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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4-27 00:49 조회(1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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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 - 1955)
 
 
 
사랑, 인간의 진화를 성숙케 하는 창조적 에너지
 
-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 강 길
 
 
 
 
1.
 
98년 8월12일자 뉴스위크誌를 보면 『과학과 종교의 절묘한 조우』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있다. 이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바야흐로 회의(懷疑)에서 출발하는 과학과 믿음에서 출발하는 종교가 하나의 지평에서 만나게 되는 싯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상대를 부인하는 적대관계였지만, 이제는 과학과 종교가 호상적으로 관계되면서 이전의 근대성에서 벗어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 가운데 불러일으켰다. 앞으로 과학자들은 종교인들과 더이상 골치 아픈 싸움에 휘말리지 않아도 될 것이며, 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심과 과학적 사유의 충돌로 인해 혼란에 빠지는 일 또한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들을 파면 파고들수록,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종교적인 섭리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점점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
 
근대 세계의 인식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인간의 <생각함>을 주체로 내세우면서 중세 신앙이 갖고 있었던 사유의 벽을 깨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 과학의 발달을 촉발시키는 데에 그 철학적 근거를 세웠었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인식의 이러한 흐름들은 과학과 종교를 점차 분리시키면서 그 골이 계속 깊어만 가게 만들었다. 이때 등장한 세계관이 우리가 흔히 잘 아는 理神論的 세계관이다. '이신론'이란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할 때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理法마저 창조하여 신은 이 우주가 돌아가는 일에는 손을 떼버렸다는 신관이다. 그래서 당시 갈릴레오는 이 우주를 가리켜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신론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이 유신론자들의 눈치를 보며 궁여지책으로 짜낸 무신론을 향한 유아기적 항변이요 음모라고 할 수 있겠다. 17세기에 등장한 뉴턴 물리학은 과학적 유물론의 결정판이자 인간 이성의 위대성에 대한 절정을 이뤄놓았다. 뉴턴 물리학이란 그 옛날 그리스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예증에 다름 아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들만이 인정받는 이러한 분위기는 끝내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과 유물론을 본격적으로 등장시켰고, 과학과 종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로 치닫게 하였다. 과연,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부정해야만 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가?
 
여기에 대해 단호히 "그렇지 않다!"라고 20세기초에 일찌감치 해결책을 제시했던 자 중에 하나가 바로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라는 학자이다. 그의 실존적인 삶의 자리가 이미 프랑스 신부이자 고고학자요, 지질학자며, 생물학자였기에 이 심각한 주제와 그는 필연적으로 부닥치게 되어있었다. 그는 물질을 얘기하는 과학의 비물질성을, 또는 종교에서 말하는 정신에너지(얼)의 물리적·생물학적 작용을 우리에게 펼쳐보이며, 다가올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유효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가 기술하는 우주는 정태적이고 불변적인 정지한 우주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상에 있는 역동적인 우주이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인간현상」(1939)은 이를 잘 얘기하고 있다.
 
태초에 우주가 발생하고 태양의 파편으로부터 나와 형성된 청년지구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구성하면서 생명 현상을 출현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떼이야르는 무기물계와 생명계라는 두 세계는 본래부터 한 몸이었다고 한다. 단세포 단계에서는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 불분명하듯이, 그것은 낮은 단계에서는 모호하고도 희미한 존재로 있었을 뿐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떼이야르는 이것을 <이른 생명>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사물의 바깥만을 살피는 자연 과학으로 볼 때에 그것이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적어도 세포가 출현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른 생명>이 <생명>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생명은 적극적으로 팽창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계통수의 생물들을 번식시키고, 영장류의 진화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인간현상을 태동시킨다.
 
