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35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35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문서자료실
이미지자료실
동영상자료실
추천사이트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97
어제 720
최대 10,145
전체 2,768,289



    제 목 :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 김민웅    
  글쓴이 : 마루치 날 짜 : 08-05-21 02:19 조회(7436)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g001/60 
  FILE #1 :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hwp (128.0K), Down:51, 2008-05-21 02:19:01


 
제국과 세계자본주의체제, 그에 대한 신학적 대응(민중,해방,흑인신학 등)들을 이해 할 수 있는 글입니다
 
이번 학기에 김민웅 선생님에게 제국과 신학이라는 과목을 듣고 있는데
 
수업내용이 잘 요약되어있는 글 같네요^^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기독교 정치 윤리적 접근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2008년 2월 25일


1. 미국, ‘선의(善意)의 제국’인가?


이 글은 오늘날 미국의 세계적인 패권체제로 압축되고 있는 ‘제국의 억압과 지배구조’를 정당화하는 일체의 윤리적 기초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극복의 전략을 그 중심과제로 삼고 있다. 그 방법론적 틀은 (1) 미국 역사에 대한 수정주의 사관의 진보적 접근, (2)자본주의의 역사적 모순을 조명하는 정치경제학, 그리고 (3) 예수운동의 관점에서 실천적 인간해방의 영역을 추구하는 기독교 윤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로써 이 땅에 인간이 인간다운 존엄성과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서로 더불어 협력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 표상되는 대안체제1)를 확보해나가는 작업에 이론적, 윤리적 그리고 신앙적 추진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 대외적으로 주장하는 도덕적 명분과 그 현실의 괴리는 이제 더 이상 숨기기 어려운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야만적 면모는 특히 최근에는 이라크 침략전쟁의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다.2) 사실 이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속해왔던 것이나3) 2차 대전 이후, 과거의 제국들과는 다른 ‘선의를 가진 강대국’이라는 위선적인 수사(修辭)에 감추어져서 이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하는 것은 신학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로 받아들여져 오기조차 했다.


더욱이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내세워온 상황에서, 미국의 선의를 전제하지 않는 일체의 논의는 반 기독교적 논리라는 낙인까지 감수해야 했다. 이는 특히 냉전시대의 현실에서 강화되어온 인식으로 정치 신학적 논쟁은 이러한 기존의 틀에서 충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 결과 미국에 의해 반인류적 착취와 폭력, 파괴가 거대한 규모와 가공할 강도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기독교 신학은 이에 대하여 명백한 입장과 발언을 집단적으로 표현하거나, 또는 교회적 고백으로 완성시켜나가는데 한계를 보여 왔다. 이는 바로 이 제국의 지배로 인해 직간접으로 희생당하는 민중들이, 압도적인 위력을 행사하는 제국의 통치에 그대로 굴복하고, 이를 대체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역동적 힘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 패배주의적이고 운명주의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하는 데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한국교회와 신학이 이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하여 제국의 기만과 폭력을 고발하는 신학적 선언을 하거나 이를 극복할 논리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뚜렷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은 절박한 성찰이 요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일에 물러섬이 없어야 할 기독교 신앙이 거대한 제국의 폭력체계에 의해 무수한 민중들이 병들고 죽고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선교와 신학, 그리고 신앙고백의 현장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신격화시킨 제국이라는 절대체계를 극복해야 하는 예언자적 책무에 대한 포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잔혹한 전쟁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미국에 대한 정치 신학적 논의는 미국의 대외적 행태와 그 내면적 본질을 포장하고 있는 각종 이념적, 윤리적 껍데기를 벗겨내고 진실을 직시하여, 그로 인해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거나 죽어가고 있는 생명을 구하는 중대한 구도적 선택이 된다. 이것은 신부 출신으로서 베트남 전쟁 이후 반전평화 운동에 앞장서면서 자신의 국가가 제국주의적 억압과 파괴, 학살과 착취의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항거했던 필립 베리건(Philip Berrigan)이 갈파했듯이, “희생자들을 망각하는 것은 그 현장이 베들레헴이건 다락방이건 하나님, 그리고 그의 그리스도를 망각하는 일”이 되며 그렇지 않기 위한 선택은 곧 자기희생을 딛고 나가는 “어린 양의 투쟁”이 될 것이다.4)


2. 어떻게 인식이 변해왔고, 또한 변해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미국에 대한 필자의 인식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변화해갔는가? 이를 짚어나가는 것은 미국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 신화적 요소에 대한 각성과정의 한 경우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 글의 인식론적 기초가 형성되는 틀을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내줄 수 있을 것이다. 여성신학의 인식론이 강력하게 일깨웠듯이, 힘을 가진 자의 논리에서 해방된 자신의 체험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못한 논의5)는 현실에 대한 변화와 접목되지 못하는 추상적 논의로 그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지식인들 대부분의 미국에 대한 이해는 친미적인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우호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의 구체적인 정황을 충분히 알지 못하든지 또는 우리 내부의 권력관계가 미국의 그러한 민주화 지원정책을 강력하게 가로막아왔다고 보았던 것이다. 친미적 지식인들의 대거 양산은 미국 유학이 중요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도 했으며, 이 시기 한국은 미국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수준이 대체로 낮았고, 미국과 제3세계 민중들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 심각한 한계와 무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1990년 후반기 금융위기를 겪는 과정에조차도, 이미 그보다 앞선 시기에 미국의 독점적 투기금융자본의 약탈적 지배가 제3세계권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적, 현실적 실체를 각성하는 능력의 수준은 한국사회가 별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제3세계 지식인들의 인식에 사실상 훨씬 못 미치는 단계에 처해 있었다고 하겠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인식의 흔적이 다소간 남아 있기도 한데, 1970년대 한국 지식인들은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대한반도 정책을 둘러싸고 중대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전반에 걸친 미국의 패권정책에 있어서 이 두 당이 본질적으로 결정적 차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었다. 그것은 1980년 5월 광주민중 항쟁의 과정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비로소 전면적으로 가능하게 되어간 사태였던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을 결정적 계기로 하여, 한국 지식인 사회는 한반도와 미국 사이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 재검토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한 역사적 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자체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근본적으로 가로막아온 중심세력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미국이 명분으로 내세웠던 일체의 정치 윤리적 명제가 그 실천적 실체와는 모순되는 기만과 위선임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콤 X가 날카롭게 갈파한 것처럼 ‘희생자의 안목’에서 미국을 바라보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번영의 허상적 인식을 뒤흔드는 ‘미국의 악몽’(American nightmare)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6) 그가 ‘백인지상주의’(white supremacy)가 가져온 억압의 현실을 희생자의 입장에서 고발했듯이, 오늘날 ‘백색의 미국’(white America)이 세계적 패권을 쥐는 것은 윤리적으로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로 인한 ‘악몽의 현실’에 대하여 인류적 저항은 이전과는 다른 각성을 이루어가고 있다.


