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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진리란 무엇이며,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한전숙)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08-12-01 09:42 조회(7856)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g001/87 




아래의 글은 <대학인을 위한 철학 논쟁>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글인데
좋은 토론꺼리를 제공하는 글이라 올려놓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한전숙
 
"믿는다고 해서 진리인 것은 아니다. 감각적으로 입증할 수 없거나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진리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어떤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진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진리라고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네 말이 맞다." 또는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이다."하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 생활, 특히 학문적 활동에서 직접, 간접으로 추구하고 있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
 
   우선 믿음이 가는 것, 확신이 가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말이 있다. 원시 기독교 시대에, 신생 기독교가
다른 여러 종교들 속에서 제 자리를 잡아 나가려는 어려운 노력들을 하던 시절,
경건한 신앙 생활보다는 교리의 철학적 해석에만 골몰하는 일파를 보다못해 외친
소리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다. 이것은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는 죽은 후에 부활하였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하다."라고 이어진다. '합리적'이란 이성에 합당하고 논리에 합당한 것, 즉 이치에
맞고 논리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이치에 맞는 것이라야
믿는다. 사실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란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귀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요, 이때 믿음이란 인간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설명을 초월한 세계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인 믿음 말고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 즉 확신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 '해는 아침에 동쪽에서 솟아올라 낮에는 중천으로 올라가고 저녁이면
서쪽으로 진다'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믿어 왔다. 이것은 매일매일 거듭되는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해가 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요, 사실은 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지구가 그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라고 배워 알고 있다.
 
  또, 나는 어렸을 적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신다."든가
또는 "뱀은 몇십 년 몇백 년 묵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굳게 믿고 있었다. 이것은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말, 결국 남의 말을
토대로 한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나면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나 용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다. 내 눈으로 똑바로 본 것도 믿을 수 없고
내가 믿는 다른 사람들의 말도 믿을 수 없다. 그러면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믿음이란 주관적인 확신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견해이지만 엄연히 진리인 것도
있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을 때 그 당시의 사람들은 다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진리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겠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지식은 어떤 조건, 어떤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의 세 가지 학설이
있어 왔다.

     대응설:"백문이 불여일견"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네가 직접 가 보렴."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느니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 가 보아서 사실과 들어맞으면 내
말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각이나 판단이
사실이나 대상에 들어맞을 때 진리라고 한다. '들어맞는다'는 말 대신 '일치한다' 또는
'대응한다'는 말도 쓴다. 그런데 판단과 사실은 하나는 관념적. 추상적 존재이고, 또
하나는 감각적, 구체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두 삼각형이 합동이라고 할 때와 같은
경우라면 모르되 이렇게 존재 방식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들어맞는다'든가 '일치한다'는
말보다는 '대응한다'는 말이 좀더 적합할 것이다.

  이렇듯 '판단이 사실에 일치, 대응할 때 진리'라고 하는 견해를 대응설이라고 한다.
대응설은 일상적으로는 모사설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믿고 있다.
가령 앞에 있는 책상이 모나고 노란 색깔이라고 할 때 우리의 시각으로 파악된 표상
또는 관념(모나다, 노랗다)은 앞에 있는 대상(책상)이 사실상 지니고 있는 성질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그 책상은 우리가 지금 시각을 통해서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모양(모남)과 색깔(노랑)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그 책상을 모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책상이 실제로 모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이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아서 밖에 있는
대상이 조금도 왜곡됨이 없이 그대로 비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식 능력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주장을 모사설이라고 한다.
우리가 마음에 가지는 표상이나 관념은 바깥 대상의 모사라는 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대상은 우리의 관념과 일치, 대응한다는 주장이다.
 