사람은 조용히 등장했다. 사람의 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곧 <생각>의 등장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을 대상으로 놓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헤아릴 줄 아는 <반성>의 능력을 갖고 있다. 여기서부터 진화의 흐름은 이제 정신의 적극적인 진화에 돌입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얼누리>(=정신계)의 형성이다. 사람이전에 얼은 있었어도 얼누리는 없었다. 사람의 등장과 더불어 이제 본격적인 정신의 진화에 돌입한 것이다. 사람의 등장은 곧 정신사의 등장을 의미했다. 얼의 본격적인 진화는 이러한 얼들을 하나로 수렴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즉 저마다의 무수한 생각의 알갱이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각 덩어리로 합일되는 것이다. 조화로운 집단의식, 그것은 곧 <초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사람이 모여서 <큰 사람>이 되는 차원을 의미한다. 세계의 미래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진화의 궁극점에 이르러 '큰 사람'의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큰 사람'은 개체의 특성을 죽이는 전체주의적인 집단의식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의 특성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을 얘기한다. <생명>이 낳게되는 <다음 생명>은 바로 이와 관련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떼이야르는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만 사랑하지 않는다. 포유류에게도 모성애는 있으며, 하찮은 미생물에게도 사랑은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심지어 사랑은 물질의 미세한 분자에게도 있는 것이란다(우와, 띠옹∼!). 단지 그것이 낮은 단계로 갈수록 희미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있다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사랑이란 다름 아닌 나와 타자가 하나가 되려는 욕구다. 일반적으로 과학에서 말하는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란 사물의 바깥에서 본 현상만을 얘기하며, 이에 상응하는 사물의 안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함으로서 결국은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중력은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 에너지야말로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 힘인 것이다.
 
그렇기에 떼이야르가 말하는 세상의 끝은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개체의 생명은 개체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명'으로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그 자신의 불완전함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떼이야르가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다. 나의 참다운 모습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러한 정신의 합일점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가 되는 차원이다. 쉽게 말해서 <모든 개인의 성인군자화>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것은 나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지평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운데서 사랑으로 교통하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 세계는 새 하늘 새 땅인 전혀 새로운 세계로 태동될 것이며, 우리자신도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화하여 있을 것이다. 마치 분자가 결합하여 개체인 분자 그 자신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포하나를 출현시켰듯이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진화를 얘기하는 떼이야르의 사상이 한편으로 지나친 낙관주의에 기울어 있지 않나 생각할 수 있겠다. 분명 인간의 비극적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낙관주의는 인류의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떼이야르는 이르기를,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는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자율적인 중심점>이기 때문에,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적 지평에서 연결되어 있는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미래는 나 자신의 책임성과 항상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곧 전체 인류의 미래와 진화에 관계되는 것이다.
 
이러한 떼이야르의 사상은 이 책 「인간현상」의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진화론적인 과학 사상을 얘기하면서도 그것은 신학과 철학의 파트에까지 닿아있다. 사실 떼이야르의 사후에도 한동안 그의 사상은 학문적 주소를 찾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사상은 전문적인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에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신비적이거나 사변적으로 보이고, 그렇다고 종교인이나 신학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신학사상이라기보다 불경스런 생물학인 진화론에 치중한 것 같으며, 철학자의 눈으로 볼 때도 철학으로 인정하자니 철학사에 이같이 생물학과 지질학과 기독론이 짬뽕된 특출난 사상이 일찌기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그의 학문에 대해 번지수를 매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독특하면서도 전체 학문을 아우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종교적 신앙은 과학적 사유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과학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 사유의 끝에는 언제나 비합리적인 궁극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3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떼이야르의 사상을 과정(過程)사상에 포함시켜 평가한다. 주지하다시피 과정사상의 대부는 저 유명한 유기체의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형님이시다. 떼이야르와 화이트헤드는 서로 비슷한 시기를 살았지만, 그들의 저서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알았다는 흔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은 지질학자겸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또 한 명은 철학자의 입장에서 각각 기술하는 이 우주가 어쩜 그렇게도 놀라우리 만치 유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서양인들에게도 도(道)는 하나로 통하는 모양이다.
 
우선 둘은 기본적으로 이 우주를 유기체적 사태로 본다는 사실이다. 떼이야르는 이 우주는 하나이기 때문에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이든 그 뿌리는 우주 전체와 관련이 있다라고 얘기하며, 화이트헤드는 이 우주의 관계망에서 그 어느 것도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다라고 규정한다. 또한 떼이야르는 우주의 기초물질을 여럿, 하나, 에너지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랍게도 화이트헤드가 말한 궁극자의 범주랑 흡사하다. 화이트헤드는 그 자신의 형이상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대표적 저서인 「과정과 실재」(1929)에서 궁극자의 범주를 다자(多者), 일자(一者), 창조성이라고 언급했다. 에너지와 창조성, 둘 다 물질의 지속적인 <새로움>novelty을 가능케 하는 창발적인 요소를 의미한다.
 