현대 기독교 윤리의 발전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난 세기와 오늘에 걸쳐 미국의 제국주의적 면모와 관련한 폭넓은 논의가 전개되지 못해온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미국 문제에 대한 기독교 전반의 인식, 신학적 논의의 장을 협소화해온 것만이 아니라 왜곡해왔으며 교회가 제국에 대한 투쟁, 반전평화 운동의 현장으로서 기능하는 것을 상당한 정도로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정치경제적 현실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인식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강자에 의해 지배받아 노예화되어온 자의 자리에서 제국의 문제를 바라보는 성서의 윤리와 일치해야 한다. 구약성서의 중심 테마를 제공하는 ‘출애굽’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권세와 마주하여 투쟁한 노예들의 해방투쟁과 관련된 기록이다. 다니엘서는 바빌론 제국에 포로 된 히브리 백성들의 집단적 체험이 담겨져 있으며, 예수시대 당시 십자가 처형은 로마제국의 지배와 이에 항거하는 식민지 이스라엘 민중간의 대립과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가령, 뛰어난 예수연구가 존 도미니끄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은 게릴라 전쟁의 형태로 진행된 로마제국에 대한 혁명투쟁이 예수운동의 역사적 현실에 얼마나 중대한 정치사회적 조건을 마련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7)


이렇게 성서 공동체의 제국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 나라와의 대척점에 있는, 반드시 극복하고 승리해야 할 억압과 폭력, 탐욕과 죽음의 체제를 의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서의 핵심은 “제국의 종국적 패배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는 해방공동체의 자기 고백적 선언과 실천의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대 기독교 정치윤리의 발전과정에서 1960년대 존 베넷(John C. Bennet)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적 접근8)을 내세웠던 이후로 해방신학의 출현에 이르기 전까지 이러한 관점과 인식을 바탕으로 미국 문제를 정치 신학적 성찰과 고뇌의 대상으로 본격화하는 경우를 찾는 것은 어려운 현실이었다. 이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는, 민중들의 현실을 바탕으로 사랑과 생명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와, 인간을 끊임없이 노예화하는 제국 사이의 대결이 존재한다. 바로 이 대결을 어떻게 파악하고 풀어나갈 것인가가 이 글 전반에 걸쳐 있는 주제인식이라고 하겠다.


기독교 윤리의 정치 신학적 과제는 당연히 제국의 윤리가 내세우는 허상과 기만을 폭로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화적 포장을 뜯어내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정당성을 증언하고 그 승리를 확신시키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정치윤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믿음으로 성장하는 혁명적 의지와 용기, 꿈을 강화하는 동시에, 민중적 현실을 지속적으로 주변화하고 억압하는 ‘권력의 중심’을 전복시켜 근본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작업에 공헌해야 한다.


이는 당연히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정치적 결단과 선택을 요구하며, 이에는 제국의 사슬에 사로잡힌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억압당한 자들과 하나로 연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그 핵심적 출발점이 됨은 물론이다.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한 방법론적 선택은 어떤 것인가? 우선 필자는 기존의 역사해석과 근본적 차이를 보이는 수정주의 사관의 미국 역사, 특히 그 외교사와 사회사에 대한 해석에 주목한다. 미국의 팽창주의적 현실의 내면적 요인, 그리고 특히 냉전시대의 외교사적 이해에 주력한 수정주의 사관의 통찰력은 제3세계와 관련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의 형성과정을 인식하는데 중대한 도움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탐구과정에서, 미국의 현대사 전개과정에서 미국의 좌파세력에 대한 정치적 억압과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존재하였던 것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사실은 미국의 정신사 속에 담겨 있는 모순과 억압기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주었다.


또한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는 금기처럼 되어왔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세계적 규모로 성장해온 미국 자본주의의 작동방식과 그로 인한 문제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인식론적 틀이 되었다. 이러한 접근은 미국의 문제를 추상적인 윤리논쟁의 차원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 발전과 위기라는 내용을 담은 논의로 진행시켜나가는 작업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다시 말해서, 미국은 해외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자본주의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침략적 팽창을 구조화한 체계임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나 인권, 번영과 자유 등을 내세우는 정치 윤리적 명분과는 다르게 제3세계 지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내적 동력을 파괴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의 세계화를 가져오는 현실을 각성하게 한다. 이러한 미국의 자본주의 작동방식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지난 시기 미국의 토착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과 노예로 부린 흑인들뿐만 아니라 이후, 그 세계적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주변부 지역의 민중들에 대한 일련의 학살을 초래해온 것을 직시하게 했다.


자본주의 성장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제국 아메리카(미국)는 오늘날도 여전히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의 권리를 짓밟고 박탈하고 있으며 그 내부적 계급구조는 소수의 물질적 독점을 위해 다수를 배제하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결국 독점자본의 지배체제를 위해, 저임과 순응의 노동을 강요하는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면서 자본축적을 구조화하는 체제의 존속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의 청산과 극복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의 윤리적 명분은 내부의 피지배 계급 내지는 소수자 세력을 포함한 제3세계 민중들에 대한 체계적 폭력과 파괴, 박탈과 억압을 통한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는 명백한 위선과 기만이다.  또한 그 목적은 언제나 약탈적 제국의 유지에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체제의 유지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유린해야 가능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제국의 야만은 그러기에 가감 없이 폭로되어야 한다.


아메리카 제국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필자는 특히 19세기 후반인 1890년을 고비로 민중들에 대한 폭력과 이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기만이 제도화되어왔으며, 이로써 이러한 현실은 제국의 내면적 정체성으로 굳어져 갔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당연한 결과는 주변부 민중들의 가난과 억압적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당사자 민중들 자신의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독점적 위계질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며 이 피라미드형 위계질서는 타민족에 대한 정복, 차별적 인종주의, 경제적 박탈, 군사적 지배 등의 논리를 합리화해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지난 역사적 전개 과정은, 자본의 독점적 지배를 정점으로 하여 폭력과 기만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해왔고 그로써 내부의 민중과 제3세계권의 민중들이 누려야 할 인간적 존엄과 물질적 권리, 정치적 자유와 주권적 선택을 소멸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지배가 그대로 관철되어왔거나 앞으로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제국의 권세를 강화하고 과시하면 할수록 모순은 심화되어 이에 대한 저항의 저변은 확대되고 그 결집력은 높아지며, 그에 반해 윤리적 정당성의 최후보루까지 상실해가게 될 제국의 쇠락과 패배는 장기적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제국의 파멸과정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실천적 기반은 성장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3. 구체적으로 무엇을 다룰 것인가?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위해 이 글은 먼저 미국의 팽창주의적 역사발전과정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그를 기초로 하여 특히 냉전시기에 제도화되어간 ‘폭력의 시스템’을 주시할 것이다. 이 폭력의 시스템에는 제3세계 반혁명 전략(counter-insurgency programs)과 미 중앙정보국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와 정보기관의 비밀활동(Covert Action)등이 포함된다. 지배를 위한 윤리적 명분과 저항을 통제할 실질적 폭력수단의 결합은 아메리카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룬다. 자본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부와 권력에 대한 독점적 소수의 접근에 대한 민중들의 혁명적 도전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거대한 군사주의의 성장과 경제적 종속구조의 형성, 그리고 이념적 선전과 비밀정보활동에 의한 권력관리의 총체적 결속이 불가결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제국의 지배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틀을 성역화하는 윤리적 명제와 관련하여 여기서는 네 가지를 검토한다. 그 네 가지는 (1) 인권의 수호와 문명 (2) 민주주의 (3) 시장의 자유 (4) 위대한 나라의 위대한 사명, 등이다. 이 네 가지 명제는 모두 이데올로기화되어 있는 윤리적 주제로서, 그 실질적 목표는 미국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전략과 직결된 것이다.


