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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회 독서포럼/요약발제] 바트 어만과 함께「예수 왜곡의 역사」순례하기    
  글쓴이 : 노동자 날 짜 : 10-08-31 08:16 조회(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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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 어만과 함께 「예수 왜곡의 역사」순례하기
 

 
해방이후 지난 65년 동안 온갖 모순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를 일컬어 우리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물론 첫 단추는 미 군정과 이승만 장로에 의해 친일파 청산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혹독한 대가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뜻있는 이들은 진실규명을 위하여 친일인명사전 발간 등을 통해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하물며 2000년 역사의 기독교가 첫 단추부터 무언가 잘못되어 그 후과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정이 아니라 최근 중동사태에서도 보듯 인류 역사상 기독교란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가공할 죄악상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 만큼, 우리는 기독교인인가 아닌가 여부를 넘어 세계시민의 일원으로서 문제의 기독교 실체와 예수의 원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착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BART D. EHRMAN)이 지은 「예수 왜곡의 역사」는 성서를 역사적 관점에서 추적·재구성한 사실상 ‘기독교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다. 바트 어만은 자신의 주장이 독특한 게 아니라 북미와 유럽의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는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기에 자신이 직접 대중들을 상대로 공개하겠다고 취지를 밝힌 것이다.    
 
바트 어만은 독자들에게 성서를 수평적으로 읽기를 권한다. 이는 페이지 순서인 수직적 읽기가 아닌 주제별로 비교·접근하는 독서법으로, 복음서별로 상이하게 나타나는 예수에 대해 새로운 모색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예수 왜곡의 역사」는 각기 다른 경향의 종교공동체였던 복음 기록자들의 강조점과 의미를 들여다보는데 있어 독자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성실한 안내자이다.
 
저자의 역사비평적인 관점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모습이 역사적 실체라기보다는 후일 성서 기록자들의 ‘해석’이라고 보는데 주안점을 둔다.  실제로 예수의 탄생과 행적,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신약성경 네 복음서의 기록들은 도처에서 모순된 점이 발견된다.  
 
예컨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탄생 스토리가 등장하지만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탄생에 관한 언급이 없다. 특히 누가는 예수가 나사렛 출신임을 알면서도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위해 베들레헴 출신으로 꾸몄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또한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은 예수가 숨을 거둔 날에 대해 유월절 아침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마가 후 25년이 지나 기록된 요한복음은 유월절 하루 전으로 기록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여기서 바트 어만은  요한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준비된 날’에 어린양을 도살하던 유대 전통과 관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제물”이라는 신학적인 이유로 역사적 자료를 바꿔놓았다.“고 지적한다. 즉 요한이 예수를 그 ‘어린양’으로 강조하고 싶었다는 얘기다.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도 유의미하다. 저자는 마가의 해석-고뇌 속에 죽어간 예수(“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이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누가의 해석-의연한 죽음(“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라면서, 각 저자의 목소리를 변별하지 않고 하나의 복음으로 엮으려는 무모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놀라운 건 당연하게도 ‘예수의 신성’ 부분이다. 바트 어만은 예수의 신성으로 종종 회자되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와 하늘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마가복음1:11)라는 기록에 대해 “옛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곧 신을 뜻하지는 않았”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온갖 유형의 사람을 가르킨다.”라고 부언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대체로 이 땅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매개자들 뜻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신약 3복음서에서는 예수를 ‘신’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즉, 요한복음에 와서 “예수는 신”으로 기정사실화 된 점에 대해 바트 어만은 “훗날의 기독교인이 창작한 것”이라고 정리한다. 왜 요한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저자는 그것은 특정인 요한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였다고 말한다. 이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신’으로 정리되었다는 말이다.
 
요한 공동체는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를 유대인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분파 중 하나였으며, 그 이유로 회당에서 배척당했을 개연성이 높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전사처럼 강하고 위대한 왕”이었기에, 벽촌출신 떠돌이 설교자에 율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정치적 폭도란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는 결코 그들에게 ‘메시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요한 공동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를 더 높은 지위로 격상시키게 된다.
 
성서에 대한 기록을 추적함에 있어 당시 사회적 계급을 중심으로 팩트(사실)가 드러나는 점도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예수 공생애 기간동안 함께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 사도들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갈릴리 하층민들(문맹, 일일 노동자)로 복음서의 실제 저자가 아니었다. 예수 사후에 기록된 복음서의 실제 저자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밖에 거주하며 그리스어를 아는 지식인들이었다.
 
따라서 예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기록들은 ‘네 복음서의 짜깁기’이며, 신약성경 27권 중 우리에게 알려진 저자의 것은 고작 8권(바울의 편지글: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 요한복음-신원미상, 예수의 제자 요한이 아님)이고, 나머지는 ‘위작(위조)’이라는 것이다. 예수 당시 사실관계도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층민중의 운동논리가 지식인의 것으로 옮아가면 논리의 정체성이 변하는 건 불문가지이다.    
 
