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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어차피 이러한 기독교로 바뀌게 된다!" (모든 분들에게 고함)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9-02-18 06:48 조회(3269)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b001/296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관심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함 :
 
"어차피 이러한 새로운 기독교로 바뀌게 되어 있다~!"
 
-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올인하기
 
 
 
 
이제 곧 맞이하게 될 <새로운 기독교>의 형태

세기연(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은 기존의 낡은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이다. 세기연이 표방하는 새로운 기독교와 기존의 기독교와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성서와 예수를 보는 가장 기초적인 관점 혹은 궁극적인 해석학적 맥락이 극명하게 갈라진다는 점에 있다.

단지 성서와 예수를 통해서 기독교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의 <기독교>라는 용어를 함께 공유할 뿐이지 기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가 표방하는 내용은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세기연이 표방하는 새로운 기독교에 대한 내용들을 캐치프레이즈로 압축해서 말씀드린다면 다음과 같다.
 

♣ 세기연 지향하는 <새로운 기독교>에 대한 2 가지 대원칙

 
1)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

2)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하려는 기독교

 
 
♣ 미래의 기독교가 갖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들 
 
 
  ※ 기존 기독교에서 <새로운 기독교>로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가장 기초 관점의 이동)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③ 초월적 유신론에서 <포월적 유신론>으로 
 
  ④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⑤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함께 가는 기독교>로
  ⑥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상호평등의 기독교>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과학과 충돌하는 종교에서 <과학과 소통할 수 있는 종교>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지금여기서부터의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세기연이 표방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기독교적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그 보다는 <오류>error와 <비극>tragedy의 가치를 가장 우선시한다는 점이 있다. 그 어떤 막강 파워의 권위어린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이천 년 기독교 역사를 관통하는 오랜 시간의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오류와 비극에는 결코 선행할 수 없다고 보는 게 세기연의 기본 입장이다.

그럴 경우 특히 정통 교리에 대한 지점에서 기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에 대한 입장은 첨예하게 서로 갈라진다고 하겠다(참고로 지금 여기서 이에 대한 논증들을 하려고 작금의 이 글을 쓴 것은 아니기에 혹시 세기연의 이런 주장을 처음 접하고서 이에 대한 논증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본인의 졸저 <미래에서 온 기독교>를 참조하시거나 또는 세기연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의 글들 http://freeview.org/bbs/board.php?bo_table=b001 을 참조하시길 바람).

내가 보기에 앞으로의 기독교는 어차피 이러한 방향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으로 가게 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점들이 날이 갈수록 너무나도 분명하게 다가오는 필연적인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미 우리는 현재에도 심각한 기독교 위기를 경험하고 있고, 그러한 위기야말로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의 징후들임을 깊이 성찰해야만 할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진정한 진보적 방향이 종교 신앙적 차원에서의 정치ㆍ사회변혁에 대한 온전한 정당성 추구와 다른 이웃종교들과의 소통적 대화 및 과학과 종교 간의 조화 그리고 계급 문제와 계층 간의 갈등 해소 및 여성과 생태해방이라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표방하는 세기연으로서는 참으로 느긋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로서는 아무리 곱씹고 또 곱씹고 또 재차 곱씹어 봐도 이것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지점이라고 본다. 혹시 이러한 나의 주장이나 세기연이 표방하는 새로운 기독교의 모토에 대해 반대를 하는 분이라면 언제라도 정정당당하게 반론을 주셨으면 한다. 이미 세기연의 2가지 대원칙에서도 보듯이, 세기연은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하여 설득력 있게 세기연의 오류를 밝혀주는 분이라면 세기연으로서도 분명하게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세기연이 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주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서로 간의 정당한 자세일 것이리라.

세기연이 내세우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이라서 이천 년 역사를 지나 이제 겨우 시작인 점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조차도 종교분파 사건으로 볼 만큼 여전히 근원적인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본다. 세기연이 표방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그 예수사건을 다시금 재일반화(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조직신학화하는 보편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기존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내용들을 도출해낸다.