가령,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보자면 냉전시기와 그 이후, ‘인권의 수호와 문명’이라는 주제는 곧 반공과 반테러 전쟁에로 동일시되었고 권력이 정한 논리 이외는 배타적으로 대했으며 자본주의 체제 이외의 대안에 대한 논쟁과 가능성의 추구를 차단하는 기능을 발휘했다. 또한 미국이 강조하는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필요한 물질과 이들에게 권리로 돌아가야 할 권력에 대한 공적 관리와 지배를 거부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패권의 유지에 모순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들의 민주적 권리를 극대화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대립을 피할 수가 없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말할 때 그것이 자본주의의 계급적 지배력에 도전하는 것을 억압하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른바 ‘시장의 자유’라는 논리도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 모두의 공정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패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독점자본의 배타적 자유’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유는 아니다. 이 ‘시장의 자유’를 관철해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은 구조조정전략(structural adjustment policy)을 내세워 빈부의 격차를 분명히 하는 박탈구조를 강제화한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시장에 대한 참여가 제한되거나 봉쇄되게 함으로써 민중들과 제3세계 국가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다. 자본의 독점체계를 확보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neo-liberal globalization)에서 쓰인 그 ‘자유주의’(liberalization)는 “시장이 국가의 규제에서 해방된다”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국가권력을 자본의 배타적 권리에 봉사하도록 하는 전략임이 이로써 드러난다.


‘위대한 국가의 위대한 사명’은 그야말로 제국의 선의에 대한 윤리적 절대성을 부여하는 수사로서 억압적 대외정책에 대한 종교적 확신에 이르는 논리가 된다. 이것은 그 연원을 따져보자면 유럽의 구 제국주의가 그 지배윤리의 근거로 삼았던 ‘백인들의 부담’(white man’s burden)에 대한 미국 수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국가의 위대한 사명’ 논리는 아메리카 백인 지배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세계적 정당성에 대한 주장임과 동시에, 주변부 민중들의 주체적 자기결정력을 부인하고 능멸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억압과 학살을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부시 정권 등장 이후 21세기 식민지 전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이라크 침략전쟁도 ‘대 테러 전쟁에 대한 미국의 위대한 사명’이라는 논리로 추진되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논리의 야만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논의들을 토대로 하여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이 어떻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의 패권적 지배체제 아래 편입되어갔는지를 살펴보고, 특히 분단체제의 성립과 유지 과정에서 한반도 민중들의 권리와 자유가 어떻게 유린당해왔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면 제국의 세계적 억압과 폭력체제가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 패권적 저항을 통해 새로운 해방공동체의 성립을 위한 윤리적 지침과 전략에 대한 논의전개가 가능해진다.


이 작업의 기초가 되는 윤리적 지침은, “제국에 의해 유지되는 죽음의 권세를 거부하는 생명 운동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재론하건데, 인간을 노예화하는 피라미드형 위계질서로 유지되는 제국에 맞서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모델을 관철해나가는 해방투쟁의 핵심적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제국에 대한 필자의 연구의 최종 결산이라기보다는, 그 시작이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실로 이 작업에 가장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한 용기 있는 헌신이며 소수의 배타적 강자와 부한 자들이 영구화하려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훼손과 불의의 문제를 끊임없이 진지하게 파헤쳐나가는 꺾이지 않는 의지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제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동요하지 않는 믿음일 것이다.


3. 해방의 윤리를 위한 해석학적 기초


-반 패권 투쟁(counter-hegemonic struggle)과 기독교 정치윤리


‘출애굽’과 같은 성서의 증언은 제국에 대한 억압받은 민중들의 저항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성서의 주제의식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삼는 해방투쟁을 위한 기독교 정치윤리의 해석학적 기초를 구성한다. 모세가 실질적으로 주도해나간 고대 이집트 제국과의 혁명적 대결과 투쟁은, 민중들의 반패권적 도전과 저항이 진정한 해방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건 정의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의 뼈대가 되고 있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출애굽의 기록에 등장하는, 제국을 괴롭히게 되는 각종 재앙은 그 재앙을 일으키는 미물과 다를 바 없이 여겨졌던 민중들의 굴하지 않는 줄기찬 도전에 결국 후퇴하고 마는 제국의 종국적 쇠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누가복음 4장 16절에서 21절은 또한 나사렛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해방투쟁의 윤리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여기에서 이사야서 6장 1절-2절을 인용한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대목은 예수운동의 출범을 알리는 선언이자,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약한 자들을 투옥하며 사랑이 없는 지배를 유지하는 권력에 대한 도전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즉, 이 선언은 하나님의 생명과 자유의 영으로 가득 찬 예수운동이 강자들의 오만하고 불의한 기득권 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과 하나로 연대할 것을 명확히 알리고 있다.


에스겔서(34장 15절-16절)는 이 예수운동을 채우고 있는 정신적 기반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된 ‘선한 목자’의 원천적 근거를 이렇게 예언적 관점에서 증언한다.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게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 운동은 불의한 권력 또는 권력자들과의 정면대결을 피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의 개념으로 접근하자면 반패권 투쟁이며 이에는 대안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배타적 소수의 독점체제’로부터, ‘약자를 위한 포괄적 평등공동체’로의 전격적, 혁명적 이행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이 땅의 생생하고도 구체적인 현실의 변화와 적극적인 관련을 맺는 하나님의 영의 존재를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이 되시고’라는 성서의 중심논지는 일관해서 이 땅의 삶에 변혁적 차원을 여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 동력에 대한 일깨움이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성령의 육화’(incarnation)는 기독교 정치윤리의 해석학적 기초와 목표를 담아내고 있는 개념으로서, 예수운동으로 대표되는 해방을 향한 역사적, 공동체적 투쟁의 실질적 내용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해방신학자 메다르노 에르네스토 고메즈(Medardo Ernesto Gomez)는 역사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성령의 육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파악할 때, 해방투쟁의 민중적 동력이 소멸되지 않는 길을 발견해나갈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9) 이는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역사적 현장을 성령의 의지가 현실적으로 관철되어가는 자리로 파악하고 다가가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운동의 요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정치적 지향점은 어떤 것일까? 사무엘의 모친 한나의 기도(사무엘 상 2:1-8)와 마리아의 찬가(누가 1:46-55)는 각기 억압받는 민중들의 해방투쟁에 대한 공동체적 기원을 대변해주고 있다. 즉, 이 두 여인의 기도는 단지 이 여인들 개인의 내면적 기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의가 지배하는 역사의 현장에 대한 해방투쟁의 전복적(subversive) 의지와 정치적 결단, 그리고 확신에 찬 헌신이 집단적으로 각성되면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원과 행동이 있게 됨을 고백하는 행위인 것이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분이시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 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사무엘 상 2:1-8, 굵은 글씨 필자 강조)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누가 1:46-55, 굵은 글씨 필자 강조)


한나가 자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능멸을 당하고 괴로워했던 것은 여인 하나의 불임(不姙)사건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처지에 놓인 히브리 민중들이 내일의 희망을 잉태하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한나의 기도 속에서 그 민중적 희망이 담고 있는 혁명적 변화의 내용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것은 티끌과 거름더미에 파묻혀 있던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역사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의미함을 알게 된다. 사무엘의 탄생은 바로 그 민중적 희망의 새로운 출발점이 가능해진 것을 상징한다. 에스겔의 ‘선한 목자’로 표상되는 반패권투쟁의 주체세력 형성이 실현되는 것이다.


