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46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46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문서자료실
이미지자료실
동영상자료실
추천사이트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198
어제 270
최대 10,145
전체 2,833,186



    제 목 : 경험은 믿을만하며,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황희숙)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09-01-07 02:21 조회(7615)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g001/97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엮은이:김창호  펴낸이:백석기  펴낸곳:웅진출판주식회사
 

     경험은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황희숙 : 자연 현상에 대한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은 지식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어떤
경험이 믿을 만한 것인가?

  인간의 이성은 지식의 형성과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지식이란?

  지식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능에 들어 있을 앎에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류학에 따르면,
인간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일상 용품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하여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알려는 욕구가 생겨났다고 한다. 물건, 재료의 성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지식이란 인간이
생존하는 데 절대 필요한 수단 중의 하나임을 알려 준다. 인간이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잘 알지 못하고는, 그리하여 적절히 자연을 통제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연약한 '생각하는 갈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 중 어떤 것이 지식이라 불릴 수 있는가?
사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알아내는 것은 여러 가지다. 조물주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고, 악상을 얻을 수도 있고, 인생과 사람에 대한 고상한 시적 상상력도 자극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을 지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개념상 지식이란 자연의
규칙(또는 법칙)에 대한 이해를 말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마찰시키면 불씨를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은 지식의 일종이다. 그것은 나무의 마찰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들로부터 나무와 마찰 간의 관계에 대한 어떤 규칙성을 알아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적 발견이란 일반화의 기술이다. 일반화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 관련되지 않는 것을 구분해 내고, 관련 있는 것들간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지를 알아내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깨달음이다. 예컨대,
나무토막의 모양이나 크기, 색깔은 불씨와 관련이 없지만 나무의 건조 상태는 관련이
있지 않은가? 그러한 구분으로부터 일반화가 시작되며, 그로부터 지식이 얻어진다.

  모든 지식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일반화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대해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힘이기도 하다. 위 예에서 적당히 마른 나무를
마찰시키면서 불씨가 생긴다는 일반적 지식은, 바짝 마른 나무들이 쓰러지면서 서로
마찰되는 것을 보고 그 나무들로부터 불씨가 생겨나 큰불이 나리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러한 예측으로부터 나무숲에서 불이 나지 않게 하려면 나무들을 성기게
심어 마찰이 일지 않도록 조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식에 의해 자연에 대처하고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베이컨(F. Bacon)이라는
근세 철학자의 유명한 격언 "지식은 힘이다."라는 말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일반화는 지식의 출발점이자 지식이 주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학문 또는 일반화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 하면
학문이란 체계화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현상에 대한 믿을 만한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모아 놓으면 경제학이 되며, 물체의 물리적 성질들에 대한 믿을
만한 지식들을 모아 놓으면 물리학이 된다. 그러나 어떤 지식, 어떤 일반화가 믿을
만한 것인가? 이에 대하여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갖고 있다.
 
     경험주의의 대두

  한 가지 대답은, 우리가 경험한 내용을 왜곡 없이 충실하게 반영하는 그런
일반화야말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이러한 생각은 경험이야말로 신뢰할 만한
지식의 원천이라는 이른바 '경험주의(empiricism)'의 철학적 입장으로 나타난다.
경험으로부터 나온 어떤 법칙들은 사실 믿을 만하다. 예컨대 단순한 물리 법칙들, 즉
물은 뜨겁다, 인간은 죽는다, 받쳐지지 않은 물체는 밑으로 떨어진다 등의 법칙들은
예외 없이 성립하는 믿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심은 씨앗은
싹이 틀 것이다, 바람이 심하면 비가 온다, 물을 많이 마시면 건강에 좋다 등의
일반화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들이지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지는 않다. 그것들은
여러 가지 예외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심은 회의론자라는 전문적인 의심쟁이들에게서 더욱 증폭되어 나타난다.