이 우주에 단 한번의 핵과 전자가 출현하여 수십 억 년을 거쳐 서서히 진화해온 물질은 점점 조직화·복잡화의 단계를 거치며, 이 지구상에 새로운 생명들을 잉태시켰다. 이것은 물질의 진화 속에 <얼>(=의식)이라는 것이 항상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존재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극성을 갖는다고 한다. 떼이야르는 사물의 바깥은 물질의 복잡화로 나타나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사물의 안은 얼이라고 생각했었다. 과학은 그때까지도 사물의 바깥만 살필 줄 알았지, 사물의 안은 들여다 볼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침데기'처럼 내색은 하지 않지만, 분명 물질에는 안이 있다는 게 그 자신에게는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존재의 양극을 말하는 화이트헤드나 사물의 안과 밖을 말하는 떼이야르는 항상 이 두 가지 측면을 갖고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떼이야르가 진화의 극점으로 언급한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를 화이트헤드는 <세계의 신격화>the Apotheosis of the World라고 명명했다. 세계의 신격화란 이 세계가 신의 비전을 완전히 체득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바로 그때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모종의 밀약을 꾸민 것처럼 참으로 둘은 유사하지 않은가? 떼이야르의 사상은 일면 생물학이라는 자연과학의 자리에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예증하는 사상으로도 볼 수 있겠다. 우연하게도-물론 나 자신은 그러한 정신사의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서로간에 통박을 굴리는 것이 이토록 비슷한 일치를 보는 것은, 아마도 20세기 정신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의 때가 찼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언하건대, 다가올 21세기는 이러한 패러다임이 더욱더 확고하게 다져질 것이다.
 
오늘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창조론자들은 물질의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거부한다. 왜냐면 물질의 진화는 조직화·복잡화의 법칙과 관련하는데, 이것은 소위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의 질적 쇠퇴를 말한 법칙인데, 이것은 운동하고 있는 물체에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그 물체는 점점 그 운동성을 상실해 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리는 자동차가 언제나 달릴 수만은 없으며,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그 자동차는 정지하고 말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곧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상응하는 개념이다. 즉 물질은 자연적인 반응으로 인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질서해지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열역학 제2법칙으로 인해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패러다임은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사유체계가 되는가?
 
천만에! 20세기 과학이 밝혀낸 지성의 빛은 생명계와 같은 개방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열역학 제2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리아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명저인 「혼돈으로부터의 질서」(1984)에도 잘 나타나 있다. 떼이야르는 물질의 진화가 엔트로피 법칙에 맞설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의 '안'인 얼의 존재 때문이라고 한다. 진화의 메카니즘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하며, 그 얼은 사물 '밖'의 조직화·복잡화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첨단의 과학인 양자 물리학의 세계에서도 물질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과학자들은 그것이 물질인지 비물질인지조차 헷갈린다고 고백한다. 아아! 놀랍게도 20세기 과학은 물질에서 정신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창조론자들이 일면 똑똑해 보이는 소리를 한 것 같지만,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야말로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사상임을 알아야 한다. 알다시피 창조론은 성서의 창세기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를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여 하나님이 뚝딱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나타난 구절들을 우리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실제 사실로 보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고도 무지한 유아기적 발상에 불과하다. 설령 하나님이 뚝딱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치자. 그렇게 쉽게 만들 거였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수 백억 년 동안에 수 십억 번의 진화를 거듭하여 겨우 인간의 생명 하나가 태동하였다는 사실 쪽에 더 무게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리라. '나'라는 개체의 생명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 생명의 기운을 이어받고 있음을 알자.
 