게바라와 빈지머가 규정하고 나섰듯이, 마리아의 찬가는 한나의 기원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전승가, 즉 평등공동체를 이룩하려는 투쟁의 인간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전투를 찬양하는 노래”10)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마리아의 찬가는 예수 운동이 선포하고 관철하려는 바, 즉 하나님 나라의 흔들리지 않는 의를 앞서 드러내주고 있는 셈이다. J.P.M. 월쉬(Walsh)는 그의 책 <강한 자들을 그 권좌에서 몰아내어(The Mighty form their Thrones)>에서 강자와 약자의 대립 구도 속에서 갖게 되는 ‘심판,’ ‘정의,’ ‘계약’ 등의 성서적 견해와 의미를 폭넓게 다루었다. 그는 강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갖는 구원사적 의미, 그리고 압제자의 손에서 풀려나는 해방을 보장하는 계약의 형태로 실현되는 종말론적 정의의 회복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의 범주 밖에 있는 악한 자들은 그런 자들의 운명에 예정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갖는 힘을 비로소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로운 자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복음이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과정을 통해서 위로받으며, ‘그날 하나님의 오심’은 압제자의 손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 한껏 기쁨에 취하며 하나님의 주권이 가진 풍요함을 누리고 그 계약의 은총에 감격해 한다. 의로운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공포가 아니라 구원이요, 민중들의 연대와 옳고 그름의 확정, 그리고 생명이 충만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 된다.”11)


하나님의 심판은 해방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궁극적 승리에 대한 최종확증이며, 하나님의 의는 바로 이 확증된 승리가 실현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몰트만이 주시한 바처럼 불의한 현실에 있어서는 그것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전복적(顚覆的) 개입과 함께, 약자와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에게 ‘새로운 존엄성과 강력한 역사적 행동력’12)을 부여하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제국의 억압에서 민중들을 자유롭게 할 반패권 투쟁과 이 과정에서 해방 공동체 건설을 위해 봉사해야 할 기독교 정치윤리는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 자신의 ‘혁명적 자기 존중의 능력’을 회복하고, 그로써 자신들을 노예화하는 강자들의 불의한 권세와 권위에 두려움과 열등감 없이 도전하는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몰트만은 억압받은 민중들의 해방투쟁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억압과 능멸의 고난 받는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첫 아들 예수의 권위와 존엄성을 가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주체적 존재가 된다. 예수는 이들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이들에게 부여하신 파괴될 수 없는 존엄성을 확실하게 각성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그 스스로의 운명이 타자에 의해 좌우되었던 가난한 자들, 노예, 여성 등의 백성들은 진토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돕는 의지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13)


결국 민중들의 전복적 결단과 행동은 이들 자신에게 있어서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고 확인하며 이를 구현해나가는 문제가 된다. 그 가치는 현실의 강자들에게 모멸과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며, 오랜 이념적, 정신적 세뇌의 과정을 통해서 이들 민중들에게조차도 저버림 받아왔던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정치윤리는 민중들 자신이 하늘로부터 받은 존엄한 가치와 생명의 능력에 대한 혁명적 개안(開眼)과, 이를 가로막고 있는 기존질서의 모순을 돌파하는 논리의 공급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진보적 여성신학자 비벌리 해리슨(Beverly Wildung Harrison)은 혁명적 (여성) 기독교 정치 윤리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의 도전은 사회관계의 근본을 바꾸어 나가면서 기존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나가는 창조적 행동,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새로운 양식을 발견하는 일에 있다.”14)


그녀는 또한, “맹목적 순응을 요구하는 그 어떤 윤리도 거부하며, 이를 공동체적으로 함께 성찰할 수 있는 과정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억압에 희생당한 이들과 스스로를 일치, 연대하여 대안체계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초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해방투쟁의 과제가 된다. 이는 신학적 명제로 따져보자면, 본 회퍼가 지적했듯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상실된 일차적 관계를 회복하는 일”15)이며 “비통해하며 고통 받고 가난한 이들을 언제나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하게 되는 제자적 사명”16)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제국의 폭력과 기만에 맞서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나갈 제자공동체의 성장은 실로 중요하다. 기존질서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그 권세에 집단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이 ‘제자 공동체’가 없으면, 기독교 정치윤리는 억압받은 민중들의 삶 속에 뿌리내려야 할 혁명적 영성의 동력을 강화하기 쉽지 않다.


초대교회사가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Brown)은 예수 제자 공동체가 기존의 주류사회와 대립하면서 성장해온 것을 주목하고 있다. “초기 예수 제자 공동체는 다음의 특징을 드러내주고 있다. (1) 농민투쟁의 전통 (2) 가족, 종교, 부, 신학적 논제 등에 걸친 기존 질서의 주장과 이것이 정당화하는 현실에 대한 거부 (3) 평등공동체적 전망 (4) 제자 공동체 내부의 특별한 사랑과 포용 (5) 자발적 조직 (6) 제자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의 전면적 헌신 요구 (7) 기존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종말론적 역사관”17) 이러한 예수 제자 공동체의 초기적 발전 형태는 오늘날 기존의 권력질서가 주도하고 있는 부정의한 체제에 도전하는 일체의 해방투쟁조직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특징과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반패권 투쟁을 통한 해방 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예수 운동은 힘없는 민중들에게 마침내 도래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집단적 축제를 실현해나가는 작업이며, 그 본질적 출발점에 있어서 민중적 현실에 헌신하려는 혁명적 선택이 된다. 그러기에 이를 위해서는 거듭 강조하듯이, “역사적으로 주변부화 된 이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기존의 위계질서 안의 세력들이 가진 희망과 존엄성을 확증하는 정치적 행동이 필요”18)하다. 말하자면 기독교 정치윤리는 중간지대에서 애매한 중립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편, 즉 부당하게 억압받고 본래의 존엄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자들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이미 강자의 악에 암묵적으로 협력하는 일이 되고 만다.


성서학자 월터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은 “진정한 하나님과 진정한 인간성의 역사에 대한 희망이 성서의 중심주제”19)라고 갈파하고 있다. 성서에 근거를 둔 기독교 정치윤리의 해방 전통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이해는 진정한 인간성 회복과 그것이 권리가 되는 시대를 목표로 하는 민중들의 역사적 투쟁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증언해내는 일이다.  그와 함께,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현실에서는 대안으로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실천적 전망을 밝혀내는 일과 동일하다.


결국 이는 이 세상에서 부정의한 권력에 의해 그 생명적 가치가 박탈당하고, 주변부화되고 억압받으며 그 권리를 상실하고 존엄성이 짓밟힌 인류에 대한 사랑이며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편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파괴하는 제국의 지배를 대체할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이를 현실에서 이루어가는 고난과 도전에 찬 대안투쟁은 바로 이러한 정치 윤리적 신조와 신앙적 결단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해방의 주체로 민중은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4.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저항과 해방의 신학


해방신학, 그리고 한국적 현실에서 태동한 민중 신학의 관점은 제국의 윤리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의 기초를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 활동이 기대된다. 이 두 신학은 기본적으로 제3세계 민중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투쟁의 의미를 깊이 조명하고 있으며, 그로써 주변부적 상황에 처한 민중들의 역사적, 현실적 고난과 열망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 시대의 히브리 민중들이 처한 고난의 현장과 그대로 맥이 이어지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전제할 것은, 초기 민중 신학의 경우 지난 냉전 시기, 분단의 현실 속에 있는 한국사회의 이념적 제한 때문에 해방신학에 비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분석과 비판 면에서 상대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민중 신학이 3세대의 단계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문제에 대한 보다 정밀한 사회과학적 인식을 심화시켜왔다는 점에서는 해방신학과 방법론상 일정한 인식의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의 흑인신학과 유사한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태동한 해방신학은 ‘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를 내세운 군사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과, 서구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탈에 대한 민중들의 투쟁에 그 인식론적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즉 안보국가로 치장된 제3세계 군사주의 체제와 서구 제국주의는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체제적 요구에 따른 현상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1960년대 제3세계에 만연한 이른바 안보국가는 더 큰 맥락에서는, “서구 제국주의의  ‘원시적 자본 축적’(primitive accumulation)과 관련된 정치적 소산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3세계 내에 종속적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억압, 제거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안보국가라는 것이다. 이는 매판성이 강한 자본과 제국의 보조병력으로 기능하는 제3세계 현지의 군사주의가 결합한 ‘종속형 파시즘’으로 나타난다.