  회의론자란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의심해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 경험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물 속에 넣은 막대가 굽어 보이고, 먼 곳의
물체가 가까운 곳에 있는 같은 크기의 물체보다 작아 보이는 등의 착시 현상, 주변의
빛깔에 따라 달라지는 지각 현상, 신기루 같은 착각 현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감각 경험은 곧잘 사실을 잘못 파악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감각에서 비롯되는 지식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경험이 불신될 때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인식 능력은 이성의 그것이다.
이성이야말로 물리적 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철학자들은 '합리주의(rationalism)'라 부르는데, 이들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그들의 지식
모델을 수학적 지식에서 찾는다. 사실 수학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학문
분야가 아닌가?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지식이 수학적 형식을 지니지 않는 한 결코
지식이 아니라고 말할 만큼 수학을 모든 지식의 최고 형태라고 믿었다. 지식에 관한
한 이러한 생각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가장 주도적인 입장이었다. 근세의 대표적인
합리주의 철학자인 데카르트(R. Descartes)의 생각 또한 지각에 의한 지식이
불확실하며 믿을 수 없다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경험은 지식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경험 과학'이라는 말이 보여 주듯, 우리는 오늘날 지식이 경험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관련인가?

  경험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논거는 수학적 지식, 이성적 지식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알듯이 수학적 지식의 체계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연역된 정리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역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이란 전제로 삼고 있는 정의와 공리의 내용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
논리학자들이 알아 낸 성과이다. 단순한 연역의 예를 들어 보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것은 논리학 교재에서
전형적인 연역 추리의 예로 제시되는 것인데, 여기서 결론은 전제와 다른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즉, 결론은 전제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일부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낼 뿐 새로이 알려주는 정보가 전혀 없다. 이렇게 사람과
소크라테스에 대한 전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이상의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 연역 추리의 본질이며, 따라서 그러한 원리에 의존하는 지식은 영원히 정의와
공리에 들어 있는 정보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원하며 그것이 지식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라면, 연역적 추리에만
의거하는 지식은 불충분하다는 것이 경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연역 추리에
대비되는 추리 형태--귀납 추리--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지식에 대한 중요한 대안이
된다.

  이러한 발상 자체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있어 왔지만 그것이 정연한 철학적
입장으로 완성되는 것은 17세기 들어 경험 과학이 발전하고 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나타나기에 이르러서이다. 새로운 근대 경험주의의 주장은 베이컨의 유명한 비유에
의해 잘 표현된다. 베이컨은 합리주의를 자신의 몸에서 거미줄을 뽑아 내는 거미에
비유하고, 단순한 경험주의를 재료를 그냥 모으기만 할 뿐 그것들이 갖고 있는 질서를
발견해 내지 못하는 개미에 비유했다. 반면 자신이 옹호하는 새로운 경험주의는,
재료를 모아 소화하고 그것에 자신의 것을 첨가시켜 더 고차적인 산물을 창조하는
꿀벌에 비유했다. 이 비유에 경험 지각이 지식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고 거기에서
이성이 담당하는 역할은 보조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경험주의의 지식관이 잘 진술되어
있다.

  경험주의의 지식 모델은 합리주의자들의 수학적 지식 모델을 극복하여 지식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는 동시에 경험의 역할이 폄하되는 상황을
역전시킨 점에 중요성이 있다. 경험주의자들에 의해 올바른 지식은 기본적으로 경험적
지식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얻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주의의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베이컨의 꿀벌이라는 비유 속에 이미 문제의 단서가 주어져
있는데, 그것은 그 비유가 경험의 중요성과 함께, 비록 보조적인 것으로 격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성의 역할 또한 분명히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이컨을 위시한
경험주의자들은 지식에 있어서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는 데 전념한 까닭에 이
문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이후 경험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
나타난다.
 
