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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큰끝은 끝이 없다_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조용현)    
  글쓴이 : 미선 날 짜 : 17-05-03 05:13 조회(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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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끝》은 《끝이 없다》

-無極而太極에 대하여- 




1. 無極과 太極


주자학의 여러 개념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이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다섯 글자이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첫 문장이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주자학의 기초를 형성한 자가 주희(朱熹)다.

주희의 논쟁자였던 육구연(陸九淵)은 태극 앞에 무극의 두 글자를 덧붙이는 것은 유가의 논리라기 보다 불가, 도가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주희는 무극이라는 두 글자가 주돈이 사상의 핵심개념이라고 보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무극과 태극을 둘러싼 논쟁에는 2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극과 태극을 발생사적인 선행사건과 후행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이른바 “자무극이위태극”(自無極而爲太極;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다)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태극적 세계 이전에 무극적 세계가 있고 이 무극적 세계에서 태극적 세계가 출현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도가적 기원을 갖는 것이며 그 계통이 낳은 것이 기론(氣論)이다. 한당 시대의 원기론(元氣論)에서 시작하여 주희 당시의 장재(張載,1020~1078)에 까지 이르는 전통이다. 이런 해석은 무에서 유의 생성을 논외시하는 유가적 전통과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이것은 주희가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물론 “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주희에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를 설명하기위한 방편으로서 무이다.(“卽說有說無”) 문제는 주희가 자신의 논거로 삼고 있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이 “자무극이위태극”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주희가 자신의 입장의 근거를 태극도설에 기대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주희는 태극도설의 입장은 분명히 자무극이위태극이 아니라 무극이태극이며 이것이 진정한 주돈이의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무극을 태극의 선행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무극을 태극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극과 태극은 같은 것인데 무극이태극으로 같은 말을 중복하는 것은 침대위에 침대를 쌓는 격으로 군더더기처럼 보인다. 주희는 무극이 줄 수 있는 오해와 중언부언처럼 보이는 중복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무극은 태극을 드러내는 핵심적 개념장치다.

이 둘다 육구소(陸九韶), 육구연 형제가 주희를 표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우선 무극을 태극의 선행사건으로 보는 “자무극이위태극”을 살펴보자.



2. 주희가 말하지 않은 것..自無極而爲太極



청대의 학자 모기령(毛奇齡)에 의하면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본래 도가와 불가 계통에서 내려오던 것인데 주돈이가 받아 소개한 것이다. 본래 도설은 자무극이위태극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노장의 전통과 잘 부합한다. 주희가 이 함축을 희석시키기위해서 무극이태극이란 알쏭달쏭한 말로 바꿈으로서 도설의 본래 뜻을 왜곡했다. 이 과정을 모기령은 자신의 저서 『태극도설유의』(太極圖說遺議)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당시 『국사』(國史; 북송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주돈이를 유가의 우두머리로 삼아 『태극도설』원문을 싣고 “염계전”에 수록하였다. 본래는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된다”(자무극이위태극)로 하였는데 남송의 유학자(주희)가 건도 년간(1165~1173)에 그 도설을 출간하여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무극이태극)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국사』가 ‘자’와 ‘위’ 두 글자를 보태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후세의 유학자(주희를 가리킴)가 ‘자’와 ‘위’ 두 글자를 제거했다고 하는데 확정할 수 없다. 원대에 탈탈이 송사를 쓰면서 ‘자’와 ‘위’ 두 글자를 제거했다...

『태극도설』은 정호와 정이, 소옹 등 유학자들이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 글을 본적이 없다. 송나라가 남도한 뒤 주희가 비로소 건도 연간에 그 글을 출간하였다. 당시에 그것을 본 사람은 그것을 믿을 수 없어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太極解義, 621-622][주1]

주희 자신도 『국사』의 ‘염계편’에 태극도설이 자무극이위태극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편찬한 홍경로에게 수정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신년(1188) 6월 옥산에서 내한 홍경로(洪景盧, 자는 洪邁)를 우연히 만나 그가 편수한 주렴계, 정명도, 정이천, 장횡거 등의 전기가 실려있는 『국사』를 우연히 빌려 보았는데 『태극도설』의 전문이 실려 있었다. ..이 태극도설의 본문 첫 구절은 다만 “무극이면서 태극이다”고 하였을 뿐인데 어디에 근거하여 “~로부터[自] ~이 된다[爲]”라는 글자를 보탰는지 모르겠다. 본문의 뜻이 절실하고 완전함이 이처럼 명백한데도 식견이 얕은 선비들은 간혹 함부로 비난하게 되었다. 만약 이 글자들[自, 爲]을 보태면 선현들에게 누를 끼치고 후학들에게 의문을 품게 함이 더욱 심각할 것이다.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어떤 사람이 안된다고 하였다. [太極解義, 338-339]

