길, 당신이 기독교의 예수를 믿는다면 민중해방[생명평화]를 위해서 살아야하지 않느냐라고 강변하면 그뿐인가? 결국 이로인해 민중해방[생명평화] 자체가 그 시작부터 강제되고 있는 것이기에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되려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잖은가.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도대체 예수와 성서의 인물들이 왜 민중해방[생명평화]를 위해서 살았는지를 더 깊숙이 파고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도대체 성서의 주인공들이 왜 그렇게 민중해방[생명평화]를 위해서 살았는지를 더 깊이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도대체 왜 그러한 신념에 이르게 된 것인지 그 삶의 내적 동기부여를 설명해주는 것이 내가 보기엔 진정한 종교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적어도 어떤 이는 그 자신에게만큼은 이러한 질문이 필요치 않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그저 묵묵히 살면 될 것이다. 내가 지금 문제 삼는 지점은 민중해방(생명평화)라는 명제를 가지고 타자에게 이를 사유적 전제로서 강요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진보 기독교인들에게 민중해방(생명평화)라는 명제는 이미 당위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다. 사회적 실천이라는 것은 그 시작부터 사유적으로 강요받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강요라는 표현은 행태적 강요를 뜻하는 게 아니라 무비판적인 사유의 전제로서 자리매김되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예수가 민중해방(생명평화)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니까, 당신이 만약에 예수를 주님으로서 믿는다면 당신도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지”만 갖고는 다른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에겐 마냥 힘 있는 설득이 되긴 힘들다고 본다.
 
만일 민중해방(생명평화)라는 사회적 실천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볼 경우 차라리 일반 좌파 사회운동 진영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요즘은 일반 좌파 운동 진영에서도 신학과 영성 담론을 끌어와서 다루기도 하잖은가. 바로 그런 점에서 기존의 진보 기독교 진영에는 마르크스주의 진영과의 끊임없는 연정 관계들이 있기도 하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선 휴머니티한 사회적 실천이 거의 강박으로 있는 사람들에 가깝다. 프로이드의 표현으로 치면, 초자아(Super-ego)가 매우 강한 사람들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눈으로 보면 순결과 금욕과 도덕 윤리를 강조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이나 생명평화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기존의 진보 종교인들 그리고 민중해방과 혁명을 논하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운동가들은 정신의 그 어떤 한 지점이 거의 강박화되어 있다면 점에서 서로 거의 다르지 않은 걸로 볼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에 주로 중요한 것은 종교 내부의 문제보다 정치 사회적 차원에서의 이슈 문제들이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는 기독교 신앙을 아예 사회적 실천으로 치환하기도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선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의 사상적 영향도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민중신학을 접한 많은 선배들 가운데는 그냥 아예 기독교 자체를 떠나 일반 좌파 사화운동가로 나아간 사람들도 많았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의 교리라고 할 수 있는 민중해방(생명평화)에 대해서도 좀더 근원적인 물음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왜 내가 민중해방(생명평화)에 나서야 하는가?" 아마도 혹자는 너무 당연한 얘길 왜 질문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좋다고 평가되는 사상 혹은 이를 표현한 명제도 아직 이것이 땡기지도 않은 사람에게 자꾸만 코앞에 들이미는 것은 오히려 사유의 폭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실천의 차원은 시작부터 강제되는 차원이 아니라 실은 존재 이해의 깊숙한 성찰을 통해서 결국은 예증되는 차원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볼 땐 더욱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우리들은 “왜 내가 민중해방과 생명평화에 대한 실천을 가져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예수가 했다고 해서 나도 해야 한다? 도대체 그 예수가 나랑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그것이 민중해방이든 생명평화든 간에 모든 종교 및 철학에서 나온 본질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고 보는데, 그 물음이란 다름아닌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기존의 진보 기독교의 성찰에선 바로 이 부분에 대한 답변들이 대체로 모호하거나 제대로 빠져있는 경우들이 많다. 예를 들어, 기존의 민중신학 서적들 대부분이 <민중해방>의 입장에서 보는 성서읽기를 강조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 연장선상에 있는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성경공부 교재인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역시 <생명평화>라는 당위가 거의 교리적으로 혹은 무비판적으로 이미 자리매김 되어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왜 내가 민중해방과 생명평화에 대한 실천을 가져야만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다. 대부분은 그저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예수가 그랬으니까!”, "성경에 써 있으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라는 답변들만 고작 언급될 따름이다. 이는 마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왜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라는 것을 내가 왜 믿어야 하지?"라는 질문을 하면 그건 "성경에 써 있으니까!" 라고 답변하는 것과도 흡사한 것이다. 
 
