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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1-02-02 02:06 조회(1565)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b001/567 




 
조금이라도 기독교에 대해 깨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성서문자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온건한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다거나 혹은 보다 진보적인 기독교 진영에 속한다는 이들은
적어도 자기들은 성서문자주의자들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정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게다가 한국교회를 비롯한 현재 기독교를 염려하는진보적인 학자들조차도
기존 기독교의 가장 큰 폐해를 꼽을 때 성서무오설 혹은 성서문자주의를 들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러한 것은 문제 해결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보다 뿌리 깊고 보다 고질적인 병폐가 있다.
이는 성서문자주의나 성서무오설보다도 더 깊은 폐해를 끼치는 낡은 사유에 속한다.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초자연주의>에 대한 믿음이다.
초자연주의란, 자연 세계의 인과적 법칙들도 자연을 벗어난 초자연적인 존재나 사건에 의해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깨트려질 수 있다고 보는 신념 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를 포함해 기존의 종교인들 대부분은 바로 마약 같은 이걸 끊지 못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닌 사실상 종교 전반의 고질적 병폐와 문제이기도 하다.
낡은 종교의 공통적인 속성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초자연주의에 대한 신앙이다.
 
내가 볼 때 성서문자주의의 폐해보다도 <초자연주의>에 대한 믿음 신앙이야말로
보다 더 뿌리 깊은 본질적인 악습이라고 생각된다.
 
왜 그러한가?
 
흔히 성서문자주의 혹은 성서무오설의 핵심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좀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 측면이 있다.
 
사실상 성서문자주의 혹은 성서무오설이 지니는 가장 뿌리 깊은 폐해는
성서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 이를 테면 초자연주의적 기적 같은 사건들을
죄다 백퍼센트 역사적 사실로서 이해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도 전지전능한 초자연적 신 존재를 믿는 것이다.
 
이는 본인이 예전에 언급했던 성서읽기의 문제인
<사실의 언어>와 <고백의 언어>를 혼동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발 이제는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대중들을 기만하는 설교와 성경공부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나마 살찌워지는 것은 결국 목사들과 교회 교권일 뿐이다.
 
일반 대중들은 환상을 먹고 사는 면도 있기에 여전히 자신의 힘든 삶을
초자연주의적인 기적 혹은 초자연적인 절대자에 기대고 있는
유아적 신앙의 구습을 못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현세를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고질적인 실제 사례들은 너무나 많다.
여기에는 기독교 뿐만 아니라 여타의 다른 종교들 역시 죄다 포함된다.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이 종교를 대할 때의 공통적인 패턴은
대체로 초자연주의에 대한 신앙을 절대 못끊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내가 볼 때는 기존의 성경공부나 설교 역시
대중을 기만하는 설교와 성경공부라고 보는 것이다.
 
성서를 비롯한 모든 종교 경전들에 나타난
초자연주의적 계시 사건이나 기적이야기가 적힌 기록들은
이제 사실이 아닌 의미의 영역으로 넘어와야 마땅하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냥 이를 제거하듯이 잘라냈지만
내가 볼 땐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보며, 그러한 신화적인 기록들도
그 옛날 그 시대에서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받아들이면 된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것이 작금의 성서를 이해하는 보다 유용한 접근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이제 초자연주의에 대한 기대와 신앙을 끊어버리자!
 
그렇다면 그건 왜 끊어야만 하는가?
종교에게선 그런 기대를 해선 안되는 것인가?
 
내가 볼 때 초자연주의라는 요소가 계속 종교에 남아 있는 한
종교는 힘의 종교가 될 것이며, 종교의 합리적 변혁은 더욱 요원해질 수 있다고 본다.
건강한 합리적 이성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려는 노력은
최소한 적어도 타자에 대한 폭력이나 폐해는 되지 않을 걸로 본다.
 
그리고 초자연주의에 대한 신앙을 접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초자연주의야말로 진정한 종교로서의 신비주의의 물줄기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여기서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여길 지도 모르겠다.
 
초자연주의는 반합리적인 것이다. 반합리적인 것들은 걸러질 필요가 있다.
동화 같은 기적이야기를 기대하는 신앙은 유아적인 신앙일 뿐이다.
여전히 우리가 주술과 마법 같은 미신들에 도취된 신앙을 갖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중세를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단호히 말하지만 초자연주의적인 기적은 없으며,
초자연주의적인 신은 없다. 그런 신은 애초부터 없었다.
 