앞서 말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서와 예수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라는 용어를 함께 쓰는 것뿐이고, 대신에 그 용어의 속뜻에 해당하는 전체 내용이 새롭게 바뀌게 된다는 측면에서 <새로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기독교>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가장 올바르고 정당한 의미로서의 건강한 기독교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기독교>라는 표현도 쓸 수 있겠으나 어차피 그런 식의 이바구들은 그저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인지할 필요가 있겠다. 용어 사용이야 어쨌든 그래서 세기연은 <새로운 기독교>를 표방한다는 것이다.

현재 시점의 세기연의 역할

나로서는 기존 기독교가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의 패러다임 대전환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기존의 낡은 기독교는 퇴행 또는 소멸하리라 생각한다. 이미 그러한 징후들은 도처에서 너무나 많이 보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패러다임으로 대전환을 기독교가 했다면 그러한 기독교는 완벽한가 라고 질문해볼 수 있겠다. 나는 생각건대 종교가 정말 완벽할 수 있으려면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결코 불가능하다고 본다. 자기 종교가 완벽하다는 생각이야말로 실상은 위험천만한 교만인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만이 완전하신 분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위험천만한 얘기가 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http://freeview.org/bbs/tb.php/b001/224 참조).

그러므로 현재의 시점에서 단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이전의 기존 기독교보다는 좀더 나은 기독교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징후적 발견들은 기존 기독교가 일으키는 여러 사회적 사건들뿐만 아니라 그냥 자신이 살고 있는 그 동네의 동네교회를 한 번 다녀보면 절로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도 나와 만난 자리에서 위의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패러다임 대전환으로서의 표를 보고서 “기독교가 이렇게만 바뀐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라고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비판적 독설가로도 유명한 도올 김용옥조차 새로운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세기연의 고문으로 계신 분들은 세기연이 표방하는 신학들에 대해 지지하시는 분들이다. 뿐만 아니라 세기연을 방문하는 분들 가운데는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 계신 분들도 함께 하고 있는데, 적어도 도처에서 깨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차피 기독교는 이러한 모양새로 변혁되게 되어 있다는 얘기다.

세기연은 이제 겨우 시작으로서의 첫 발을 딛고 있다. 그동안 매우 열악한 점들이 많아 어디에 제대로 홍보조차 한 번 한 적도 없다. 그저 밑바닥에서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그나마 뜻 있는 여러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이 함께 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관심과 지원이야말로 세기연이 표방하는 새로운 기독교라는 비전에 대한 설득어린 힘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진리는 “힘에 대한 설득의 승리”라는 측면을 지닌다. 제아무리 천동설 그룹이 아무리 막강 파워로 많은 사람들에게 군림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초라한 시작을 보였던 지동설 그룹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라는 이 시작이 현재로선 매우 미약하고 초라하게 보일지언정 나는 여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나의 전인생을 걸고 올인할 것이다.
 
 
◀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네트워크
 
 
 
세기연이 제시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한 비전

앞으로의 세기연의 비전과 대략적인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다.
 
세기연은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이다. 동시에 이를 실제로 적용할 현장이 필요한데 그 지점을 새로운 대안교회가 맡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기독교 신학에 따른 새로운 대안교회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역으로 대안교회 운동을 제대로 할려면 새로운 대안 기독교 신학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교회들 간에 공유될 수 있는 신학적 이념 입장이 필요하다. 그것은 보다 구체적이고 뚜렷할 수록 좋은 것이다. 세기연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의 경우 적어도 다음과 같이 21세기 그리스도교 신앙선언서( http://freeview.org/bbs/tb.php/b001/4 참조)만큼은 최소한으로도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리하여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마차바퀴가 있어야 굴러가듯이 세기연이 이론적 신학을 담당하고 세기연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표방하는 새로운 대안교회가 실제적 적용을 담당할 것이다. 서울의 경우 이번에 창립하게 된 <새로운 대안교회>가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외에도 각 지역들에 소모임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교회 구조에 있어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하나의 교회가 대형화될 수 있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단지 민주적인 구조의 작은 교회들이 각 지역들마다 많이 생성되기를 더욱 바랄 따름이다.