     과학에서의 경험--귀납주의의 비판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지식 형태는 (자연) 과학이다.
사실 우리의 현대 문명은 그 자체 자연 과학 및 연관된 공학의 발전에 의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이름인 '과학 기술 시대'는 그런 연유로 붙여진 것이다.
경험주의라는 철학적 주장은 자연 과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서 '귀납주의'란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있다. 이때의 귀납주의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과학적 탐구는 경험적
사실의 관찰, 수집으로부터 시작되며, 수집된 사실들에 대한 세밀한 분류, 분석을 통해
가설이 제시되고, 그 가설이 실험적 증거에 비추어 확인됨으로써 이론으로 확립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사실들로부터 가설에 이르는 과정이 귀납 추리의
과정이다. 이는 일견 설득력 있는 지식 탐구의 모델이다. 과학자라 모름지기 세심한
정신과 도구를 가지고 관련 사실을 관찰, 수집하며, 그 사실들로부터 일반적인 가설을
이끌어 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각 아닌가? 그러나
과학적 탐구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많이 철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먼저 사실의 관찰, 수집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과학자는 어떤 사실을 관찰해야
하는가? 사실이란 세상에 너무 많지 않은가? 따라서 과학자는 '관심 있는' 사실을
관찰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사실이 관심을 끌 것인가? 그것은 기존 이론과
불일치하는 사실일 것이다. 1643년에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는 우물 펌프로부터 물을
퍼 올리던 중 물이 10미터 위로는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되었는데, 그것은 그 사실이 당대에 지배적이던
생각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교의 아래
진공 펌프가 물을 길어 올리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는 즉 지구상에 생겨나는
진공은 즉시 어떤 물질에 의해 메워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10.33미터 이상의
진공 펌프 관은 메워지지 않는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연구함으로써 대기압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되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이란 그
자체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이론적 선입관 없이는 관찰할 만한
사실을 만날 수 없다.

  또한 관찰 사실이 가설을 제안해 주지도 않는다. 일군의 관찰 사실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설들은 여러 가지다. 앞서의 진공 펌프의 예에 대해서도 10.33미터
이상의 공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물질이 채워져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
또 신은 수면으로부터 10.33미터 이상의 높이에 있는 진공은 싫어하지 않는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이는 가설이란 사실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가 사실들의
집단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상상적으로 부과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가설이란 자연에
대해 제안된 상상적인 한 가지 해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경험이 어떤 가설의 참됨을 확인해 줄 수도 없다. 제안된 가설이 어떤
관찰 사실과 부합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관련 사실들과도 모두 부합한다고
예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관찰 사실들에 근거하여 '모든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고 하자. 많은 관찰 증거, 실험
증거들이 추가된다면 이 가설은 참으로 확인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열을 받았을 때 팽창하지 않는 금속이 세상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찰 경험은 가설의 거짓됨만은 분명하게
확인해 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열을 받았을 때 팽창하지 않는 금속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위의 가설이 거짓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이론을
경험에 비추어 검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방식이다.

  이러한 논의는, 경험은 그 자체 지식 탐구의 출발점도 아니고, 올바른 가설을 제시해
주는 단서도 아니며, 또한 가설의 참을 확인해 주는 것도 아님을 알려 준다. 물론
우리의 지식 탐구는 경험과 무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 아니, 시작조차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경험 의존적이다. 그러나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은 의외로 미묘하며,
그것은 결코 과장이어선 안 된다. 이제 지식과 경험의 올바른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식의 탐구:경험, 이성의 이중주