요컨대 떼이야르의 주장은 물질의 우연적인 진화는 바로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신을 부정한다고만 생각하는, 그 신앙과 생각의 짧음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떼이야르의 신관은 범신론인가? 아니다! 범신론적이지만 범신론은 아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것은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제자인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의 용어이기도 한데,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즉 초월자인 하나님은 범신론적으로 이 세계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현실 세계의 특성에 대한 사려와 함께 시작하는 어떠한 증명도 이 세계의 현실성 이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으며, 그것은 다만 경험되는 이 세계 안에서 드러난 모든 요인들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신은 내재적 신이지 전적인 초월적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떼이야르가 말한 세계에 내재하는 '얼'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초월자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성육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분명 하나님은 육으로 오셨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쳤을 게다. 그리고서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점'을 제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통한 물질에 내재된 얼의 신적 완성을 뜻한다.
 
 
4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과정사상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의 사상은 서양의 사상사에서 갑론을박하며 싸워왔던 정신이냐? 물질이냐?의 논쟁에도,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라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도 군더더기 없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사변적인 관념론이나 물질을 먼저 내세우는 유물론이나 다들 대답의 반만 갖고 있는 셈이기에 둘 다 틀렸다고 봐야한다. 이에 대해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은 사물의 안과 밖의 모습일 뿐이며, 물질의 진화는 곧 궁극적으로 신의 창조사역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그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환경문제를 중요시하는 생태학에도 여러 가지 사상적 근거를 안겨준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그냥 창조된 것이 아니라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설치고 비바람이 부는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 잉태되는 것이기에 그 생명 하나 하나가 모두다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저 들녘의 이름 모를 꽃 하나에도 이 우주의 숨결과 생명의 날줄씨줄들이 얽혀있다.
 
역으로, 흘러가는 저 강물이 오염되면 우리자신도 오염된다는 사실도 인지시켜 준다. 왜냐하면 나와 이 우주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이아>GAIA라는 총체적인 이 지구 환경은 살아있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것은 우리가 얘기하는 '얼'이라는 것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가 숨을 쉰다"라는 표현이 마냥 지구를 단순히 의인화시킨 통속적 문장이 아니라 실제로 지구는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귀가 있어도 대지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에겐 화 있으리라!
 
무엇보다 떼이야르의 사상은 우리에게 고귀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연가풍의 詩나 멜로물 영화에나 붙는 딱지가 아니라 과학의 세계에서도 정말로 실재하는 창조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세계 안에서의 신의 기능이다. 내가 남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나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것만이 인류의 살길이요 거듭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인류는 <진보>한다기보다 인류는 그저 <생존>할 뿐이다. 즉 인류의 진화는 인류의 생존과 바로 직결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자신의 생존에 대한 욕구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살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특히 현재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서로 돕지 않으면 결국 나 자신도 도태되고 만다는 현실을 아주 잘 말해준다. 내가 없으면 타자도 없겠지만, 타자도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무의미하다. 사랑은 그렇게 나와 타자를 이어주며, 서로를 완성시킨다.
 
나는 확신한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소외된 이웃의 아픔을 느낄 수 있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그들을 위해 투쟁할 수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통일을 외칠 수 있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한 자락 바람과 한 줌의 햇빛으로도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이 우주 세계에 충만한 신의 은총에 전율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 '98년 한신대학교 교내독후감 공모 대상作)
 
 
                                                                                
