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그 영화에 캐스팅되다

NaCl

운명론적일 수 도 있지만 잘 난 놈은 잘 나게, 못 난 놈은 못 나게, 못 된 놈은 못되게 좋은 놈은 좋게 태어나는 듯도 하다. 북한의 김정은이 남한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삶일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영화의 배역에 맡겨지고 그 배역에 맞추어 살게 된다. 대개 종교도 어떤 종교의 집안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종교가 거의 결정된다.

보통 영화에 보면 선한 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역도 있다. 그러한 악역에 의해 영화의 사건이 터지면서 그 영화의 주제를 이끌어 낸다. 악역이 없다면 변화도 거의 없고 그저 평온함, 어쩌면 무료함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악역은 무엇일까.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영화의 큰 주제를 도출해 내기 위한 악역은 무엇인가. 영화가 다 끝나고 출연진들의 이름이 주욱 올라간다. 그 때는 선한 역이건 악역이건 동등하다. 더 이상 선도 더 이상 악도 아니다. 결국 남는 것은 그 영화가 던져 준 감동이고 교훈이다.

예언이나 점은 이 세상이란 영화의 대본을 살짝 훔쳐보는 것이다. 이 거대한 영화의 마지막 결론은 무엇일까. 어짜피 열역학 제2법칙으로 이 세상의 무대는 낡아지고 사라질 것인데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이 무대라면 언제고 막은 내린다. 영화관람이 끝나고 관객은 감동을 간직한채 귀가한다. 이 세상이 막을 내리면  배우(현상)를 투영(mirror)한 무수한 관객(각 배우의 본질; 죽음이후의 무엇)은 엄청난 감격을 안고 귀가(Return to Sender)하지 않을까. 현대물리학의 성과로 이 물질세계는 본질적으로 텅 빈 상태나 다름 없다고 한다. 이 텅 빈 물질 세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어떤 장(Field)이란 것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고 만약 그 장이 사라지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보통 페러다임이란 용어로 큰 밑그림의 전환을 이야기한다. 이 세상도 어쩌면 이 세상의 바탕이 되는 페러다임이 있고 그 위에서 세상이 전개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한가지 더 생각하면 이 세상의 페러다임은 그 전 세상의 페러다임의 다음 단계로 생겨났을 수도 있다. 이젠 대폭발이론(빅뱅이론)을 넘어 다중우주론이 생겨났다. 우리 우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다른 우주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론이 맞다면 이 우주(세상)의 페러다임이 끝나면 다음 우주의 페러다임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이란 영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이건 쎄드엔딩이건 어떤 감동이 있을 것이고 그 감동을 안고 다음의 우주시대의 페러다임으로 넘어갈 지도 모른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하기 위한 조건일 수도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수없이 반복하며 어떤 방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올해 이루고자 하는 삶의 내용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내년을 또 다시 기약한다. 이 우주도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음 우주를 기약한다. 만약 이 우주가 완전무결하다면 더 이상 나아갈 이유가 없다. 완전함은 곧 멈춤이다, 죽음이다.

이 세상이란 영화에서 끝내 말하지 못한 것, 풀지 못한 것,용서하지 못한 것을 간직한채 다음의 우주세상이란 영화에서 속편으로 다루게 될지 모른다. 각 개인의 삶과 죽음은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악인이건 선인이건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미처 말하지 못하고 죽은 영혼이 다음 우주에서 깨어날 때, 전혀 새로운 환경과 페러다임에서 거기에 맞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인간 개체로서의 자아는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이 물질세계가 본질적으로 무에 가깝다고 하지만 이 물질세계가, 각 생명체가, 각각의 인간이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장(Field)은 유지되어야 하고 서로 부딧쳐야 하고 아픔을 느끼고 욕심을 부리는 자아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픔은 존재의 증거이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의 아픔으로, 욕심, 즉 아쉬움으로 각 인생의 장(Field)은 휴지(rest; off)상태가 되고 다음 페러다임의 세상에서 장(Field)이 켜질 때 그 인생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깨어 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죽음은 새로운 곳에 장막을 펼치기 위해 헌 막을 걷어내는 것과 같다. 접혀진 헌 장막을 기워 다시 펼치는 상상을 하며 아픔을 더 이상 저주로 여기지 않고 품고 감내해야할 연단, 그 것도 다음 페러다임을 위한 연단으로 여기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다.   

2012. 11. 12 月 토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