  최근 과학 철학자들은 과학의 역사가 무척 격렬히 변화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일반인들은 흔히 과학은 세심한 연구에 의해 발견된 진리들을 하나씩 축적해
가는 점진적인 과정이겠거니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 과학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혁의
역사라는 것이다. 과학은 기존의 이론과 그에 상충하는 새로운 사실간의 기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새로운 이론이 그 사실을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다투는
'투쟁'의 장이라는 것이다. 쿤(T. Kuhn)이라는 유능한 과학사가에 의해 실제의
과학사가 그런 것임이 이미 확인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학 이론들이란 언제라도 새로운 사실들의 발견에 의해 판결에 붙여질 수
있는 잠정적인 설명들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학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 무한히 풍요로운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발견된 사실이 기존 이론과 상충할 때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구성함으로써 과학적 이성이 답해야 할 문젯거리가 된다.
과학자들은 그 사실들을 수용해 낼 수 있는 참신한 가설을 새로이 고안해 내는 데
전념하며, 그 결과로서 과학은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과학의 실제 발전 과정이라면, 이 관점에 입각하여 지식에 있어서 이성과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여기서 경험은 단순한 관찰 자료가
아니라 탐구를 자극하는 문젯거리로서 나타난다. 이성은 그렇게 제시된 문젯거리를
해결함으로써 우리의 지적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역할을 맡는다. (앞서 지적되었지만,
경험은 제시된 새로운 이론이 거짓된 것일 때 그를 확인해 주는 기능 또한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은 이성 앞에 사실을 자료 또는 문제로서 제시하며, 이성은 그
경험 속에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의견을 가설로서 투사한다. 이때 투사된 가설의
신빙성에 힘입어 우리는 미래의 경험을 예측하는 힘을 얻게 된다. 공학이란 바로
이러한 예측력을 실용적으로 응용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경험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반면, 이성은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성 단독으로 이런 예측 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경험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제 우리의 논의를 철학사에 비추어 자리매김함으로써 마무리하도록 하자.
지금까지의 논의가 간단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사실 흄(D. Hume)이라는 철학자가
이르렀던 깨달음을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흄은 지식의 탐구가 경험적 자료의 수집,
그로부터의 귀납 추리에 의해서만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고 18세기에 이미 지적하였다.
우리는 태양이 아침마다 떠오르는 것을 계속 보아 왔다는 경험에 근거하여 '태양이
내일도 떠오를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추리 즉 귀납 추리는 그러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매일 아침 해가 떠올랐다는 사실이 오늘밤 태양이 폭발하여 내일
아침에는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흄은 이를
귀납 추리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귀납 추리는 미래에 관한 믿을
만한 진술을 단념해야 하며, 그것은 단순한 형태의 경험주의, 귀납주의가 지식에 대한
올바른 모델일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흄의 결론이 타당함을 다시 확인하고, 그에 대한 대안적
모델_이성과 경험의 역학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지식의 모델을 생각해 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지식, 과학은 단순한 이성의 사변이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요, 경험
사실의 조심스러운 수집, 분석도 아님을 알았다. 지식은 경험에 의해 촉발되고 이성의
합리적 상상력에 의해 살이 붙는 그런 것이다.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창민은 방학 동안에 유럽 배낭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에 대해
석규, 진실과 대화한 내용을 읽어보자.

  창민:백문이 불여일견이야! 너희도 바깥 세상을 한번 구경해야 돼. 그래야 세계화
시대에 시야를 넓힐 수도 있고...

  석규:문자 쓰네. 너희 부모처럼 우리 부모도 부자면야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니?
물론 외국에 나가 보면 안 나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말야.

  창민:내가 뭐 부모에게 돈을 타서 간 줄 아는 모양인데, 사실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모은 돈으로 간 거야.

  진실:그래도 넌 아르바이트 한 돈을 등록금으로 내지 않아도 되는 것만 해도 다른
사람에 비해 혜택받은 것 아냐?

  창민:그건 그래! 그런데 사실 나는 유럽에 가면서 최근 신나치주의자들이
외국인들에게 테러를 한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은근히 걱정했거든. 그런데 막상
유럽에 가 보니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할 뿐 굉장히 조용하고 안정되어 있더라고...

  석규:네 눈에만 그렇게 보였겠지. 네 눈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창민:넌 그럼 경험을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석규:경험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단편적인 지식은 얻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체계적인 지식은 얻기 힘들지 않을까?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은 말야, 개념적으로 보면
자연의 규칙이나 법칙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는데, 경험으로부터 이러한 규칙성을
알아낸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창민:너 또 내가 약한 철학적 논의로 끌고 가는데..., 말려드는 것 같아. 어쨌든
경험이 없는 지식이라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류가 시작되어 경험한 것을
일반화해 법칙을 만들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는 것 아니니?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식이 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석규:물론 인간의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결과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가령 무거운 것은 받쳐 주는 물체가 없다면 떨어진다든지 불은
뜨겁다든지 등과 같은 경우처럼...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지식에서는 경험주의가
그럴듯하지만, 조금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경험이 썩 신뢰할 만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어. 경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어.
가령 신기루와 같은 착각 현상이나, 물 속에 넣은 젓가락이 휘어 보이는 현상 등
자연적 현상에서도 경험을 믿을 수 없는 경우는 무수히 들 수 있어. 더욱이 사회적
현상에서는 주관적 편견에 따라 동일한 대상에 대한 경험도 천차만별일 수 있지.