해방신학의 대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기본적인 인식 틀을 심도 깊게 규정해나가는 가운데, 이렇게 외부의 체제적 요구에 종속되어버린 “가난한 민중들의 역사적 주체성을 새롭게 세워나가는 작업”을 그 신학적 실천의 핵심으로 짚었다.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 민중이 그들의 노동과 땀과 권리가 그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인간적 자기실현의 과정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부정당하고 소외되고 있는 상황에 대항하는 도전과 투쟁을 의미하며, 바로 이 해방투쟁의 과정이 곧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워나가는 선교적 헌신이 되는 것을 포함한다.20)


이는 권력과 자본을 쥐고 있는 세력이 역사를 농단하는 것에 대한 정면대응이자, 한나의 기도 또는 마리아의 찬가에서 외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티끌과 거름덩이에 파묻힌 가난하고 미천한 자의 들림”을 신학화한 것이라고 하겠다. 구티에레즈는,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은 제국주의 지배질서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주시하면서, 해방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 실천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한 현안, 특히 아직 발전하지 못하고 억압된 나라들의 현실에서 너무나도 절박한 과제는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살며 자신들의 운명에 대하여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투쟁을 통하여 정의롭고 형제애가 가득 찬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21)2)


이런 전제 위에서, 구티에레즈는 ‘가난한 사람들의 인식론적 특권’(an epistemological privilege of the poor)이라는 개념을 방법론적 기초로 내세우고,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지지하거나 또는 비판하지 않고 있는 서구 신학의 기본 틀에 대해 매우 전복적(subversive)인`‘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신학체계만이 아니라 현실세계도 주류 지배계급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과 그 경험에 뿌리박은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강조했다.


4-1. 가난한 사람들의 인식론적 특권의 문제


이러한 인식론적 선택은 주류 지배계급의 시각으로 규정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해방투쟁의 일환으로서, ‘식민지 정신구조’(colonial mentality)22)를 해체하는 작업이 된다. 사실 이러한 의식구조가 주변부 민중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면, 제국주의 지배체제는 큰 어려움 없이 유지될 수 있다. 주변부 민중 자신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3세계 민중들의 정신구조를 지배하는 이러한 식민주의적 요소에 대한 비판은 민중이 억압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일체의 비인간화를 강요하는 상황에 대한 예언자적 질타이자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선언”23)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민중을 주변부적 존재로 만드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의 현실에 대항하여 전선을 형성해왔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 무엇보다 ‘발전론’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발전론이 담고 있는 모순과 환상의 진상을 폭로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경제 발전을 통한 개발이라는 논리로 무장한 발전론은 군사주의적 요소를 강화시킨 케인즈주의의 이론을 정책화한 것으로, 안보국가론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24) 즉, 경제적 역량이 낙후한 제3세계가 서구와 같이 급속한 발전을 이루려면, 정치적 통합이 1차적 과제인데 이는 군사적 응집력이 강화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강조함으로써 군사주의 체제의 등장과 유지를 옹호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발전이 아니라 도리어 식민지적 상황으로의 전락과 진정한 발전의 지체로 나타났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신학적으로 정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신학의 논리적 전제가 되는 ‘종속이론’(theory of dependency)은 발전론으로 정당화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종속이론은 발전론이 낳은 불의한 사회경제적 구조와,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중심과 주변부 간의 극단적인 차별성 및 양극화`25)를 이념적,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들의 혁명적 도전이었다. 종속이론이 그 지역의 자본주의적 발전가능성을 부인했다는 점은 이후 문제가 되지만, 종속이론의 반체제적 관점에 주목한 해방신학은 신학적 사유 속에 정치경제학적 방법론의 유용성이 갖는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신학과 역사적 현실의 접목에 대한 치열한 이론적 투쟁을 벌였다.26)


4-2. 종속이론과 세계적 계급투쟁의 문제가 해방신학에서 차지하는 의미


그런데 종속이론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중심과 주변부 간에 존재하는 모순에 주로 관심을 보였다면, 구티에레즈의 신학은 보다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 서서 ‘세계적 계급투쟁의 틀’ 속에서 계급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서, 구티에레즈는 종속이론이 해명하기 위해 노력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 중심과 주변부적 위계질서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이는 한편, 주변부 내부의 강자와 약자, 또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대변되는 계급투쟁의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결국, 해방투쟁의 주체를 세우는 문제가 결정적 관건임을 의식했으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계질서를 바꾸는 문제도 주변부 내의 계급적 지배체제의 변화가 원초적 전제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여 그는 계급 분석의 이론적, 실천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오직 계급 분석만이 지배국가와 그에 종속된 나라의 민중들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과 갈등의 현실적 진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모순만 주목할 경우, 현실의 진정한 갈등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 오류를 범하게 되며 결국에는 실제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두루뭉술한 이해에 그치고 만다. 따라서 ‘세계적 계급투쟁이라는 틀’을 현실 분석의 기초로 삼지 않는 한, 종속이론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뿐만 아니라 기만적 논의가 될 수 있다.”27)


이렇듯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은 국가 폭력이나 사회적 양극화와 같은 종속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에 있어서 계급적 이해(利害)의 차이를 놓치고서는 문제의 정확한 분석이 어려움을 일깨우고 있다. 인간 사이의 집단적 대립과 갈등은 그 사회가 창출한 가치에 대한 계급적 이해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점에서 구티에레즈의 지적은 옳다.


한편, 자본주의적 부의 축적 양식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성과 착취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 방법론에서 정치경제학과 신학을 결합시킨 프란츠 힝켈라메르트(Franz J. Hinkelammert)는 ‘시장의 자유’ 또는 ‘자유시장’이라는 미국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주변부 민중들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해왔다고 갈파했다.28) 그는 “자본을 떠받드는 물신주의(fetishism)”는 “죽음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라고 규정하면서, 이는 ‘안보국가’라는 형태로 나타난 군사독재와 자유시장 이론을 서로 결합시켜 자신을 실현해나갔다고 주장했다. 즉, 생명보다는 죽음의 세력이 민중들의 운명을 규정해나갔다는 것이다.


힝켈라메르트의 라틴 아메리카 종속 자본주의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비판은 민중의 삶이 자본의 지배와 그 정치적 기구에 의해 얼마나 ‘치명적으로’ 희생당해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문제 제기 앞에서 자본주의 문제는 다만 정치경제적 현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로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역시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관련하여 해방 투쟁에 대한 신학적 논쟁의 영역에 “생명의 하나님”29)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땅에 생명의 나라를 일구어내는 것이 목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이렇게 보자면, 해방 투쟁은 “생명의 땅으로 가는 고난과 투쟁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4-3.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구


구티에레즈는 ‘생명의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이해를 전제로 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갖고 있는 정의로운 능력을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 그리고 억압받는 민중과 그 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특별히 편애하신다고 강조했다. 하여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그것이 역사의 현실적 투쟁에서 어떻게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 또는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해방에 대한 선포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해방은 총체적 해방이다. 그것은 일체의 부정의와 착취의 근본에 직접 이르는 일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우정과 사랑을 분열시키는 문제의 근원에 곧바로 들어서는 선택이기도 하다.`…`이것은 그 어떤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적 경험이며 또한 역사적 실천행위의 문제이다. 따라서 (복음의 근거인) 성서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가난한 자를 능멸하는 현실과 대적하여 해방과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30)


그는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움은 좌절과 낙담에 깊이 빠져 있던 예수운동을 새롭게 일으켜 세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 진면목이 모두 실현되었다고 하면서, 종속적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죽음의 권세와 억압을 이겨내는 과정이 곧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31)임을 명확히 밝혔다. 구티에레즈가 정리한 해방신학의 이러한 현실 인식과 해방 투쟁에 대한 역사해석, 신학적 규정은 기독교가 자신의 신앙행위와 실천의 지평을 어떻게 넓혀나가야 할 것인가를 도전적으로 묻고 있는 셈이다. 서구 신학의 흐름이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내면적인 실존에만 국한”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에 반해, 해방신학은 “인간의 가장 절박한 현실적 처지의 문제로부터 그 신앙의 관점과 실천의 지침을 출발”시키고 있다.