     비판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정말 거울과 같이 대상을 언제나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일까?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너무도 무비판적으로 감각적 모사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만 반성해 보아도 우리의 감각이 늘 거울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물론 대상을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하에서라는 단서야 붙겠지만,
그러나 내 감각 기관의 생리적 상태, 조명, 대상의 위치 등등 모든 것이 아무리
정상적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인간의 감각 기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인간은 냄새 맡는 데 있어서 개에 비해 뒤떨어진다.
소리를 듣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현미경이나 망원경, 보청기 등 여러 보조 기구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래도 우리 감각의 파악 기능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우리의
감각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모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사설
또는 대응설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사설의 성립 여부는 인간의 감각 기관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고, 감각
기관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는 모사설이 성립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모사설은 순수 이론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다. 모사설이 올바른
주장이려면 관념과 대상의 일치 내지 대응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념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알려면 이 둘이 서로 비교되어야 할
텐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책상이 노랗다는 나의 관념이 사실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려면 나는 그 책상을 다시 한 번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그
책상에 관한 또 하나의 관념을 가질 뿐이요, 책상 자체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처음에 가졌던 '모나다'는 관념과 지금 다시 한 번 직접
보면서 가지는 '모나다'는 새 관념뿐이다. 나는 아까의 '모나다'와 지금의 '모나다'는 두
관념을 비교할 수 있을 뿐, 관념과 대상 자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적 모사설이 원칙상 성립하지 못함을 밝혀 준다. 우리의 감각은 마치 거울과도
같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므로 관념은 대상과 일치, 대응한다는 모사설의
주장은 이 양자의 일치 여부를 확인할 도리가 없으므로 철학적 이설로 성립하기에는
너무도 소박한 견해라고 하겠다.
 
     정합설:"기존의 지식 체계에 들어맞으면 진리"

  대응설은 관념과 대상의 일치를 진리라고 하지만 그 일치, 대응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결국 그전에 가졌던 관념과 지금 가지는 새 관념을 비교할 수 있을 뿐
아닌가? 즉, 관념과 대상의 일치를 노리면서도 실제로는 관념과 관념의 일치를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대응설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대응설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이미 본 바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비판은
우리의 자식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관념, 지식을 갖는다는 것이요, 우리는
언제나 관념들만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결국 관념의 세계를 뚫고 대상,
실제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경험,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 때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가려
낼 수 있을까? 대상, 실재에 비추어 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체계, 더구나 가능하면 옳다고 판별된 체계에 비추어 볼 수밖에 없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카메라로 사진 찍듯이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그 대상을 책상이 아니라 걸상이라고 안다는 것은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의 경험적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즉, 지금 가지는 지각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과거의 경험의 그물에 비추어서 걸상이면 걸상이라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것이다. 이 과거의 경험의 그물이란 우리가 그 속에서 생활해온, 그래서 이미
통용되어 온 지식의 체계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을 안다, 새로운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 무엇이 기존의 지식 체계로 설명이 된다, 이 체계와
부합한다, 거기에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새로 가진 지식이 기존의 지식 체계에 모순됨이 없이 들어맞는가
어떤가에 의해서 지식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주장을 정합설이라고 한다. 정합 적이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순 없이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대응설은 일상 생활이나 대부분의 실증 과학에서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진리론 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이 사실과 일치할 때 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책상은 모나다'든가 '지금 비가 내린다'든가 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지식의
진위를 사실 계에 비추어 보아서 확인할 수 있을 때에만 통용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감각적 실증이 가능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옳다고 믿고 있는 판단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이 책상은 모나다'와 같이 감각적 검증이 가능한 판단이 아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내 경험이나 내가 믿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사람의 경험도 미치지 못하는
먼 과거나 먼 미래의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결코 감각적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칭(모두 전, 일컬을 칭)판단이나 또는 추상에 추상을
거듭한 고차적인 과학적 판단들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 낼 수 있을까? 정합설은 바로
여기에 적합한 이론이다. 더구나 수학이나 논리학같이 감각적 현실계와 아무 상관도
없는 형식(형상 형, 법 식)과학에 있어서는 경험적 관찰에 의한 검증은 생각할 수도
없고 오로지 새 이론이 기존의 이론 체계와 정합 하는가에 따라서 그 진위를 가릴 수
있을 따름이다.