  창민:그럼 넌 경험이 아니면 인간의 지식의 원천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석규:나는 이성이야말로 물리적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의 진정한 원천이라 생각해.
예를 들면 S=1/2gt.t라는 낙하 법칙은 수많은 낙하의 경우를 일반화해서 만든
법칙이라기보다는 수학적 추론에 의해 만든 것이거든. 아마 다른 과학적 법칙도
대부분 수학적 추론에 의해 얻어졌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이성적 추리에 의해서만
지식의 개념에 합당한 보편 타당한 인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야. 반대로 경험에
의해서는 보편 타당한 지식을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해.

  창민:너는 합리주의를 옹호하는 모양인데, 그러나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수학적 지식이나 이성적 지식은 보편 타당한 지식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는 거야. 삼단 논법의
전형으로 언급되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도
죽는다."라는 명제를 예로 들면,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 이상의
새로운 지식이 없다는 거지. 수학적 지식도 정리나 공리로부터 연역된 체계인데,
아무리 훌륭한 추론을 한다 하더라도 정리나 공리를 넘어선 새로운 지식을 얻지
못한다는 거야. 그럴 때 보편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은 내용이 없이 공허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진실:고대의 철학자들이 감각 경험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말의 이빨 숫자를 이성적
추리로 설명하려 했다고 하잖아? 간단히 세어 보면 될 텐데. 어쨌든 두 사람의 주장을
살펴보면, 경험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주는 대신, 이성은 보편 타당한 지식을
얻지만 공허하다는 것인데, 철학 시간에 배운 칸트의 말을 빌려 요약하면,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다."라고 할 수 있겠네?

  창민:그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리지 말고 더 생각해 보자고. 모든 이론이 경험의
귀납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최소한 경험을 통해 검증되지 않고서는 과학적
지식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진실:그것은 조금 다른 수준의 문제인 것 같은데? 경험주의가 철학적 문제라면,
창민이가 지금 말한 귀납주의는 일종의 과학의 방법론으로 '경험적 사실을 관찰,
수집하고, 그것을 분류, 분석해 가설을 제시하며, 그 가설을 실험적 증거를 통해
확인해 이론으로 확립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석규:그래. 양자는 조금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귀납주의는 경험주의라는 철학적
원칙이 과학의 방법론으로 해석된 것이라 할 수 있어. 그런 점에서 같이 논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귀납주의라는 것도 여러 가지 한계가 있어. 우선 관찰이라는
경험이 믿을 수 있는지 여부는 별개로 치더라도, 사실을 관찰할 때 세계의 모든
사실을 관찰할 수는 없는 것이거든. 따라서 과학자의 이론적 선입관에 따라 선택될
수밖에 없어. 둘째로는, 관찰된 사실에 대해 하나의 가설만이 나오는 것은 아닐 거야.
가설이란 자연에 대해 제안된 상상적인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험이 가설의 참됨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거야. 경험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가설에 반하는 경험들이 언제나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지.

  창민:그렇다면 넌 과학적 지식을 형성하는 데 경험이나 관찰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야?

  석규:경험이 지식 탐구의 출발점도 아니고, 올바른 가설을 제시해 주지도 못하며,
또한 가설의 참을 확인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거야. '미인 박명'을 예로 들어 보자고,
과거에 미인이었다가 일찍 죽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못생긴 여자로 오랫동안 산
무수한 사람들을 예로 든다고 해도,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미인
박명'이라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확증될 수 없어.

