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R통신] 괴물과 화염병과 화살

괴물. 한국영화사를 다시 쓴 작품입니다. 단숨에 관객 1천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물론,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비난이 곰비임비 이어집니다. 어떤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보내는 시기와 질시란 어찌 보면 인지상정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언제나 있었던 현상 아닌가요.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가령 소설가들의 한탄입니다. 영상세대에게 독자를 빼앗긴 ‘피해의식’은 단순한 피해의식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가령 “전업 작가로 20년 가까이 글을 써 온” 한 소설가의 개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는 “작품이 안 읽히고 안 팔리는 주된 이유는 간단히 말해 국민들이 책을 안 읽고 안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작가로서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그의 진단에는 마주치기 싫은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월 평균 외식비가 24만원에 비해 성인들의 책 구입비가 사실상 없다는 통계는 단순히 우울한 일만은 아닙니다. 작가는 그것을 ‘국민적 위기’라고 규정했습니다.

“아파트 평당 분양가가 1천8백만 원을 기록하는 세상, 한 권에 1만원도 되지 않는 책은 하늘의 별처럼 까마득한 거리로 밀려났다. 책을 읽을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문학의 위기’라고 말하지 말고 ‘국민적 위기’라고 진단했으면 좋겠다.”

그렇습니다. 용기 있는 작가의 말에 솔직히 저도 편승하고 싶습니다. 많은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소설의 작가에게 1천만 명의 영화관객은 부러움입니다. 뒤늦게 소설을 발표했던 저의 심경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영화 <괴물>은 그것대로 평가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괴물>에 관객이 몰린 데에는 <반지의 제왕> 특수효과팀의 ‘특수효과’도 한 몫 했을 터입니다. 하지만 <괴물>은 상업적 성공에 그치지 않고 1천만을 훌쩍 넘은 대한민국 관객들 가슴에 무엇인가를 남기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저에게 ‘괴물’은 오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꼭뒤 누르고 있는 가공할 힘이었습니다. 그 괴물은 때로는 신자유주의로 때로는 전략적 유연성으로 우리의 삶을 원천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괴물에게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수많은 농민들이 고통 받고 목숨을 잃은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어린 여중생들이 잔혹하게 숨지기도 했습니다.

영화 <괴물>에 대한민국 정부는 보이지 않습니다. 공권력은 오히려 괴물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괴물과 맞서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민중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영화 <괴물>은 진보운동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줍니다. 화염병으로 싸운 1980년대의 투쟁방식만으로는 괴물을 퇴치할 수 없다는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괴물을 쓰러뜨린 것은 화살이었습니다. 그 화살을 쏜 주인공은 시간에 쫓기지 않는 명궁입니다. ‘빨리 빨리’의 문화를 벗어나 있습니다.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과녁을 정조준한 화살입니다.

물론, 화살을 쏘기 전에 화염병이 있었어야 가능했습니다. 기름을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그 진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터입니다. 다만, 괴물의 목숨을 끊은 것, 그것은 화살이었습니다.

화살의 길,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살 길입니다. 화살을 제대로 쏠 수 있다면, 영화 <괴물>에 1000만 명이 단숨에 몰렸듯이, 괴물에 맞서 이기는 것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활은 전통적으로 우리 고유의 무기입니다. 누군가 어디선가 화살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손석춘(새사연 원장)

2006-09-11 오후 03:2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