     비판

  정합설은 감각적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형식 과학에만 적용되고 사실
과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제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 난점이 있다.
우선 판단이 기존의 판단 체계와 적합할 때 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기존의
판단 체계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또 그보다 앞선
기존의 판단 체계와 정합 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히 소급되어 필경은 그 이상
소급할 수 없는 제 일의 판단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이 제 일의 판단의 진리성은 그
이전의 기존 판단 체계와의 정합에서 구해질 수 없고, 이와는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 그 진리 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정합설은 그 안에 정합설이
아닌 다른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 된다.

  또, 정합이란 두 판단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말하는데, 그러면 정합설은 논리학의
기본 원칙인 모순율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모순율 자체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을까? 물론 복잡한 과학 이론에서 직접적인 관찰이나
검증이 불가능한 때에는 이미 진리라고 인정되고 있는 기존의 이론 체계와의 정합
여부가 새로운 이론의 진위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됨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순율
자체의 진위가 문제일 때 이것도 정합 여부로 가름할 것인가? 역시 정합설은 다른
어떤 원리의 토대 위에 있다고 하겠다.

     실용설:"소 발자국을 따라가니 인가가 나오더라"

  미국의 실용주의는 이제까지의 대응설이나 정합설과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진리를
고찰한다. 실용주의에서는 지식을 그 자체로서 다루지 않고 언제나 생활상의 수단으로
본다. 그리하여 실용설에서는 지식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거나 실제로 유용할 때 참이라고 한다. 원래 실용주의는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실험 과학의 방법을 논리적 사고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시킨 것이다.
실험 과학의 명제는 이론적으로 아무리 하자가 없더라도 실험의 결과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즉, 실험이라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명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이다.

  가령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 생각하고 따라갔더니 과연 인가가 나왔다고 하자. 이때 이
사람의 '소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 하는 생각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져
예상한 결과에 도달함으로써 진리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념,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생각에 그치고, 즉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행동을 통해서 실제 생활에 적용되어
유용하면 그때 비로소 진리로 되고, 유용하지 못하면 거짓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의 진위가 실제 행동과의 관련에서 가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리를 오로지 이론적인 영역 내에서만 논의하고 있는 앞의 두 진리론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시각이라 하겠다. 즉, 실용주의는 진리론을 인간의 행동, 실천과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진리론을 현실 생활계에 밀착시킨다는 아주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동시에 실용주의 진리관은 각기 일면적이기만 한
대응설과 정합설을 자기 속에서 종합하기도 한다. 위에서 든 소 발자국의 예에서 '소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는 관념은 실제로 우리를 그 발자국을 따라가는
행동으로 이끌어 간다. 이때 실용주의자들은 관념이 이렇게 행동을 인도해 가는
과정이 아무런 지장이나 모순도 없고 순탄하게 진행되면 그것을 '정합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인가가 발견되는 것은 '관념과 실재의 일치 내지 대응'이며, 이
일치가 바로 유용, 유효라고 한다. 이렇게 고전적인 두 진리론은 실용설에서 인간의
행동, 실천과의 관련에서 새로운 해석을 입으면서 종합되고 있다.

     비판

  실용설이 현실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만족스럽다'든가 '실제로 유용하다'든가 하는 개념은 아주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진위를 가리는 논리적 기준으로서는 매우 불명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동일한 문제 상황에서 서로 상반되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는데 둘 다
성공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상반되는 두 신념이 같이 참이
되는 것이다.

  또, 진리가 이렇게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관념의 진위는 행동을 통한
실제적인 결과를 기다려야 비로소 판정된다는 뜻이다. 즉, 구체적으로 실행해 보아야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 본다(try, test)'는 과정을 밟고서 진위를 판가름낸다는 것은
힘에 여유가 있다든가 또는 성공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든가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또 무엇이나 다 해 볼 수는 없다. 사실 죽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민족이 한번 망해 봐야 한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해
본다'라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 행동은 시험삼아
한번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확신의 기반 위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의 세 진리론은 이와 같이 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문제되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그때 그때 적합한 진리론을 골라야 할 것이다.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낙하 법칙(S=1/2gt제곱, V=gt)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세 사람의 대화를
읽으면서, 이들이 진리론의 어떤 입장에 서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지 생각해 보자.
 