  진실:석규의 주장은 너무 강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인간 지식과 과학에서 경험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우리의 지식 탐구가 경험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경험 의존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경험은 이성 앞에 사실을 자료로 제시하고, 이성은 그 경험 속에서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의견을 가설로 투사한다는 거지. 모든 이론은 잠정적이라는 전제 아래 과학
이론은 새로운 경험에 의해 상충하게 될 때 새로운 가설을 고안하고, 이러는 과정에서
과학이 발전하는 것 아닐까?

  창민:석규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진실의 결론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석규와 내가 진실이의 좋은 결론을 끌어내는 데 계기가 되었으니까 진실이가
저녁을 사는 것으로 하지. 어때?
 
  석규:좋지!!!
 

     토론해 봅시다.
  1. 어떤 정보가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을 갖추어야 하는가?
  2. 일반화된 지식(이론적 지식)의 예를 몇 가지 생각해 보자.
  3. 관찰된 사실과 이론(가설)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는지 구체적 사례와 함께 생각해
보자.
  4. 과학 이론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절차에 의해 폐기되는가?

     주요 개념
  지식, 경험, 이성, 경험주의, 합리주의, 귀납주의, 귀납, 연역

     참고 문헌
  H.라이헨바흐, '새로운 철학이 열리다', 새길
  W.V.O.콰인, S.울리인, '인식론', 종로서적
  C.G.헴펠, '자연 과학 철학', 박영사
  K.R.포퍼, '과학적 발견의 논리', 고려원
  T.쿤, '과학 혁명의 구조', 동아출판사
 
 
 
정관 (09-01-08 03:29)
 
참 어려운 문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자기방어적이기 때문에 타인의 경험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비중을 두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을 정말 신뢰할 수 있는가? 타자의 입장에서 조금 나아가 일반화가 될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의 고찰과
진전으로 성과를 거두어 온것이 물리학이 아닌가 라고  난 생각한다.  그런데 일반물리학 법칙이 불변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의 원리가 되었던 수학적 법칙 이나 원리가 불변이냐?  그것은 인간의 파지 능력이 유한적이기 때문에 그것도 아리송?

극단적인 예가 예언을 들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든 이들은 사고의 연역과정을
거칠것이다. 즉 그들 과거의 습성에 따른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로 부터 탈아적인 경험 그러나 그것조차도
자신의 경험이지만 그러한 탈아적인 경험들이 일반화 된다면 그것은 신뢰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불안한 시대이기 때문에 미래를 두고 이렇다 저렇다 얘기들 하고 현혹되기도 한다. 각 개인들이 깊은 통찰이 요청되는 시기가
된것같다.  간혹 미래를 얘기하는 사람들의 글들을 보게되면 기독교의 예언과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신들림 상태에서 즉 자동기술과 같은 방법으로 기술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아무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전적으로 점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보여주고 대화를 하고 우리로 하여금
판단토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고등령의 도구가 되는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이러한 것들이 영분별하는데 결정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경험들을 무시해 버려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의 개인적 상황이나
성숙도에 따른 현상이 아닌가 하고 고찰해 보면 거기서 취할것도 있고 그렇게 되면 판단은 아주 어려워진다.

여하튼 나에게 가장 이기적인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 쉽다.  나의 가장 이기적인 결론이라면 어떠하던 측정가능할 것 이다.
그러니 나의 잣대가 성숙하지 않고는 판단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는 얘기가 되는것 같다.

또 생각이 나는게 있다.  블랙홀의 존재 증명을 어떻게 하였을까? 처음에는 가설이었다. 당시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세계에서 몇사람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나 다 인정한다. 자기가 측정해 본것도, 그 이론을
분석해 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이러한 과정을 검토해 보면 흥미가 있을것 같다. 앞으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사견으로는 인간이 매우 이성적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것 같다. 현상후에 사유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정한 법칙을 갖고 자주 발생하지 않으면 인간은 감지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수학적으로 허수도
만들어 내고 하는게 아닌가 한다.

그런데 괴상한 것은 동양사상이든, 신비서적이든 좀 특이한 책들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블랙홀이라고 당시에는
지칭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사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참 괴이하다.
아인쉬타인도 이러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지 실은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다.