구티에레즈의 영향을 깊이 받은 성서학자 비르질리오 엘리존도(Virgilio Elizondo)는 고난의 역사와 마주한 현실에 대하여 ‘갈릴리적 상황’이라는 개념으로 오늘의 세계적 모순과 갈등에 접근하고 있다. 그에게서 ‘갈릴리적 상황’이란 특히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해방투쟁에 대한 공동체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미국 주류사회의 위계질서로부터 거부당하고 배척당하며 능멸당하고 있는 존재들의 아픔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집단적 투쟁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4-4. 예수는 주류사회를 거부함으로써 거부당한 위대한 거부자


구티에레즈는 예수를 “주류사회의 거부(拒否)를 거부한 거부자”(the reject who rejects the rejection)로 파악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선택과 행위를 통해서 기존 질서의 숨겨진 폭력적 면모를 세상에 드러냈다고 갈파했다.32) 폭력적 진상의 폭로 행위는 “폭력을 추방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자신이 폭력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구조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결단”에서 가능해진다고 한 엘리존도는, 이 저항 행위의 결과인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예수가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음을 주목했다.


즉, 예수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권력에 의해 거부된 자, 신성 모독자, 정치적 선동자로 낙인 찍혀 처형당하고 말지만, 사실상 그는 인간성을 짓밟는, “눈멀고 스스로를 절대화하며 억압적인 세계의 죄”에 희생당하는 ‘아무런 죄 없는 의로운 존재’임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죽음 속에서 세상의 가면은 벗겨지고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죄악상을 스스로 폭로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억압하고 속이며 그 존엄한 생명적 가치를 능멸하는 세계의 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당연한 과제가 되며, 그런 현실과 마주하여 극복하려는 해방 투쟁은 주류사회의 논리와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나가는 예수운동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운동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억압적인 현실의 의미를 해독해나가려는 신학적 노력은 성서 자체를 해방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작업과 직결되며, ‘제국’의 문제와 관련한 기독교 정치윤리의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33) 이렇게 해방신학이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해와 성서해석학의 방법론적 결합을 추구하는 것은, 신학이 이제는 더 이상 공허한 교리적 논쟁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에 바짝 다가가서 하나님 나라라는 대안을 구체적으로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의 관점’에서 진보적 신학논쟁을 풀어나가게 된 그 연원을 보자면, 1968년 콜롬비아의 메들린 회의(Medellin Conference)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회의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에 대한 신학적 논의와 성찰의 심화를 통해 발전론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정교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해방투쟁에 대한 교회적 관심과 목회적 헌신이 촉구되었다.34)1즉, 라틴 아메리카 종속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는 더 이상 세속적 좌파 운동과 민중투쟁의 대상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민중에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라틴 아메리카 교회의 중심 과제로 정리된 것이다.


이 역사적인 메들린 회의 이후, ‘해방’에 대한 신학적 개념은 해방 투쟁의 실천적 과정에서 그 개념이 갖는 중요성이 주목되면서 더욱 심화되어나갔다. 가령, 엔리크 뒤셀(Enrique Dussel)은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역사적 발전 경로를 설명하면서, ‘사로잡힘’(captivity), ‘유배’(exile), 그리고 ‘해방’(liberation) 등의 신학적 개념에 대하여, 주변부 지역에 대한 제국의 지배와 그에 따른 억압이라는 틀로써 그 의미를 보다 심화, 발전시켜나갔다. 즉 이러한 개념들이 담고 있는 역사적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복원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제국과 식민지 체제 간의 모순과 대립 등의 문제를 집중 조명해나간 것이다.35) 해방과 관련된 신학적 논의는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이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지 않은 서구 신학의 지배 아래 있던 신학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4-5. 1968년 메들린 회의의 혁명적 전환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인종차별에 의한 부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를 전개하지 못했다. 인종차별 또는 인종주의의 문제는, 서구 제국주의가 제3세계 민중을 학살하고 노예화하며 식민주의적 비인간화를 관철하면서 제3세계를 지배하는 근간의 하나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이 서구의 정치경제학적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해방은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종에 따른 차별과 부당한 지배는 당연히 해방신학의 주 관심대상이 되어야 했다.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이런 비판에 직면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토착 원주민들의 인권과 이들의 정치경제적 권리에 대한 논쟁도 보다 심화된 수준에서 전개해나가게 되었다.


서구 신학에 충격을 준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만 태동한 것이 아니었다. 1968년 메들린 회의와 유사한 시기에, 미국에서도 신학적 혁명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제국의 내부에서 터져나온 서구 백인신학에 대한 반격이었다. ‘흑인신학’이 바로 그것이다.


흑인신학은 미국 사회의 오랜 인종주의와 그에 따른 차별에 저항하는 흑인 민중의 투쟁이 흑인 교회의 예언자적 전통과 합류하는 과정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미국의 흑인신학은 민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삶에 의해 구체화된 흑인 교회의 예언자적 맥락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36)


흑인신학의 이론적 선구자 제임스 콘은 흑인신학 태동하게 된 현실적 문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국에서 흑인신학의 등장은 우선 무엇보다도, 백인 위주의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과 예수의 복음을 서로 연결시키는 데 실패한 백인 기독교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 흑인신학은 해방의 신학이다. 그 까닭은, 미국 사회에서 억압당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처지를 바탕으로 예수의 복음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질문하고 그 답을 찾으려 하는 노력에 그 신학적 출발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37)


제임스 콘은, 흑인신학 등 해방신학의 역할은 “억압당하고 있는 이들의 자유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실천에 대한 언어”38)를 명확히 해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해방을 향한 현실의 변화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억압당한 이들의 투쟁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규명하는 작업과 일치한다. 이와 함께, “이 세상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이들을 선택하여 세우셨다는 점과 관련되지 못하면” 해방신학의 윤리적 기초는 무의미해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39)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신학이 현실의 억압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극복의 의지를 조명하고 강화하지 않을 때 그것은 윤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4-6. 흑인신학과 해방의 과제


흑인신학은 이후 한국의 민중 신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는 양자 모두가 “민중적 고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서구 백인신학의 패권적 논리에 대한 저항”을 통해 새로운 신학적 입지를 만들려는 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로 미국의 역사를 파고들어 보면, 흑인 노예에 대한 대학살과 노예제도의 가혹성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가 드러난다. 그러나 서구 백인신학은 이러한 미국의 어두운 이면사를 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았고, 이러한 현실을 “하나님 나라와 그 의”라는 각도에서 사고하고 언급하지 않았다. 고난의 가장 고통스러운 현장 하나를 외면했던 것이다.