새로운 기독교를 표방하는 새로운 대안교회는 이미 <예수살기예배>라는 새로운 대안 예배 모델을 가지고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란 이미 그 어떤 신학적 이념이 실제적으로 관례화된 사태라서 새로운 전환으로서의 예배 정착이 매우 힘들 수도 있지만 어차피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예배 역시 새롭게 재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세기연이 표방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함께 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조금씩은 생겨나고 있다. 그리하여 이를 한데 묶어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공의회>를 형성할 계획이다. 물론 이것은 1-2년 안에 단박에 된다고는 생각지 않으며 가능한 만큼 차근차근히 진행할 생각이다.

그리고 새로운 공의회가 결성되면 새로운 기독교로서 기존이 낡은 니케아 신조에 대해 새로운 입장을 표방할 계획이며 그에 따른 제반적인 사업들을 수행할 생각이다. 이를 테면 얼마 전에 말한 것처럼 새로운 공의회를 통해서 성경 신구약 중간에 묵자편을 넣어보는 새로운 정경화 작업 같은 것들.. 물론 이는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든 것뿐이며 실제적으로 모든 일들은 매우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할 사업들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리고 세기연의 네트워크는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국내외적으로 할 계획이며 점차로 세기연 홈페이지의 경우 영문화 작업도 시행하여 영어권에서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도 펼쳐 갈 예정이다. 물론 이것 역시 2년 정도 내다보는 계획이며 단박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로 시행할 계획이다. 명실상부 세기연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한 연구들을 가열차게 진행하여 향후 10년 뒤에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성장하길 꿈꾸고 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지금 세기연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해 장밋빛 청사진만 제시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어차피 이를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들이 있고 끊임없는 또다른 불확실성들의 개입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라는 이 신념에 올인을 하기로 한 사람이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라는 이 비전과 동일시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라는 이 비전에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나는 같은 에너지버스를 타고 싶은 사람이다. 물론 이 같은 비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율적 결정이기에 존중할 수밖에 없다. 단지 이제 막 출발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라는 에너지버스에 방해만 되지 않길 바랄 따름이다.
 
아버지의 장례식도 치르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으며,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라고 말했던 예수님을 우리는 우리의 주인으로서 믿고 있다. 정말 우리들은 예수를 내 삶의 주인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 생각컨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야말로 정말이지 얼마나 불편했던 존재였으며, 그 얼마나 껄끄러운 이였던가!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내 생의 전부를 올인하기!

이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기존의 낡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재평가가 머지않아 시행되고 새로운 기독교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다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마도 23세기쯤 되면 현재의 이 시점을 본격적인 새로운 기독교 운동의 시작점으로서 평가할는지 누가 알겠는가. 적어도 현재의 세기연의 역할은 이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기존의 기독교보다는 좀더 나은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형성함에 있다고 본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으로서 나는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의 문제에 걸쳐 있지 않다. 세기연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라는 이 비전은 한낱 나 개인 한 사람의 인생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인지하길 바란다. 예수를 따랐던 사람도 군중이었지만 예수를 죽인 사람들에도 역시 군중이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막상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렇다면 이천 년 전의 그 예수 운동은 실패했던 운동이었는가? 성공했던 운동이었는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예수는 단지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갔을 뿐이고 그 신념에 자신의 일생을 올인했을 따름이다.

나는 세기연에 동참하는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기존 기독교가 흘러왔던 과거의 역사와 오늘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대의 징조들을 읽고 이제 곧 도래할 새 신랑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길 빌고 또 비는 바이다. 아니 어쩌면 그 새 신랑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직 눈을 뜨지 못해 등잔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되지 않길 빈다. 어리석은 자에겐 너무 늦었다고 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나는 이천 년 주류 보수 기독교가 형성해왔던 기독교라는 제국의 폐해야말로 MB정권이나 미제국주의의 폐해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고 심각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수많은 우매한 사람들을 재생산해내며 우리 사회와 세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으며, 복음화라는 미명하에 체제를 고착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가 자행되고 있는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세기연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일종의 새로운 종파운동이면서 동시에 사회운동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독교만이라도 제대로 바뀌어도 우리 사회 전체가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오늘 이 시대에 세기연이라는 아이콘은 본격적인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다름 아니다.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수도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것부터 최선을 다해 참여할 생각이다. 이천 년 동안 예수 없는 기독교를 선택한 사탄의 체제와 그러한 사탄의 지배 체제에 저항했던 역사적 예수들의 비폭력적 저항을 되새기며 말이다. 바야흐로 이 시대는 예수의 심장을 지닌 사람, 함께 십자가를 지고 따를 사람을 찾고 있다. 천국, 곧 하나님나라의 현실화는 이미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라는 형성 그 자체 안에 현재적으로도 경험되고 있음을 나는 분명하게 확신하는 바이다.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형성을 위해 생의 전부를 올인할 사람 그 누구인가!
 