예수의 사회적 행태 본받기에서 예수의 철학(존재론적 성찰)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그런데 곰곰이 한 번 잘 생각해보자. 예수께서 민중해방(생명평화)를 위한 삶을 사셨다고 해서 예수의 그 사회적 행태만 본받고자 하는 것은 영속적인 에너지를 발휘하기가 매우 힘들 수 있다. 특히 이들과 입장이 다른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내기란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예수와 나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로서의 연관고리가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더 깊이 들여봐야 할 지점은 예수의 행태적 실천을 넘어서 예수가 지니고 있었던 궁극적 신념에 해당하는 예수의 철학을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행태적 실천으로 나아갈 때 더욱 튼튼한 영속적 실천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때의 철학이란 형이상학에 해당되는 존재론과 우주론적 성찰을 얘기한다. 철학(형이상학)적 신념이 제대로 정립될 때 형이하학적 실천이 제대로 마련될 수 있다고 본다. 철학(형이상학)은 형이하학적 세상을 바라보는 중추 관점이 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모든 종교들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차원에 기반되어 있다. 결코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쉽게 말해서, “나는 누구인가?” “신은 있는가? 없는가?” “신이 있다면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떻게 유동하고 있는 것인가?” 등등 바로 이러한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정립하는 차원이 형이상학의 차원인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의 철학을 나의 철학으로서 지녀야만 진정으로 예수의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왜 내가 민중해방(생명평화)을 실천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종교적 본연의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만 한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이웃종교인 불교의 경우는 애초 붓다의 철학적인 설법에서 시작된 것이라 이 부분에 대한 성찰이 잘 되어 있다. 반면에 기독교의 경우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건적 행태에서 나왔었다. 비유를 들어 말한 예수의 말씀들도 그의 직관적 통찰에 따라 예수의 철학을 당시 유대사회 생활 속에 응용해서 나온 것이지 예수의 철학적 체계 그 자체를 말해주고 있진 않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점은,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다소 불명확하지만, 오늘날의 기존의 보수 기독교 진영의 성경공부를 보면 이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해악을 끼치는 철학사상이 그 안에 치명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유감이 될 뿐이지, 이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존재론과 우주론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된 연유에는 애초 예수사건를 자기나름대로 해석해 낸 해석자 바울을 비롯하여 당시 헬레니즘 문화권에서의 초기 변증가들과 교부들의 영향에 힘 입은 바가 크다.
 
보수 기독교인들의 낡은 존재론적 성찰을 대체할 새로운 기독교로서의 존재론적 성찰로
 
예컨대, 보수 기독교인들의 성경공부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로서(이에 반해 기존의 진보 기독교 진영에는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를 거의 전무하게 찾아볼 수 없는 실정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예증하고 있으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죄인입니다”라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는 “신은 인간의 죄로 인해 멀어지게 되었고, 양이나 비둘기를 태우는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는데, 이때 인간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라고 가르친다.
 
이른바 사영리(CCC에서 많이 들고다니는)에서 보여지는 성경 이해는 기존 기독교인들이 지닌 존재론적 성찰을 압축적으로 요약해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존 기독교인들의 머리 속에는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존재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거의 지배적으로 꽉 차 있다.
 
사실상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바울서신에 있는 바울의 신학사상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실천적 행태 묘사들보다 압도되어지는 맥락도 바로 이런 점에서다. 바울은 예수를 종교철학적으로 해석하였고, 바로 그 지점이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간 것이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해석해낸 종교철학적 예수라는 시각에서 복음서의 예수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철학적 입장을 직접적으로 끄집어낸적이 없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사상에는 당시의 헬라철학적 관점이 알게모르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바울의 신학적 관점에서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실은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잘 몰랐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이점에 대해선 얼 도허티의 <예수퍼즐>참조).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전체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적인 존재론적 성찰로서의 새로운 기독교 신앙을 마련한 유례가 거의 없을 정도다. 기존의 진보 기독교 진영에는 바로 이런 종교철학적 성찰로서의 대응 지점이 빠져 있다. 간혹 마르크스주의 및 유물론 사조와의 교류는 있었으나 관념론 진영에 대한 반동으로서 마련된 것이라 그것이 제대로 마련되진 못했었다. 
 