율법을 둘러싼 입장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마태복음과 바울의 유비가 각별하다. 마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율법을 준수해야”한다고 말씀하셨고 덧붙여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분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이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이를 두고 저자는 당시 바울이 이미 머릿속으로 ‘예수의 종교’를 떠나 ‘예수에 대한 종교’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혐의를 둔다. ‘예수에 대한 종교’는 성경에 대한 숭배 바로 그것이었다.
 
고단하지만 깨우침의 삶을 본받아야 하는 ‘예수의 종교’는 이렇게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믿음 과잉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를 두고 바트 어만은 “예수의 죽음은 신화가 아니었지만, 그 죽음이 구원을 안겨준다는 생각은 신화였다.”며 바울을 우회 비판한다.
 
당시 로마제국의 시대상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 개종 당시 기독교인 인구는 유대인 인구를 대거 추월해 로마제국 인구의 약 10%를 점하다가 4세기 말이 되면 개종이 유행처럼 번져 50%까지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1세에 와서 기독교는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포되기에 이른다. 그는 이교도를 압박하고 신전령(神殿領)을 몰수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고 기독교 선교에 앞장선 인물이다.
 
‘예수 왜곡’의 대장정은 삼위일체론의 교부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신성 부정: 예수를 유한한 존재로 봄)에 승리한 325년 니케아공의회 논쟁 이후 기독교가 제국의 교회로 그리고 중세 암흑기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진출하였고, 또한 1,68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로마뿐 아니라 미 제국의 교회와 다양한 국가의 아류들에게도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폐해로 고착하게 된다. 원형 예수가 아닌 폭력적인 기독교로.  
 
그래서인가 「예수 왜곡의 역사」결론부에서 바트 어만은 다소 충격적인 심경을 토로한다.  "내가 성경을 복음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걸 포기하고 한참이 지난 후, 다른 이유로 나는 기독교를 떠났다. 믿는 사람을 포함한 대다수 사람이 이 땅에서 견뎌야 하는 힘겨운 삶을 고려할 때, 사랑이 넘치고 선하다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방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바트 어만은 오늘 기독교와의 이별을 소회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의 연구로 말미암아 “내 믿음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하나님과 그의 세계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한층 더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었다”며 신약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접근 방식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바트 어만은 회의한다. “언젠가부터 그 신화들이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와닿지도 않으며, 세상을 읽는 방향을 제시해 주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폭력적인 현실을 고려할 때, 기독교의 핵심적인 믿음이 어떤 식으로 보아도, 즉 신화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내게 ‘참’으로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기독교적 믿음을 버렸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쯤되면, 독자들이 관심을 기울일만한 논점은「예수 왜곡의 역사」에서 저자인 ‘바트 어만’에게로 넘어갈 만하다. 사실 독자들이 책 못지않게 종종 저자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인데 이는 저자의 삶과 그가 주장하는 지식의 내용에서 지행합일의 정도가 어느 정도일까 하는 의문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의 역작인「예수 왜곡의 역사」를 접한 우리는 바트 어만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톰행크스 분)을 영웅시 해 그의 질주를 뒤따르던 무리들처럼 갑작스런 그의 일시적 멈춤(고백)에 영문도 모른 채 “아! 이제 우린 어떡하라고” 라며 탄식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가 버린 것은 ‘왜곡된 믿음’이었지 ‘원형 예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 앞에는, 바트 어만이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 보여준 ‘기독교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어떻게 지속가능한 ‘실천운동’으로 현실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과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실천의 장에서 바트 어만의 고민이기도 한 “믿는 사람을 포함한 대다수 사람이 이 땅에서 견뎌야 하는 힘겨운 삶을 고려할 때, 사랑이 넘치고 선하다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방법”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저자나 우리나 인간에 대한 본원적인 물음은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며 <원형 예수운동>의 끈을 놓치 않는 사람들의 <연대> 속에는 하나님이 숨결을 살아 있다. 아무리 이 사회가 자본과 권력을 위하여 ‘왜곡된 예수’를 즐기는 천박한 현장지배권력들에 포위되어 있다 해도, 또 다른 물질적 우상을 향해 치닫는 과학만능적 사고에 직면해 있다 해도 말이다. 우리가 역사적 진실을 찾아 바트 어만과 함께 「예수 왜곡의 역사」를 순례하는 기쁨도 바로 그 <연대>의 확장을 위한 실천이 아니겠는가.
 
2천년 기독교 ‘예수 왜곡의 잔혹사’ 앞에서 더 이상 ‘예수에 대한 기독교’를 용납하지 말자. ‘예수의 기독교’로 <원형 예수>를 살려내자. 그것은 단지 교권주의 틀 안에서의 싸움이 아닌, 자본의 욕망 앞에서 스러져간 지구촌의 수많은 전태일을 살려내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압제에 신음하고 계신 벽촌의 예수를 찾아가는 길이다.(끝)    
 
 
최 덕 효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 주비위원,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상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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