 
 
 
sydney (09-02-18 07:10)
 
다 좋은데 욥기 인용한 구절은 뺏으면 좋겠습니다. 보수 교인들이 흔히 잘못 사용하는 구절인데. 무심코 사용하신듯....

    
정강길 (09-02-18 07:25)
 
저로선 무심코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효과를 기대하고 일부러 넣은 것인데
생각해보니 목사님 말씀도 참조해서 그냥 그 아래에 설명을 집어넣을까 하다가....
아.. 역시 그것도 구차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 이래저래 고민끝에 결국 목사님 말씀대로 뺐어여 ㅎㅎㅎㅎ

청마 (09-02-18 07:42)
 
보수 기독교인들의 사업장이나 가정에서 심심지않게 볼 수 있는 구절이지요. 그 구절을 상품화 하여 맘몬신에게 덧붙여 준 사단의 계략이라 생각합니다. 이 구절을 보았을 때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기연의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할 것" 입니다. 저들이 눈 감고 소경을 가르칠 때 하느님은 새 술을 준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정강길 (09-02-18 07:47)
 
히~ 고맙습니다. 청마님^^

sydney (09-02-18 11:02)
 
그 구절은 본 뜻은 욥의 친구들이 위문차 찾아왔다가 욥과 논쟁하는 중에
"야! 임마!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해야 하는데 너는 그렇게 안됬잖아? 그러니까 네가 뭐가 잘못한 것이 있는거 아냐?"라고 한 것 입니다.'
이걸 거두절미해서 집집마다 걸어 놓고 있으니.....
나 참! 한심한 한국교회 수준이란...

미소 (09-02-18 11:30)
 
새로운 기독교를 간절히 원합니다.
부끄럽지만 대책없는 교회속에서 수년 동안을 그저 익숙함에 우호적인 한사람이 되어 그들과 함께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에 이런 글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생각해봅니다.
ㅎㅎㅎ(대개의경우 그렇듯이 뻔한 대응과 반응였겠죠)
갠적 생각으로는 기존 기독교가 부정적 비판은 물론 심지어 건전한 비평마저도 수용하거나 견디질 못하는 문화이다 보니 지금의 불합리하고도 모순투성이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Joe (09-02-18 12:17)
 
정실장님;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All IN. 하신 모습에 감사드리며 존경과 격려를 드립니다.

정실장님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음은 있지만 용기가 와 신념이 부족하여 그리고 세상에서 호구지책 때문에 하지 못 하는 일을 대행 하여주고 계십니다.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외롭고 지치는 선한 싸움입니다.  실장님 너무 개인적인 희생이 많으셔서 가슴이 아프고...

All IN 할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러나 세기연 회원들이 정실장님 뒤에서 조금씩 도와 드리기 원합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본인은 우리세대에는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세기연이 운영하는 신학대학이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바비도 (09-02-18 14:22)
 
위의 글이 어제 영화보고 뒷풀이 자리에서 세기연 회원들이 정강길님에게 질문했던 내용에 대한 답변이 아니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강길 (09-02-18 15:04)
 
무슨 뜻인지요? 윗글은 그에 대한 답변이 당연히 아니지요. 언론에도 기고될 내용인데..