흑인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이슬람의 종교적 확신 위에 서 있는 말콤 엑스의 백인 지배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과, 백인사회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마틴 루터 킹의 유럽적 배경을 가진 기독교 신학은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말콤 엑스는 ‘흑인’이라는 자의식의 특별함과, 백인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 사회에 그대로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타협점 없는 자세를 통해서 ‘흑인의식’40)을 날카롭게 각성시켰다. 말콤 엑스의 이러한 영향에 의해 미국의 흑인신학은 백인 지배사회가 가하는 억압의 악몽 같은 현실의 진상을 드러내고, 그와 함께 대안이 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제시하는 작업에 관심을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흑인신학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 결여됨으로써 미국의 지구적 제국주의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는 한계를 보이고 만다.


흑인신학과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하지만, 최초의 흑인노예 해방혁명 투쟁인 1791년의 산 도밍고 혁명은 억압받은 유색인종이 인종차별적 자본주의의 식민지 체제에 대한 저항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흑인신학의 사상적 원류의 하나를 형성한다. 투쌍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가 이끈 산 도밍고 혁명은 앞서 언급했듯이 서구의 인종차별적 자본주의 착취 체제에 대하여 최초로 성공한 흑인 혁명이었다.


이 산 도밍고 혁명은, 흑인신학이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적 폭력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제국의 식민지배를 위한 위계질서에 저항한 민중들의 민주적 투쟁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결합시켜나갈 수 있는 하나의 근거를 제시해준다. 트로츠키주의자인 C.L.R. 제임스는 그의 책 <검은 자코뱅(The Black Jacobin)>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백인 지배자들에게 순종하는 재산처럼 만들어버리는 인종주의적 자본주의로 나타난 제국의 잔혹성을 생생하게 표현해내었다. 그가 기록한 대목의 하나는 아프리카 민중들이 서구 자본주의의 노동착취 전략에 따라 얼마나 끔찍하게 희생당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들 아프리카 인들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산된 잔혹한 폭력체제가 성립되었다. … 몸의 일부를 절단해버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가령, 손이나 발, 귀, 때로 성기 등을 잘라버려 이들에게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해버렸다. 주인의 무서움을 절감하게 한 것이다. 그 주인들은 이들 노예들의 손이나 팔, 또는 어깨에 펄펄 끓는 초를 부어버리기도 하고, 이들의 머리 위로 뜨거운 사탕수수 녹은 물을 쏟기도 하며, 산 채로 태워버리거나 천천히 불에 익혀버리든지 몸에 화약을 채워 성냥을 긋고는 그 자리에서 폭발해서 날려버리기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뿐 아니었다. 목만 땅 위에 내놓은 채로 생매장을 하기도 했으며 머리 위에 설탕을 부어 파리들이 잔뜩 달라붙어 죽게 하는 일도 있었다. … 도대체가 그 경우를 헤아릴 길이 없이 많지만, 문제는 이러한 잔혹한 행위가 노예체제의 일상에서 너무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41)22)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 과정에서 전개된 이러한 야만적인 인간 살육과 억압 행위는 흑인신학이 이후 고발하게 된 미국 현실의 이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흑인신학은 이러한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과 결합시켜나가는 데서 다소간 인식론적 한계를 보여주었으나, 그 신학적 발전 과정에서 후기에 이르면 미국 자본주의를 그 중심에 놓고 접근하는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4-7. 자본주의 문명 전반에 걸친 총체적 분석과 비판의 필요


이와 관련하여 해방철학자이자 흑인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코넬 웨스트(Cornel West)는 흑인신학 발전 과정을 네 단계로 구별한다.


즉, (1) 흑인 노예체제에 대한 비판, (2) 제도적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 (3) 백인우월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 (4) 미국 자본주의 비판 등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42) 이와 같은 흑인신학의 발전 경로를 기반으로 하여 코넬 웨스트는 말하길, 이제 흑인신학은 제5단계로 접어들어야 한다면서 자본주의 문명 전반에 걸친 비판으로 확장, 심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 흑인신학에는 (1) 체계적인 사회 분석의 결여, (2) 사회적 비전, 정치적 프로그램, 구체적인 실천전략의 부족, (3) 죽음, 질병, 절망, 공포, 절망 등의 실존적 현안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경향 등이 있다고 지적했다.43)


실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식민주의는 제3세계 민중에 대한 제국의 인종주의적 지배와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따라서 흑인신학이 애초에 주목한 인종주의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은 중요하다.44) 미국에서 발전한 흑인신학보다 아프리카에서 태동한 흑인신학이 식민주의에 대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 날카롭고, 코넬 웨스트가 주목한 대로 자본주의 문명 자체에 대한 총체적 비판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렇게 해방신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짚어보자면,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키는 논리에 대한 반체제적 투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제국과 그 제국의 주변부 지배에 대한 저항과 해방의 윤리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시작된 민중 신학은 여기서 따로 깊이 다루지 않겠으나, 이 또한 해방의 윤리를 밑바닥에 깔고 하나님의 해방의 영에 충만한 민중이 주체가 되는 역사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해방신학 전반의 입장과 동일한 궤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다만 민중 신학의 경우에는 ‘제국’의 문제에 대하여 여타 제3세계 해방신학의 경우에 비해서 충분한 신학적 비판의식을 보이지 못했으며, 이는 냉전체제의 압도적인 지배와 미국에 대한 정치 이념적 자세에 따른 제약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3세계 신학자들의 교회일치적 대화(ecumenical dialogue of third world theologians)에서 드러난 것처럼, 제국과 식민주의 문제에 대한 보다 치열한 논쟁은 해방신학 전반에 걸쳐 중대한 과제이며, 기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특히 아프리카 신학자들의 문제제기에 더욱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탄자니아의 신학자 패트릭 마사냐(Patrick Masanja)가 아프리카의 현실과 관련시킨 신학적 과제에 대한 1976년의 언급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서구의 지배와 서구신학의 지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해방신학적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현실을 신학적으로 논할 경우, 우리는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다국적 기업, 민족해방, 독립 이후의 국가건설, 매판 자본가 계급 등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오늘의 아프리카를 형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안이자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45)


5. 제국에 대한 저항과 인간해방의 신학을 위해


결국 인간을 짓밟고 노예화하는 일체의 역사와 문명, 정치와 경제에 대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투쟁은 그 정점에 제국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또한 그로 인한 비극적인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이와 관련된 일체의 신학적 논의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펼쳐나가고, 이를 극복할 실천적 지침을 얼마나 명확하게 마련해나갈 수 있는가에 초점이 모아질 것이다. 해방신학의 문제제기는 그러한 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여전히 낡지 않았다.


그 외양이 어떤 치장을 한다 해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의 정치경제윤리학은 어떻게 구체적이고도 역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로써 진정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명료하고도 확고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가 그토록 주목했던 "희생자들의 문제"46)를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폭넓게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 인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착취 및 양극화 구조와, 신보수주의의 폭력 장치를 제거, 극복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다.  한국사회의 현실도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유린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더욱 심각한 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한반도는 남북 군사대립과 미국의 군사적 지배가 거대한 폭력체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해야 할 신학이 직무 유기하는 상황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더군다나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지구촌 각 곳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인간과 자연, 공동체적 연대와 생명의 가치를 파괴하고 있는 현실은 이제 신학이 거대한 제국이 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정면으로 맞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사명을 실천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제국의 착취와 폭력은 하나님 나라와 대적한다.  기독교 신학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서야 할 것인지는 너무도 명백하지 않은가?