그리고 주희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이 전해지면서 잘못된 그림과 해설들이 있어 고증하여 바로잡았을 뿐 본래 “자무극이위태극”으로 된 것을 “무극이태극”으로 고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태극의 의미는 주돈이가 그림을 앞에 그리고 해설을 뒤에 붙여 서로 드러내어 밝힌 것이 공평하고 바르며 환하게 꿰뚫었으니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 이전에 전해 내려온 그림과 해설 모두 오류가 있었으나 다행히 여기서 유실된 것이 오히려 간혹 저기에 보존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서로 고증하여 고치고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고친 것들은 모두 근거가 있으니 나의 주관적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太極解義, 341]

육구연이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주희의 무극이태극을 자무극이태극으로 해석하고 노장의 사상이라고 비판한다. 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육구연이 무극이태극의 무극과 자무극이태극의 무극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이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순히 무극이라는 글자가 들어있다고 해서 무극이태극의 무극을 노장적 관점이라고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자발(朱震)은 염계가 목백장(穆修)에게서 ‘태극도’를 얻었고 목백장이 전한 것은 진희이(陳부)에게서 나왔다고 했는데 반드시 고증이 있을 것입니다. ‘무극’이라는 두 글자는 『노자』(老子) 28장의 “그 수컷을 안다”는 장에서 나왔으니 우리 유가 성인들의 경전에는 없는 것입니다. 『노자』첫 장에서 “무명은 천지의 시초이고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다”(無名天地始 有名萬物之母)라고 말하고 마침내 그 둘을 동일시했으니 이것이 노자의 중심요지입니다. “무극이태극”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太極解義, 388]

이렇게 해석하면 무극은 한당유학자들이 말한 원기(元氣)와 비슷해진다. 이 관점에서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해석해보면 음양도 동정도 없는 원기에서 태극이 생성되고 태극의 동정에 의해 음양이 생겨난 것이다. 우주의 본원은 무극이고 태극 이하의 음양은 이 우주 생성과정의 서술일 뿐이다. “자무극이위태극”의 논리적 귀결은 장횡거(長載)의 기론(氣論)이다. 태극은 총체적으로 하나지만 그 속에는 음,양 두 면이 있다. 이것은 허실, 동정, 취산, 청탁의 두 면으로 나타난다. 태극의 본체는 기고, 기의 본체는 태허(太虛)다. 태허의 기에서 태극과 음양이 생성된다. 무극은 이 태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주2]

이 관점의 전형적 한 형태를 도올 김용옥의 ‘기철학’(氣哲學)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우주와 천지를 구분한 다음 우주는 무극이고 천지는 태극이라고 한다. 극을 가진 것은 유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태극도 그것이 아무리 큰 극이라 하더라도 유한한 것이다. 이 유한의 극은 무한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립할 수 없다. 즉 이 무한의 극 가운데서 유한의 극이 성립할 수 있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의 “무극이태극”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첫마디에 대하여 우리는 명료한 답안을 내릴 수 있다. “우주는 무극이고 천지는 태극이다” 극은 극일 뿐이다. 극이란 지극함(extremity)이요 극한(limitation)이며 한계(boundary)이며 유한(finitude)이다. 태극이 아무리 태하다(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극일 수 밖에 없다. 태극은 태(太)한 극이다. 태극은 유한할 수 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태극은 극이 있기 때문에 즉 유한하기 때문에만 태극일 수 있는 것이다...태극은 천지일 수 밖에 없다. 천지에 있어선 극이 없는 무극의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천지는 유한하다. 그러므로 태극이다. 우주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무극이다. 그러나 우주와 천지는 서로 독립된 실체로서의 두 사태가 아니다. 그래서 주돈이는 ‘이’(而)라는 연결사를 집어넣은 것이다. “무극이태극” 즉 태극은 오로지 무극이라는 마당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유한은 무한 속에서만 유한한 것이다. 무한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유한의 극, 즉 그 극성이 성립할 수 없다.(김용옥,『氣哲學散調』,49)