  진실:낙하 법칙이 올바른 것은 그 법칙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만약 낙하 법칙이 실재 자연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의 규칙성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법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법칙이 될 거야.

  석규:글쎄, 낙하 법칙이 자연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을 꼭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갈릴레오가 아무리 수많은 실험을 해서 그 법칙을 만들려 했다 해도 그것은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또 실험에서 경험된
내용이 꼭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낙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진실:낙하 현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우리의 인식이 그것을 올바로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낙하 법칙은 진리인 거야.

  석규:그건 매우 소박한 사고야. 지식은 우리의 두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적
활동인데, 그러한 지성의 작용을 존재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범주 착오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하자면, 실재 코끼리와 사진 속의 코끼리를 같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진실:실재 코끼리와 사진 속의 코끼리는 물론 다르지만, 사진 속에 있는 코끼리가
사진의 모델인 그 코끼리인 건 분명하잖아. 인간의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을
개조하는 데 개입할 수 있다면, 과학적 지식이 객관적 세계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네 주장대로라면 낙하 법칙은 물론 인간의 모든 지식이 믿을 수 없는 게
돼. 네가 이용하고 있는 모든 과학적 혜택도 믿을 수 없고.

  석규:아냐! 나는 낙하 법칙과 같은 자연 과학적 지식이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야. 내가 주장하는 건, 낙하 법칙이 진리인 것은 그것이 객관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야. 가령 갈릴레오의 낙하 법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결과가 아니라 수학적
계산의 결과라 할 수 있어,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소박한 생각이야. 오히려 기존의 자연 과학적 지식 체계에서
낙하 법칙이 무모순적으로 정합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진실: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만약 하나의 세계관을 독단적으로 상정해서
그것으로부터 인간 지식의 진리 여부를 확인하려 한다면 '독단론'에 빠질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지 않아? 예를 들어, 중세에 신의 존재와 절대성을 자제한 세계관에
부합하는 지식만을 진리라 주장한 것은 독단론의 대표적인 사례야. 너는 아마 수학,
기하학, 논리학과 같이 엄밀한 추론의 지식 체계야말로 진리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말할 테지. 그러나 고대에 말의 이빨 수를 경험적 관찰이 아니라 기하학과 같은
이성적 추리로 알아 내려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창민:야! 너희들 갑자기 철학자가 되었냐? 복잡하게 말한다고 해서 유식한 게
아니야. 잘난 척하지 마! 뭐 그리 복잡할 게 있어? 자연 과학적 지식을 자연 현상에
적용해서 유용한 결과가 나타나면 그것이 진리아냐? 좋은 게 좋은 거지!

  석규:말도 안 되는 소리! 가령, 생체 실험이나 핵 실험은 어떤 사람에게는 유용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희생해야 하는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진리 여부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아.

  진실:그만, 창민이까지 끼여드니까 더 복잡해진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자.
 
 
     토론해 봅시다

  1. 상식도 일상 생활에 유용한 지식이다. 그러나 진리와는 구별된다. 그렇다면
진리와 상식은 어떤 조건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2. 대응설과 정합설 중 하나의 입장을 택해 그것을 주변의 예를 들어 정당화해 보고,
상대의 진리론의 한계를 비판해 보자.

  3. 실용주의 진리관을 정리해 보고 그것의 한계를 비판해 보자.
 