그리고 말씀하신 그 부분은 이미 따로 제가 생활글에 올려놓았답니다.
저로선 어째서 윗글을 보고 어제 논의의 답변과의 연관성을 떠올리셨는지는 자세히 잘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그 생활글을 시간적으로 먼저 올렸다면 바비도님의 그같은 오해도 없었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우도 (09-02-18 18:19)
 
바비도 언제 곡차 한 잔 해야 할텐데 언제쯤 데려나,,,,,,,,, 보고도 싶고

        
바비도 (09-02-18 20:10)
 
우도님 잘 지내시죠! 저번 1월 대전에서의 세기연 월례포럼을 마치고 인사도 못드리고 왔습니다. 지난번 세기연
월례포럼 준비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다고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무궁화교회 교인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우도님 건강을 생각하셔서 곡차를 적당히 드시길 권해 드립니다.^^  지난번 월례포럼에서도 무리 하시는 것 같던
데요!^^ 저도 우도님을 많이 뵙고 싶습니다.

짜웅 (09-02-26 16:53)
 
길고 끈질기게 최선을 다해 그 뜻을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중도에 있는 저로서는 적극 동참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한가지 부탁은 급하게 하시지는 말기 바랍니다. 질적 성장을 먼저 고려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일본의 어떤 통신문화를 기획하고 확대한 예가 있는데 조금씩 점진적인 방법을 선택 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당대에 모든걸 이루기 보다 후대를 위해서...

고골테스 (09-03-03 04:34)
 
짜웅 // 제대로 지적하셨습니다. 세기연님들 모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당대에 모든걸 이루기 보다 후대를 위해서..."

정강길 (09-03-03 08:13)
 
짜웅님, 고골테스님 진심 어린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저로선 당대가 되든 후대가 되든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아갈 따름입니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험난하기에 말씀하신대로 차근히 점진적으로 해나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샐러문 (09-03-05 20:46)
 
진리를 선포함도, 새로운 사실과 이해를 추구함도,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함도, 우리의 우둔함으로 늦었을 뿐이기에 모든 일을 함에도 사랑함으로 해야 하고 느껴져야 하며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둔하다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닌 바로 우리의 잘못이며 좀더 일찍 이런 일들을 하지 못함에 대하여 회개하고 좀더 심기일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

히스토리 (09-03-20 01:19)
 
여기 가끔씩 들리는 한국교회 성도입니다..오랜만에 다시들어와 밑에 허호익 교수님관련글에 대한 답을 드리면서 이 글에 대한 제 부족한 소견을 남깁니다.글쎄요. 사실 유럽도 이렇게 자유주의적인 신학 혹은 그와 동류의 신학을 추구하는 일변도로 나가다가 기독교가 다 쇠락했지요. 그런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때라도 이렇게로만 변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러 주변 환경의 영향도 고려해야 하지만 위에서 말씀하신 두 종류를 함께 추구해 나가는것이 전세계적 조류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개신교 복음주의권이나 가톨릭에서도 위의 두 종류를 (양측 내부에서도 그 정도의 차이는 다양하지만) 함께 추구하고 어떤부분에 있어서는 변증법적으로 추구하고 있는것으로 보이고요. 어느 한쪽 일변도로 나가서는 무너지기 마련이라는것을 짧게는 지난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의 경험이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죠.  이미 에크하르트나 여러 신앙 전통속에 말씀하신 여러가지 요소들이 내재되 있기에 그것들과 상호 균형을 맞춰가는 가운데 기본적인 신앙의 중심은 굳게 세우면서 앞으로 기독교가 나아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정강길 (09-03-20 06:16)
 
저는 유럽을 기독교의 쇠락으로 보진 않습니다. 아마도 히스토리님과 같은 기존 기독교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평가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유럽은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던까지 거치면서 결국은
기존의 낡은 기독교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된 거뿐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발전일 수도 있는 거죠.
다시 말해서 이제 유럽 사회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의 기독교가 아니라면
결코 소통되지 않는,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기에 어쩌면 유럽 사회야말로 세기연이 추구하는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기다리고 있는지 누가 아나요.
거기서 '무조건 믿어라'의 보수 기독교 통할 수 있다고 보는 건 우스운 얘기죠.

무엇보다 세기연이 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는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도 이제 겨우 시작이기에
적어도 실제적인 적용의 시대를 기다리고 있는 바라 그렇게 미리 단정하시면 곤란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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