횡설수설하고 있으나 도올의 ‘우주’는 장횡거의 ‘태허’에 ‘천지’는 태극에 대응시킬 수 있는 것으로 도올 역시 “자무극이위태극”의 계열에 있다. 이런 관점에 선다면 무극이태극이라는 것 보다 자무극이태극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이 주돈이의 본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돈이의 본래의 생각이 어떠했던간에 주희의 생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보다 뜻이 분명한 자무극이위태극이라 하지 않고 무극이태극이라고 한 것은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그의 철학의 뿌리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도올의 해석은 한 가능한 해석이기는 하나 주희가 말한 “무극이태극”의 의미는 아니다. 



3. 주희가 말했으나 오해된 것...무극(無極)



그에 육구연에게 보낸 답에서 주희는 무극의 의미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이 이후 무극이 노자의 무나 한당의 원기 또는 장횡거의 태허와는 다르다는 것이 육씨 형제에게 어느 정도 납득이 된 듯하다. 그 뒤 자무극이위태극의 논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납득되지 않는 점이 있다. 도대체 그것이 노장의 무가 아니라면 그래서 무극과 태극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태극에 무극을 구태여 덧붙일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육구연은 주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존형이 태극을 제대로 파악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만약 태극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태극위에 ‘무극’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고...태극위에 무극을 더하는 것은 침대위에 침대를 쌓는 격이고 ...집 아래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太極解義, 415]

왜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태극위에 무극을 덧붙였는가에 대해서 주희는 육구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은 하나의 사물과 같아져 온갖 조화의 근원이 되기 부족하며,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은 공허하고 적막함에 빠져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이야말로 그 표현이 정밀하고 미묘하여 무궁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서 말한 도리가 논리와 맥락이 질서 정연하게 되었으니, 그저 지금은 우리 앞에 있으니 고금에 걸쳐 어떠한 경우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해한 것이 이렇게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다면 의심스러운 점이 선생에게 있지 그(주돈이)에게 있지 않은 듯 합니다. [太極解義, 372]

“무극이태극”, 이것이 바로 주돈이-주희 사상의 핵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이것만은 바뀔 수 없음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이 천명에도 불구하고 주희의 뜻이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은 듯하다. 육구연은 배우는 사람이 형기(形器)에 빠질까 염려하여(즉 한갓된 사물로 오해할까봐) 거듭 풀이했다면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태극은 냄새도 소리도 없다고 하면 쉽게 이해될 것을 어찌 무극이라는 글자를 태극위에 덧붙여야 하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것은 육구연의 지나친 소박한 생각이다. 태극이 냄새가 없는 것은 그것이 무취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냄새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태극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냄새도 소리도 형태도 가능하다. 내 손이 통증을 못 느낀다면 그 부위의 통증을 담당하는 뇌의 부위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뇌가 통증을 못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내 뇌가 통증을 못 느끼는 것은 어떤 부위가 고장났기 때문이 아니고 내 뇌가 바로 그 통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만일 뇌로 하여금 통증을 느끼게 하려면 뇌의 뇌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뇌는 통증을 느끼겠지만 다시 이 뇌의 뇌는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뇌가 통증을 못 느끼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고 논리의 문제이다. 뇌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통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태극이 냄새가 없다면 그것이 바로 냄새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태극은 냄새도 소리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태극은 냄새도 소리도 없는 어떤 사물로 착각할 수 있다. 뇌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면 뇌의 어떤 부위가 고장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주희는 “만약 이렇게 양쪽으로 밝혀서 설명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이 말뜻을 오인하여 반드시 편견의 병폐를 갖게 되었을 것이니” 태극 앞에 무극을 배치한 것은 이 오인을 미리 막기위한 주돈이의 배려였다고 주희는 주장한다.

태극 앞에 무극을 덧붙임으로서 태극은 책상, 지구, 은하수 같은 사물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물들이 갖는 속성들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크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형태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무극은 태극에 덧붙여진 군더더기가 아니다. 그것이 태극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무로 말하고 있으나 유를 드러내는 한 방법일 뿐이다. 그것은 무와는 상관없다. 이것이 무극에 대한 주희의 해명인 것 같다.

다음은 주돈이에 대한 육구연의 해석과 주희의 해석의 차이를 도식화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제 이런 검토들을 바탕으로 해서 주희의 무극이태극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시도해 보겠다.