 
     주요개념
  상식, 진리, 대응설, 모사설, 표상, 관념, 정합설, 대상, 경험, 실재, 지식의 체계, 전칭
판단, 형식 과학, 모순율, 실용주의, 실험과학
 
 
     참고 문헌
 
  김여수 차인석 한전숙, '철학개론' 제1부 제2장, 양서원, 1988.
  소광희 이석윤 김정선, '철학의 제 문제' 제3장 제8장, 지학사
  김여수, '진리의 문제', 한국사회과학연구소 편 '사회 과학의 철학', 민음사, 1980.
 
 ...............................
 
 
if-그렇다면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위의 저 세 가지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 중에 과연 어디에 속할까요?^^;;
 
 
정관 (08-12-01 11:15)
 
신비라 그래야 할지 비전이라 해야할지 그러한 책들에 보면
진리란 반짝이는 무한면을 가진 보석이라고 얘길 합니다. 네 마음을 열고 네 의식을 깨어버리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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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펌] 이천 년 그리스도교 교회사 중요한 사건 연대 정리 관리자 7922 06-26
81 체화된 인지에 대하여, 뇌, 몸(신체), 환경은 하나라는 강한 외침 (이정모) 미선이 8024 02-03
80 안병무의 신학사상,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을 중심으로 (박재순) 관리자 6972 01-31
79 다석 유영모의 도덕경 한글본과 영역본(Legge) (3) 관리자 9232 01-31
78 연결체학(connectomics)에 관하여 미선이 9768 01-25
77 유교경전, 새천년표준사서 종합대역본 자료입니다. 관리자 6542 01-19
76 [펌] 오링테스트 및 사이비 대체의학 비판 미선이 15308 12-19
75 <몸과 문명> 느낌과 감각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미선이 6731 12-17
74 [박노자 칼럼]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의 공통 소망 '목적의 왕국' (1) 노동자 6767 08-07
73 [지리산 바람] 때로는 이혼(離婚)도 / 한성수 노동자 6030 08-01
72 [프레시안] "세상 사람들이여, '사탄의 시스템'을 두려워하라!" / 김두식 (1) 노동자 6643 07-31
71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모색 / 김윤성 노동자 6506 07-27
70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 홍정수 노동자 6345 07-22
69 폴 틸리히의 종교 사회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원리 노동자 7085 07-21
68 [한국민중신학회발표] 제국의 신학에 대항하는 통합적 약자해방신학 (2) 미선이 8101 05-07
67 [구약] 종교다원주의 or 토착화 신학의 정당성을 구약성서에서 발견하기 (김이곤) 미선이 6563 04-25
66 [구약] 출애굽 해방 사건의 구약신학적 의미 (김이곤) 미선이 7339 04-25
65 [펌] 리더쉽 이론 미선이 11111 03-13
64 진화론, 생명체, 그리고 연기적 삶 / 우희종 미선이 7391 01-21
63 비폭력대화 주요 구절들 미선이 6830 08-26
62 세계공황과 한국경제의 나아갈 길 (김수행) 미선이 7139 06-29
61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 (석오진) 미선이 8360 06-02
60 마음의 지도(맥그로이) 미선이 8323 05-22
59 관상기도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수행 방법들(이건종) 미선이 7964 05-02
58 이슬람의 영적 가치관과 생활 속 수행 (이희수) 미선이 5871 05-01
57 새로운 민중신학과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정강길 6654 04-20
56 밑으로부터의 세계화/지역화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응 (김영철) 미선이 11333 04-19
55 다원사회 속에서의 기독교 (정진홍) 미선이 7378 04-17
54 영성의 평가와 측정에 대한 연구 자료들 미선이 6394 03-31
53 [자료강추!] 인도철학사 (길희성) 미선이 7317 03-02
52 기업적 세계화의 뿌리와 그 열매: 신식민주의와 지구촌의 황폐화, 세계인의 빈곤화(김정숙) (1) 미선이 7770 02-05
51 [강추!] 부자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채만수) (3) 미선이 15531 04-22
50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유정원) 정강길 8190 05-20
49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김경재, 오강남) 정강길 9609 04-28
48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강길 10803 04-27
47 이안 바버가 보는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 유형 (김흡영) 정강길 11089 07-16
46 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장윤재) 정강길 8241 01-07
45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경재) 관리자 7432 11-12