내가 볼 때 굳이 꼽는다면, 중세의 에크하르트나 한국의 다석 유영모 같은 분들을 들 수 있겠다. 함석헌 사상도 유영모 사상의 맥락에서 전개된 것이기에. 나는 한국에서 만일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전개한다면 그 시작을 유영모와 함석헌을 다시 한 번 비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다석 유영모가 말하는 기독교에는 “나는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존재론적 성찰이 깃들어 있어 그토록 회자될만한 힘이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철저히 그 자신의 창조적인 철학적 통찰에 기초되어 있다. 물론 나 자신은 유영모 사상에 대해서도 약간은 비판적인 입장에도 있긴 하나 적어도 그 선구자적인 창조적 작업만큼은 결코 폄하되어선 안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정작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기존의 진보 기독교인들 중에선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경우는 거의 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존의 민중신학자들조차도 그러했다. 내가 알기에 기존의 민중신학자들 중에선 박재순과 김경재 교수 정도를 제외하면 두드러지게 관심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게다가 정작 이를 이를 받아들이는 진보 기독교 신학자들 역시 새로운 기독교 형성까지는 생각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실한 실질적인 한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점은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또다른 치명적 한계인 교단적 배경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이 말하는 기독교는 사실상 기존의 낡은 기독교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전혀 새로운 기독교 그림이 어쩌면 나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연구한다는 진보 기독교인들조차도 기존 기독교 교단 시스템 자체를 벗어나 새로운 기독교를 그려볼 수 있는 마음까진 없었던 것이다(물론 무조건 벗어나는 것 자체가 옳다고 보진 않는다. 적어도 때(카이로스)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이 같은 한계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여기서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정치사회운동이 아닌 분명한 종교영성운동이라는 점과 여기에는 “나는 누구인가?” "신은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이러한 존재론적인 물음과 우주론적인 성찰들이 반드시 확보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며, 이것이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날 때에도 바로 이 점도 함께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 지점에서 적어도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기존의 진보 기독교 운동과 변별점을 갖는다고 생각되어진다.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란 것은 한낱 이슈적인 정치사회운동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종교운동이며, 이는 이천 년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물꼬를 트고자 하는 것이라 매우 인내어린 투쟁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기독교는 초기의 신선한 생명력을 잃고 이천 년 동안을 거의 낡은 체제와 관습들을 유지하면서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예수에겐 어쩌면 제2의 새로운 바울이 필요할 지도 모를 일이다. 즉, 예수의 삶을 다시금 새로운 철학적 통찰로서 재해석해낼 수 있는 새로운 바울 말이다. 그럼으로서 기독교의 새로운 탄생, 제2의 탄생이 필요한 것이리라.
 
 
(계속 이어집니다..)
 
 


게시물수 180건 / 코멘트수 490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3015 11-04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1205 01-16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1102 12-06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1098 10-14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1107 04-11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1208 02-17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1404 02-02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1154 01-13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1437 11-28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3516 11-03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정강길 4950 04-27
"어차피 이러한 기독교로 바뀌게 된다!" (모든 분들에게 고함) (17) 정강길 3472 02-18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신론) (2) 관리자 6169 05-28
새롭고 건강한 2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신앙선언서 (26) 관리자 5327 05-23
180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몰락이냐? 도약이냐? 미선 1112 06-16
179 "함께 만들어가는 종교와 진리" (2) 미선 1163 06-10
178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병치유 귀신쫓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미선 1264 06-10
177 몸에 모시는 하나님 (탈유무신론의 신앙) 미선 1040 06-09
176 초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로 가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1225 06-07
175 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창조론 입장들 미선 1179 05-30
174 신학이 아닌 몸학에 기반하는 <몸학 기독교>로! 미선 1081 02-10
173 신의 영어 표기 God ----> Gio 로 바뀌어야 미선 1032 02-07
172 약자에 대한 눈뜸 - 잠자와 깬자의 차이 미선 1117 12-08
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778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767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882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754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888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720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792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755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733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890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872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753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869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984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966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1014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788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754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1205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957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749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699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1102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3015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748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779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854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902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718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708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705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813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1098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769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723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753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1107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1459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1208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555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668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1404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654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851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740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1154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1077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895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996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1269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1050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1263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1437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1205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1052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3516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1189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1080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1004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963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1354 10-11
 1  2  3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