4. 큰 끝은 끝이 없다...無極而太極



무극이태극은 무극과도 다르고 또 태극과도 다르다. 편의상 이 둘을 각각 비교해 봄으로써 그 차이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통해서 주희에서 무극이태극이 갖는 함축을 살펴본다.

4-1 무극과 무극이태극

장자의 “천하”(天下)장에 “至大無外謂之大一 至大無內謂之小一”라는 구절이 있다. “절대로 큰 것은 밖이 없어 일러 큰 하나라 하고 절대로 작은 것은 안이 없어 일러 작은 하나라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절대로 큰 것은 얼마나 큰가? 아주 큰 동그라미를 상상해 보자. 아무리 큰 동그라미를 그린다 하더라도 그 바깥에 더 큰 동그라미를 그림으로써 그것이 절대로 크지 않음을 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로 큰 동그라미가 가능하려면 그 동그라미의 바깥이 없어야 한다. 이른바 “지대무외” 즉 절대로 큰 것은 바깥이 없다. 이제 절대로 작은 동그라미를 상상해 보자. 아무리 작게 그리더라도 그 안에 더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넣음으로써 이것이 절대로 작지 않음을 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작은 동그라미가 가능하려면 그 동그라미의 안이 없어야 한다. 이른바 “지소무내” 즉 절대로 작은 것은 안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안이 없다면 당연히 바깥도 없어야 한다. 그 동그라미의 바깥이 있다면 당연히 안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깥이 없다는 것은 앞서 절대로 큰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절대로 큰 것은 절대로 작은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대무외(至大無外)이므로 지소무내(至小無內)이고 지소무내이므로 지대무외인 셈이다. 같은 논리로 화엄의 4대 祖師인 징관(澄觀)은 “小는 곧 內가 없으니, 內가 없는 까닭으로 중간(中間)이 없다. 무외(無外)는 大를 말한다. 大는 곧 밖이 없으니, 밖이 없음으로 광대한 신찰(身刹)이니, 곧 內가 없는 진모(塵毛)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광협무애(廣狹無碍)라 이름한다. 즉(卽)하거나 입(入)함에 모두 광협무애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澄觀, 『華嚴經玄談』,중앙승가대 출판부,170)

안도 없고 바깥도 없는 그래서 지소무내이면서 지대무외인 그래서 절대로 큰 것이 절대로 작은 것과 같아지는 이 광협무애의 차원 이것이 바로 무극이다. 극은 경계인데 무극이라는 것은 그 경계의 바깥도 없고 그 경계의 안도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희의 태극도설에서 무극은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항상 태극과 결합되어 무극이태극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무극은 단순한 무극이 아니라 태극과 결부된 무극이다. 태극은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이미 한정된 것, 규정된 것이다. 태극의 문자그대로의 의미로서만 본다면 그것은 유극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태극이 단지 유극이라면 그것은 어떤 경계를 갖는 것이고 그것은 경계 밖의 더 큰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태극 즉 끝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큰 끝은 끝이 없어야하고 그것은 무극일 수 밖에 없다. 주희가 말했듯이 태극은 다만 끝에 이른 것이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이다.(更無去處了) 그러나 안(內)이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무극과는 다르다. [김상섭,『태극기의 정체』(동아시아),193서 재인용]

무릇 모든 “유”는 바깥이 있고 동시에 안이 있다. “무”는 바깥도 없고 안도 없다. 안은 있지만 바깥이 없는 것은 유일하게 하나 밖에 없다. 세계 전체(whole)이다. 세계 전체의 바깥은 없다.[주3] 있다면 당연히 그것은 세계 전체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모든 존재를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이 있다. 이것이 바로 무극이태극으로서의 태극이다.