44 竹齋의 현재적 그리스도론 (김경재) 정강길 7529 05-06
43 경험은 믿을만하며,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황희숙) (1) 미선이 7568 01-07
42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갈릴리 복음'으로 돌아가야 산다! (김경재 교수) 미선이 6982 01-06
41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정진홍 교수) (1) 관리자 7597 12-15
40 진리란 무엇이며,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한전숙) (1) 미선이 7857 12-01
39 “복음주의, 알고 보면 기득권주의” (1) 미선이 6331 11-28
38 기존 기독교인이 동성애혐오증을 가장 크게 지녔음을 말해주는 조사자료들 미선이 6231 11-28
37 영성에 대한 원불교 교리적 고찰 (백준흠) 미선이 6409 11-21
36 '죄'와 '구원'에 대한 전통신학의 한계와 과정신학적 해석 (김희헌) 관리자 7028 11-02
35 영성과 영성수련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강길) (3) 관리자 6951 11-02
34 21세기의 종교-새로운 영성을 위하여 (길희성) (1) 미선이 7562 10-15
33 현대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 (오영석) 미선이 6466 10-14
32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이숙진) (1) 치노 8175 10-01
31 [기조강연 전문]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디서 오나? (길희성) (1) 관리자 7384 10-01
30 [참조] 세기연의 월례포럼 자료들은 '세기연 월례포럼' 게시판에 따로 있습니다. 관리자 6030 07-29
29 SBS'신의 길 인간의 길' <제4부 길위의 인간> 전문가 인터뷰 정리 미선이 9568 07-29
28 프레크 & 갠디, 『예수는 신화다』(국역판 전문) (4) 미선이 9601 07-20
27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 학자들의 SBS취재 인터뷰 내용 미선이 7880 07-06
26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 김민웅 마루치 7437 05-21
25 [펌]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1) 고돈 린치 7515 02-27
24 역사적 예수 제3탐구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 (김덕기) 정강길 7471 02-21
23 희랍 동성애의 특성과 사회적 역할 마루치 6917 02-15
22 몰입 (나에 대한 최고의 순간이자 그것 자체가 행복인 순간) 관리자 7889 09-12
21 예수 교회 예배 주보 표지를 장식할 '예수 이후의 예수들' 관리자 7931 08-03
20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초기지, 공동체 운동에 대한 좋은 자료들 관리자 9535 07-02
19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관리자 11549 06-27
18 김경재 - 한국교회와 신학의 회고와 책임 정강길 7098 06-06
17 이성정 -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강추!) 관리자 9088 01-27
16 행복 보고서 정강길 8040 01-18
15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3) 성직자 및 종교단체에 대한 평가 관리자 6982 01-06
1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2) 한국인의 종교관과 의식구조 관리자 9367 01-06
13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 한국인의 종교실태 관리자 8698 01-06
12 우리나라의 3대 종교-불교/개신교/천주교- 분포 지도 (*통계청) 관리자 15876 12-15
11 종교 인구 20년간 어떻게 변했나? (*통계청) 관리자 13545 12-15
10 한국 종교계는 치외법권지역인가? 관리자 9029 11-24
9 보수 기독교인들 특히 C.C.C가 널리 전파하는 <4영리> 자료 관리자 11745 10-27
8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김준우 11013 10-21
7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강추) 돈큐빗 9391 10-07
6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잠농 통프라스트) 관리자 9283 10-04
5 숫자로 보는 한국 장로교의 정체 (3) 이드 16048 06-21
4 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그것이 알고 싶다! (강추) 미선이 13356 05-31
3 [펌] 니케아 회의 시대 (313-590) 관리자 16630 05-30
2 [펌] "미국은 神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는가?" (1) 미선이 8233 05-17
1 [유다복음서 전문]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미선이 15318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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