게시물수 91건 / 코멘트수 33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91 지눌(知訥)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미선 153 01-14
90 성 & 젠더 정체성은 참 많고 다양하다! 미선 1806 10-13
89 보수-진보 성서관 비교 & 정경 외경 확정 여부 미선 2474 06-27
88 의과대학 교수들이 만든 의학 만화 미선 7802 04-08
87 Rollin McCraty, "Heart-Brain Interactions, Coherence, and Optimizing Cognitive Skills" (1) 미선 17215 12-15
86 [펌] 과학적 회의주의자가 본 한의학과 대체의학 (한정호) (1) 미선 41375 07-08
85 수운의 시천주 체험과 동학의 신관 (김경재) (1) 미선 9041 05-03
84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신학의 변혁 (필립 클레이튼) 미선 7167 02-06
83 진화론에 대한 다섯가지 오해(Mark Isaak ) 관리자 8781 01-25
82 [펌] 이천 년 그리스도교 교회사 중요한 사건 연대 정리 관리자 8036 06-26
81 체화된 인지에 대하여, 뇌, 몸(신체), 환경은 하나라는 강한 외침 (이정모) 미선이 8104 02-03
80 안병무의 신학사상,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을 중심으로 (박재순) 관리자 7053 01-31
79 다석 유영모의 도덕경 한글본과 영역본(Legge) (3) 관리자 9339 01-31
78 연결체학(connectomics)에 관하여 미선이 9855 01-25
77 유교경전, 새천년표준사서 종합대역본 자료입니다. 관리자 6587 01-19
76 [펌] 오링테스트 및 사이비 대체의학 비판 미선이 15617 12-19
75 <몸과 문명> 느낌과 감각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미선이 6792 12-17
74 [박노자 칼럼]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의 공통 소망 '목적의 왕국' (1) 노동자 6815 08-07
73 [지리산 바람] 때로는 이혼(離婚)도 / 한성수 노동자 6079 08-01
72 [프레시안] "세상 사람들이여, '사탄의 시스템'을 두려워하라!" / 김두식 (1) 노동자 6692 07-31
71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모색 / 김윤성 노동자 6547 07-27
70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 홍정수 노동자 6386 07-22
69 폴 틸리히의 종교 사회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원리 노동자 7190 07-21
68 [한국민중신학회발표] 제국의 신학에 대항하는 통합적 약자해방신학 (2) 미선이 8157 05-07
67 [구약] 종교다원주의 or 토착화 신학의 정당성을 구약성서에서 발견하기 (김이곤) 미선이 6607 04-25
66 [구약] 출애굽 해방 사건의 구약신학적 의미 (김이곤) 미선이 7402 04-25
65 [펌] 리더쉽 이론 미선이 11227 03-13
64 진화론, 생명체, 그리고 연기적 삶 / 우희종 미선이 7440 01-21
63 비폭력대화 주요 구절들 미선이 6871 08-26
62 세계공황과 한국경제의 나아갈 길 (김수행) 미선이 7204 06-29
61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 (석오진) 미선이 8429 06-02
60 마음의 지도(맥그로이) 미선이 8672 05-22
59 관상기도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수행 방법들(이건종) 미선이 8765 05-02
58 이슬람의 영적 가치관과 생활 속 수행 (이희수) 미선이 5909 05-01
57 새로운 민중신학과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정강길 6699 04-20
56 밑으로부터의 세계화/지역화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응 (김영철) 미선이 11448 04-19
55 다원사회 속에서의 기독교 (정진홍) 미선이 7434 04-17
54 영성의 평가와 측정에 대한 연구 자료들 미선이 6440 03-31
53 [자료강추!] 인도철학사 (길희성) 미선이 7425 03-02
52 기업적 세계화의 뿌리와 그 열매: 신식민주의와 지구촌의 황폐화, 세계인의 빈곤화(김정숙) (1) 미선이 7824 02-05
51 [강추!] 부자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채만수) (3) 미선이 15693 04-22
50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유정원) 정강길 8266 05-20
49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김경재, 오강남) 정강길 9725 04-28
48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강길 10872 04-27
47 이안 바버가 보는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 유형 (김흡영) 정강길 11299 07-16
46 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장윤재) 정강길 8361 01-07
45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경재) 관리자 7487 11-12