4-2 무극이태극과 태극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보면 제일 위에 동그라미가 있는데 이것이 무극이태극을 의미한다. 엄격히 말하면 이것을 그릴 수 없다. 그려지는 한 그것은 무극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로서 무를 나타내는 한 방편으로서 동그라미를 그렸을 뿐이다.[주4] 그 다음 음양변역의 한 가운데의 작은 동그라미가 음양변역의 본체가 되는 태극이다. 도표상으로 두 종의 태극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무극이태극이고 다른 하나는 태극이다. 태극이 음양을 통해서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무극이태극과 대귀를 이루기 위해서 “유극이태극”(有極而太極)이라고 부르겠다. [주5] 태극은 사물 속으로 들어와 그 사물을 한정한다. 즉 태극이 기(氣)의 옷을 입는다. 다르게 말해서 태극이 자신의 자기한정 또는 규정을 통해서 기가 출현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자기한정된 태극 즉 기가 유극이태극이다. 유극이태극은 기고 물화된 태극이다. 이것은 당연히 시간과 공간 속에 규정되고 크기와 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태극과 음양을 구분했을 뿐 태극은 음양이라는 형태와 떨어져 따로 존재한 적이 없다. 그래서 주희는 말한다. “이른바 태극이란 음양 속에 있을 뿐이며, 이른바 음양이란 태극 속에 있을 뿐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음양위에 따로 어떤 형상도 그림자도 없는 것이 있는 것이 태극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잘못이다”[太極解義, 32] 그래서 태극이 입고 있는 음양을 태극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태극을 유극인 것으로 오인한다. 태극도설의 첫 구절 “무극이태극”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된 구체성의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고 태극의 본성을 밝히기 위한 절대 생략할 수 없는 핵심귀절이다. 이것은 주희 사상의 전체를 받치고 있는 기둥과 같은 것이다.

이제 육구연이 주희의 무극이태극을 비판하면서 태극으로 충분한데 쓸데없이 앞에 무극을 덧붙인 데 대해 태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을 때 주희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은 하나의 사물과 같아져 온갖 조화의 근원이 되기 부족하며,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은 공허하고 적막함에 빠져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이야말로 그 표현이 정밀하고 미묘하여 무궁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서 말한 도리가 논리와 맥락이 질서 정연하게 되었으니, 그저 지금은 우리 앞에 있으니 고금에 걸쳐 어떠한 경우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해한 것이 이렇게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다면 의심스러운 점이 선생에게 있지 그(주돈이)에게 있지 않은 듯 합니다. [太極解義, 372]


5. 플라톤과 주희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우주의 원질(arche)을 탈레스가 물, 아낙시메네스가 공기로 보는데 반대했다. 그는 그것이 물, 공기처럼 구체적 사물이어서는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원질을 구체적 사물이 되기 이전의 것 그래서 이것이다, 저것이다고 규정받기 이전의 것이 원질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그것을 “무한자”(apeiron)라고 불렀다. 플라톤도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무한정자를 한정시킴으로써 코스모스가 출현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장횡거의 관점과 다른 점이 없다. 태허가 무한정자에 해당하고 이것을 한정시킴으로 출현하는 것이 태극과 음양의 세계다. 차이가 있다면 이 한정이 플라톤의 경우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창조신에 의해서 행해지는데 대해 장횡거의 경우 기(氣) 스스로의 이합집산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주희의 무극은 아페이론과 그 의미가 비슷해 보인다. 무극은 한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데 아페이론이 바로 그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희의 무극은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반드시 태극과 함께 사용되어 무극이태극이 된다. 그러므로 주희의 무극은 태극으로 인해 이미 한정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극이태극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페이론이 아니고 규정된 것, 한정된 것을 의미하는 페라스(peras)이다. 그러나 페라스는 그 이전 아페이론을 전제하는데 대해 태극은 무극을 전제하지 않는다. 무극을 전제하는 어떤 추론도 주희의 체계와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이 주희의 무극이태극을 결코 자무극이위태극으로 해석해서 안되는 이유이다.

플라톤과 주희 이 둘을 비교,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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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식에서 주희의 경우 태극이 두 가지 방식으로 쓰였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으로는 구분해 볼 수 있다. “무극이태극”의 태극은 존재정위의 원리이다. 이 한정을 통해서 적어도 무엇인가가 있게 된다. [주6] 태극은 생성의 원리다. 그것은 존재의 한정(極)을 통해서 변화무쌍한 사물을 생성시킨다. 주희는 이 두가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존재정위로서의 무극이태극을 통체태극(統體太極)이라 하고 생성원리로서의 태극을 구지태극(具之太極)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페라스는 존재정위의 원리가 아니다. 존재는 아르케로서 이미 주어져 있다. 페라스는 존재의 한정을 통해서 사물의 생성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생성의 원리로서 구지태극과 비교될 수 있다. 이것은 장횡거의 태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성의 원리로서 태극은 음양과 목,화,토,금,수 오행(五行)을 통해서 천지의 변화를 산출한다. 플라톤의 경우도 페라스라는 한정자는 한정자 phi(Φ)를 통해서 기, 수, 화, 토, 에테르의 오원소를 생성시키고 그것을 통해 코스모스의 변화를 산출한다.