 2001-10-29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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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 (석오진) 미선이 8360 06-02
60 마음의 지도(맥그로이) 미선이 8324 05-22
59 관상기도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수행 방법들(이건종) 미선이 7964 05-02
58 이슬람의 영적 가치관과 생활 속 수행 (이희수) 미선이 5873 05-01
57 새로운 민중신학과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정강길 6655 04-20
56 밑으로부터의 세계화/지역화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응 (김영철) 미선이 11334 04-19
55 다원사회 속에서의 기독교 (정진홍) 미선이 7378 04-17
54 영성의 평가와 측정에 대한 연구 자료들 미선이 6394 03-31
53 [자료강추!] 인도철학사 (길희성) 미선이 7317 03-02
52 기업적 세계화의 뿌리와 그 열매: 신식민주의와 지구촌의 황폐화, 세계인의 빈곤화(김정숙) (1) 미선이 7771 02-05
51 [강추!] 부자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채만수) (3) 미선이 15531 04-22
50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유정원) 정강길 8190 05-20
49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김경재, 오강남) 정강길 9609 04-28
48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강길 10804 04-27
47 이안 바버가 보는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 유형 (김흡영) 정강길 11089 07-16
46 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장윤재) 정강길 8241 01-07
45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경재) 관리자 7432 11-12
44 竹齋의 현재적 그리스도론 (김경재) 정강길 7530 05-06
43 경험은 믿을만하며,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황희숙) (1) 미선이 7568 01-07
42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갈릴리 복음'으로 돌아가야 산다! (김경재 교수) 미선이 6982 01-06
41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정진홍 교수) (1) 관리자 7598 12-15
40 진리란 무엇이며,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한전숙) (1) 미선이 7857 12-01
39 “복음주의, 알고 보면 기득권주의” (1) 미선이 6331 11-28
38 기존 기독교인이 동성애혐오증을 가장 크게 지녔음을 말해주는 조사자료들 미선이 6232 11-28
37 영성에 대한 원불교 교리적 고찰 (백준흠) 미선이 6409 11-21
36 '죄'와 '구원'에 대한 전통신학의 한계와 과정신학적 해석 (김희헌) 관리자 7028 11-02
35 영성과 영성수련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강길) (3) 관리자 6952 11-02
34 21세기의 종교-새로운 영성을 위하여 (길희성) (1) 미선이 7562 10-15
33 현대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 (오영석) 미선이 6467 10-14
32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이숙진) (1) 치노 8175 10-01
31 [기조강연 전문]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디서 오나? (길희성) (1) 관리자 7384 10-01
30 [참조] 세기연의 월례포럼 자료들은 '세기연 월례포럼' 게시판에 따로 있습니다. 관리자 6030 07-29
29 SBS'신의 길 인간의 길' <제4부 길위의 인간> 전문가 인터뷰 정리 미선이 9568 07-29
28 프레크 & 갠디, 『예수는 신화다』(국역판 전문) (4) 미선이 9601 07-20
27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 학자들의 SBS취재 인터뷰 내용 미선이 7880 07-06
26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 김민웅 마루치 7437 05-21
25 [펌]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1) 고돈 린치 7515 02-27
24 역사적 예수 제3탐구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 (김덕기) 정강길 7472 02-21
23 희랍 동성애의 특성과 사회적 역할 마루치 6917 02-15
22 몰입 (나에 대한 최고의 순간이자 그것 자체가 행복인 순간) 관리자 7889 09-12
21 예수 교회 예배 주보 표지를 장식할 '예수 이후의 예수들' 관리자 7935 08-03
20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초기지, 공동체 운동에 대한 좋은 자료들 관리자 9537 07-02
19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관리자 11549 06-27
18 김경재 - 한국교회와 신학의 회고와 책임 정강길 7098 06-06
17 이성정 -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강추!) 관리자 9088 01-27
16 행복 보고서 정강길 8040 01-18
15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3) 성직자 및 종교단체에 대한 평가 관리자 6982 01-06
1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2) 한국인의 종교관과 의식구조 관리자 9367 01-06
13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 한국인의 종교실태 관리자 8698 01-06
12 우리나라의 3대 종교-불교/개신교/천주교- 분포 지도 (*통계청) 관리자 15877 12-15
11 종교 인구 20년간 어떻게 변했나? (*통계청) 관리자 13546 12-15
10 한국 종교계는 치외법권지역인가? 관리자 9029 11-24
9 보수 기독교인들 특히 C.C.C가 널리 전파하는 <4영리> 자료 관리자 11745 10-27
8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김준우 11017 10-21
7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강추) 돈큐빗 9391 10-07
6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잠농 통프라스트) 관리자 9283 10-04
5 숫자로 보는 한국 장로교의 정체 (3) 이드 16048 06-21
4 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그것이 알고 싶다! (강추) 미선이 13357 05-31
3 [펌] 니케아 회의 시대 (313-590) 관리자 16630 05-30
2 [펌] "미국은 神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는가?" (1) 미선이 8233 05-17
1 [유다복음서 전문]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미선이 15318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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