게시물수 90건 / 코멘트수 33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90 성 & 젠더 정체성은 참 많고 다양하다! 미선 1605 10-13
89 보수-진보 성서관 비교 & 정경 외경 확정 여부 미선 2183 06-27
88 의과대학 교수들이 만든 의학 만화 미선 7614 04-08
87 Rollin McCraty, "Heart-Brain Interactions, Coherence, and Optimizing Cognitive Skills" (1) 미선 16984 12-15
86 [펌] 과학적 회의주의자가 본 한의학과 대체의학 (한정호) (1) 미선 41076 07-08
85 수운의 시천주 체험과 동학의 신관 (김경재) (1) 미선 8926 05-03
84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신학의 변혁 (필립 클레이튼) 미선 7104 02-06
83 진화론에 대한 다섯가지 오해(Mark Isaak ) 관리자 8719 01-25
82 [펌] 이천 년 그리스도교 교회사 중요한 사건 연대 정리 관리자 7922 06-26
81 체화된 인지에 대하여, 뇌, 몸(신체), 환경은 하나라는 강한 외침 (이정모) 미선이 8024 02-03
80 안병무의 신학사상,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을 중심으로 (박재순) 관리자 6972 01-31
79 다석 유영모의 도덕경 한글본과 영역본(Legge) (3) 관리자 9232 01-31
78 연결체학(connectomics)에 관하여 미선이 9768 01-25
77 유교경전, 새천년표준사서 종합대역본 자료입니다. 관리자 6541 01-19
76 [펌] 오링테스트 및 사이비 대체의학 비판 미선이 15307 12-19
75 <몸과 문명> 느낌과 감각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미선이 6731 12-17
74 [박노자 칼럼]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의 공통 소망 '목적의 왕국' (1) 노동자 6767 08-07
73 [지리산 바람] 때로는 이혼(離婚)도 / 한성수 노동자 6030 08-01
72 [프레시안] "세상 사람들이여, '사탄의 시스템'을 두려워하라!" / 김두식 (1) 노동자 6642 07-31
71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모색 / 김윤성 노동자 6506 07-27
70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 홍정수 노동자 6345 07-22
69 폴 틸리히의 종교 사회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원리 노동자 7085 07-21
68 [한국민중신학회발표] 제국의 신학에 대항하는 통합적 약자해방신학 (2) 미선이 8100 05-07
67 [구약] 종교다원주의 or 토착화 신학의 정당성을 구약성서에서 발견하기 (김이곤) 미선이 6562 04-25
66 [구약] 출애굽 해방 사건의 구약신학적 의미 (김이곤) 미선이 7339 04-25
65 [펌] 리더쉽 이론 미선이 11110 03-13
64 진화론, 생명체, 그리고 연기적 삶 / 우희종 미선이 7391 01-21
63 비폭력대화 주요 구절들 미선이 6830 08-26
62 세계공황과 한국경제의 나아갈 길 (김수행) 미선이 7139 06-29
61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 (석오진) 미선이 8360 06-02
60 마음의 지도(맥그로이) 미선이 8322 05-22
59 관상기도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수행 방법들(이건종) 미선이 7963 05-02
58 이슬람의 영적 가치관과 생활 속 수행 (이희수) 미선이 5871 05-01
57 새로운 민중신학과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정강길 6654 04-20
56 밑으로부터의 세계화/지역화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응 (김영철) 미선이 11333 04-19
55 다원사회 속에서의 기독교 (정진홍) 미선이 7378 04-17
54 영성의 평가와 측정에 대한 연구 자료들 미선이 6394 03-31
53 [자료강추!] 인도철학사 (길희성) 미선이 7316 03-02
52 기업적 세계화의 뿌리와 그 열매: 신식민주의와 지구촌의 황폐화, 세계인의 빈곤화(김정숙) (1) 미선이 7770 02-05
51 [강추!] 부자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채만수) (3) 미선이 15531 04-22
50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유정원) 정강길 8190 05-20
49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김경재, 오강남) 정강길 9609 04-28
48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강길 10803 04-27
47 이안 바버가 보는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 유형 (김흡영) 정강길 11088 07-16
46 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장윤재) 정강길 8240 01-07
45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경재) 관리자 7431 11-12
44 竹齋의 현재적 그리스도론 (김경재) 정강길 7528 05-06
43 경험은 믿을만하며,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황희숙) (1) 미선이 7568 01-07
42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갈릴리 복음'으로 돌아가야 산다! (김경재 교수) 미선이 6982 01-06
41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정진홍 교수) (1) 관리자 7597 12-15
40 진리란 무엇이며,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한전숙) (1) 미선이 7856 12-01
39 “복음주의, 알고 보면 기득권주의” (1) 미선이 6331 11-28
38 기존 기독교인이 동성애혐오증을 가장 크게 지녔음을 말해주는 조사자료들 미선이 6230 11-28
37 영성에 대한 원불교 교리적 고찰 (백준흠) 미선이 6409 11-21
36 '죄'와 '구원'에 대한 전통신학의 한계와 과정신학적 해석 (김희헌) 관리자 7027 11-02
35 영성과 영성수련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강길) (3) 관리자 6951 11-02
34 21세기의 종교-새로운 영성을 위하여 (길희성) (1) 미선이 7562 10-15
33 현대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 (오영석) 미선이 6466 10-14
32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이숙진) (1) 치노 8175 10-01
31 [기조강연 전문]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디서 오나? (길희성) (1) 관리자 7384 10-01
30 [참조] 세기연의 월례포럼 자료들은 '세기연 월례포럼' 게시판에 따로 있습니다. 관리자 6030 07-29
29 SBS'신의 길 인간의 길' <제4부 길위의 인간> 전문가 인터뷰 정리 미선이 9567 07-29
28 프레크 & 갠디, 『예수는 신화다』(국역판 전문) (4) 미선이 9601 07-20
27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 학자들의 SBS취재 인터뷰 내용 미선이 7880 07-06
26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 김민웅 마루치 7437 05-21
25 [펌]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1) 고돈 린치 7515 02-27
24 역사적 예수 제3탐구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 (김덕기) 정강길 7470 02-21
23 희랍 동성애의 특성과 사회적 역할 마루치 6917 02-15
22 몰입 (나에 대한 최고의 순간이자 그것 자체가 행복인 순간) 관리자 7888 09-12
21 예수 교회 예배 주보 표지를 장식할 '예수 이후의 예수들' 관리자 7931 08-03
20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초기지, 공동체 운동에 대한 좋은 자료들 관리자 9535 07-02
19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관리자 11548 06-27
18 김경재 - 한국교회와 신학의 회고와 책임 정강길 7098 06-06
17 이성정 -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강추!) 관리자 9088 01-27
16 행복 보고서 정강길 8040 01-18
15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3) 성직자 및 종교단체에 대한 평가 관리자 6982 01-06
1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2) 한국인의 종교관과 의식구조 관리자 9366 01-06
13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 한국인의 종교실태 관리자 8697 01-06
12 우리나라의 3대 종교-불교/개신교/천주교- 분포 지도 (*통계청) 관리자 15876 12-15
11 종교 인구 20년간 어떻게 변했나? (*통계청) 관리자 13545 12-15
10 한국 종교계는 치외법권지역인가? 관리자 9028 11-24
9 보수 기독교인들 특히 C.C.C가 널리 전파하는 <4영리> 자료 관리자 11745 10-27
8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김준우 11012 10-21
7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강추) 돈큐빗 9391 10-07
6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잠농 통프라스트) 관리자 9282 10-04
5 숫자로 보는 한국 장로교의 정체 (3) 이드 16046 06-21
4 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그것이 알고 싶다! (강추) 미선이 13356 05-31
3 [펌] 니케아 회의 시대 (313-590) 관리자 16629 05-30
2 [펌] "미국은 神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는가?" (1) 미선이 8232 05-17
1 [유다복음서 전문]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미선이 15318 04-28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