존재의 정위원리로서 주희의 무극이태극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 우주론이나 생성의 원리로서 구지태극은 플라톤의 페라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페라스는 사물을 한정함으로써 사물을 생성시키는 원리이다. 사물의 페라스을 찾아가는 작업은 사물의 극, 즉 태극을 찾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주>

1) 주희, 『太極解義』,곽신환 외 옮김( 소명출판사, 2009), 『태극해의』는 주돈이의 『태극도』와 『태극도설』에 대한 주희의 해석인 『태극도해』와 『태극도설해』로 이루어져 있다. 본 역서에서는 부록으로 주희와 육구소, 육구연의 태극논쟁, 모기령의 『태극도설유의』등이 실려 있다. 이하 인용시 『太極解義』로 약기한다

2) 그러나 주희의 태극과 장횡거의 무극은 다르다. 제자가 장횡거의 태허와의 차이를 말했을 때 주희는 “무극이라는 글자는 중간에 머물러 있지만 태허라는 글자는 한 곳에 머물고 마니 (태허가 무극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해서 차이를 분명히 한다.

3) 태극은 다만 하나이며 짝이 없는 것(一而無對者)이다. 태극은 커서 밖이 없다. 어떠한 사물도 그 속에 포괄된다. [태극기의 정체, 193]

4) 무극이태극은 무를 빌려 유를 말하는 것이다.(卽說有說無) [太極解義, 439]

5)『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에서 두 가지 태극을 구분하기 위해 양의,사상,팔괘에 앞서 갖추어져 있는 것을 ‘통체태극’(統體太極)이라 하고 이 세가지 안에 온축되어 있는 것을 ‘구지태극’(具之太極)이라 한다.[太極解義,399, 주69]

6) 있기 전의 상태로서 플라톤처럼 아페이론을, 장횡거 처럼 무극(태허)을 전제할 수 있으나 이것은 우주의 시작 전이라고 말했을 때 생겨나는 것과 같은 형용의 모순에 빠진다. 우주의 시작과 더불어 시간이 시작되었을 것이므로 시작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태극과 더불어 존재가 정위됨으로 태극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정위로서 무극의 전제는 무의미하다. 논리적으로 주희의 관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http://biophilosophy.tistory.com/entry/큰끝은-끝이-없다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인제대 인문학부 조용현 교수의 생명이야기]






미선 (17-05-03 05:26)
 
위의 내용에서 무극이태극이라는 주희의 입장은 마치 화이트헤드의 창조력과 현실적 존재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해주는 점이 있다.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주희의 무극이태극은 선후 관계가 아니며 근본적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화이트헤드의 창조력과 현실적 존재와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제약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점은, 동양철학이 서구 기독교와 달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를 상정하고 있다면, 사실상 무라는 개념 자체는 절대적 의미의 무라고 보긴 힘들 것이라는 점이다. 무시무종의 우주론인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절대적 의미의 무일 수 없다.

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만이 있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의미에서 늘 있음이라는 유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무는 기본적으로 상대적인 무이며 결코 절대적인 무가 아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인 무는 절대적으로 알 수도 없지만 떠올릴 수도 없다. 아무 관계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표현대로, 무 속에 떠도는 자족적 사실 같은 것도 없다. 있음 안에서의 유와 무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근원으로서의 절대 무를 찾으려하는 것은 일종의 기원상정병에 해당한다. 무엇이든 기원을 상정해야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습성이다.

따라서 유의 기원을 우리는 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애초 기원 같은 것도 없다. 알고보면 서양만이 아닌 동양 역시 제1원인을 찾는 놀이에 빠져 있기도 했다. 물론 기독교적 세계관이 중심이었던 서구보다는 덜 했지만, 분명한 점은 바로 이 구분이 명확하게 되어 있질 않다보니 계속적으로 그 질곡에 빠져 있어왔던 점이 있다.

기원자체를 상정할 필요가 없듯이 절대무란 것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마 끊임없이 절대 무라는 궁극적인 기원 찾기 환상놀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시작(beginning)을 상정하는 것은 넌센스(nonsense)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필자 역시 이 입장에 동의하는 바다. 신과 세계 모두 사직도 없고 끝도 없이 영속하는 우주의 창조적 전진의 손아귀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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