44 竹齋의 현재적 그리스도론 (김경재) 정강길 7578 05-06
43 경험은 믿을만하며,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황희숙) (1) 미선이 7616 01-07
42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갈릴리 복음'으로 돌아가야 산다! (김경재 교수) 미선이 7039 01-06
41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정진홍 교수) (1) 관리자 7676 12-15
40 진리란 무엇이며,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한전숙) (1) 미선이 7915 12-01
39 “복음주의, 알고 보면 기득권주의” (1) 미선이 6370 11-28
38 기존 기독교인이 동성애혐오증을 가장 크게 지녔음을 말해주는 조사자료들 미선이 6273 11-28
37 영성에 대한 원불교 교리적 고찰 (백준흠) 미선이 6436 11-21
36 '죄'와 '구원'에 대한 전통신학의 한계와 과정신학적 해석 (김희헌) 관리자 7069 11-02
35 영성과 영성수련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강길) (3) 관리자 6999 11-02
34 21세기의 종교-새로운 영성을 위하여 (길희성) (1) 미선이 7605 10-15
33 현대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 (오영석) 미선이 6516 10-14
32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이숙진) (1) 치노 8229 10-01
31 [기조강연 전문]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디서 오나? (길희성) (1) 관리자 7433 10-01
30 [참조] 세기연의 월례포럼 자료들은 '세기연 월례포럼' 게시판에 따로 있습니다. 관리자 6080 07-29
29 SBS'신의 길 인간의 길' <제4부 길위의 인간> 전문가 인터뷰 정리 미선이 9683 07-29
28 프레크 & 갠디, 『예수는 신화다』(국역판 전문) (4) 미선이 9664 07-20
27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 학자들의 SBS취재 인터뷰 내용 미선이 7974 07-06
26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 김민웅 마루치 7481 05-21
25 [펌]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1) 고돈 린치 7569 02-27
24 역사적 예수 제3탐구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 (김덕기) 정강길 7510 02-21
23 희랍 동성애의 특성과 사회적 역할 마루치 6957 02-15
22 몰입 (나에 대한 최고의 순간이자 그것 자체가 행복인 순간) 관리자 7942 09-12
21 예수 교회 예배 주보 표지를 장식할 '예수 이후의 예수들' 관리자 8043 08-03
20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초기지, 공동체 운동에 대한 좋은 자료들 관리자 9598 07-02
19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관리자 11626 06-27
18 김경재 - 한국교회와 신학의 회고와 책임 정강길 7288 06-06
17 이성정 -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강추!) 관리자 9138 01-27
16 행복 보고서 정강길 8078 01-18
15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3) 성직자 및 종교단체에 대한 평가 관리자 7023 01-06
1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2) 한국인의 종교관과 의식구조 관리자 9421 01-06
13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 한국인의 종교실태 관리자 8761 01-06
12 우리나라의 3대 종교-불교/개신교/천주교- 분포 지도 (*통계청) 관리자 15987 12-15
11 종교 인구 20년간 어떻게 변했나? (*통계청) 관리자 13619 12-15
10 한국 종교계는 치외법권지역인가? 관리자 9070 11-24
9 보수 기독교인들 특히 C.C.C가 널리 전파하는 <4영리> 자료 관리자 11806 10-27
8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김준우 11152 10-21
7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강추) 돈큐빗 9598 10-07
6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잠농 통프라스트) 관리자 9344 10-04
5 숫자로 보는 한국 장로교의 정체 (3) 이드 16177 06-21
4 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그것이 알고 싶다! (강추) 미선이 13426 05-31
3 [펌] 니케아 회의 시대 (313-590) 관리자 16718 05-30
2 [펌] "미국은 神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는가?" (1) 미선이 8276 05-17
1 [유다복음서 전문]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미선이 15458 04-28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