성경에 쓰인 초자연주의적인 기록들은 당대에서의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새롭게 전환되어야 한다.
오늘날 성서를 제대로 읽으려면 바로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사실의 언어 차원에서는 초자연주의적인 기록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고백의 언어 차원에서는 초자연주의적인 기록들을 의미있는 차원으로서 수용하면 된다.
이것이 오늘 현대의 시대에서 성경을 새롭게 읽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종교에서 반합리적인 초자연주의라는 망령들을 걷어내면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라고 질문할 것이다. 나는 그 남는 자리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도 논리도 넘어서는 신비의 자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전히 인식의 한계를 갖는 존재로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과학자들이 자연의 삼라만상에 대해 경이로움을 갖는 것도
일종의 자연주의적 신비체험이라고 생각된다.
 
초자연주의가 아닌 자연주의에서 발견하는 신비는
더욱 애틋한 것이며 존재를 더욱 경이롭게 만드는 무엇이다.
 
저 들녘의 꽃 한 송이가 갖는 신비를 결코 폄하해선 안된다.
그야말로 장엄한 생명의 활동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신비로운 체험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도 느끼고 있는 일상적 체험이다.
예컨대, 나는 내 머리 속에 세계 안에 없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이건 마치 내가 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세계 안에 없었던 것이 세계 안으로 진입된 것이다.
나는 이 체험이 너무나 신비스럽게만 느껴진다. 이 작은 체험의 메커니즘을
오늘날 현대의 과학조차도 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왜 모르는가.
 
물론 과학이 언젠가는 합리적으로 규명할 날이 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말라. 인간이 신이 아닌 한 신비는 영원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자연세계에 갖는 경이로움과
종교인들이 신에 대해 갖는 경이로움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을 보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날 보수 근본주의자들만 초자연주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성서문자주의를 벗어났다는 중간 복음주의자들도 여전히 초자연주의에 대한 미련만큼은 잘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진보 기독교 진영에 속한다는 신앙인들조차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
 
이제는 초자연주의에 대한 신앙을 기대하지 말라!
그야말로 종교의 악습과 폐해만 연장시키는 뿌리 깊은 사탄의 계략일 뿐이다.
 
두려움 없이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교정할 때, 비로소 종교의 참맛,
진정한 신비의 문과 마주하게 될 것임을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춘이 (12-01-15 00:21)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의 차이점은 뭘까요.. 언젠가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아닌가의 차이인가요? 제 삶에서도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몇 번 했는데 그 체험을 어떤 것으로 분류하느냐가 문제이군요.. 저의 체험을 예로 들면 새벽기도시간에 1시간 이상을 회개기도하다가 성악가 수준의 찬양소리를 들은것, 보통 새벽기도에서 기도하다 말고 성악가 수준으로 찬양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좀 나른한 상태에서 TV 화면을 보았는데 이 파일을 삭제해도 되겠습니까? 라는 문구가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나타났던 기억. 전날밤 왼쪽은 악령 오른쪽은 성령 하는 식으로 예민해진 정신상태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중국식당에 부모님과 갔는데 식사를 마치고 포춘쿠키를 부셔서 쪽지를 보았는데 왼쪽과 오른쪽에 관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체험은 초자연적인 것인가요, 신비적인 것인가요..?

    
미선이 (12-01-15 01:57)
 
초자연주의는 자연의 인과적 법칙을 신(혹은 그 어떤 초월적 존재)에 의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고 깨트릴 수 있다고 보는 신념인데, 제가 말하는 신비주의 경우는 바로 그러한 신념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주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것입니다.

신비적 체험이라면서 몇 가지 경험들을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그러한 경험들은 그냥 초자연주의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자연적이고 현실적인 여러 경험사례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런 경험들을 한 적이 많습니다. 심지어 유체이탈까지..

어쨌든 이러한 경험들은 그 자신에게는 적어도 경험된 것이기에 진실일 수 있으나 그걸 가지고 타자와 소통을 갖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세계 안에는 나의 주관적 경험과 반대되는 또다른 타자의 경험들 역시 여전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보다 많은 다양한 경험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 해석이 좀더 옹호될 것이고 그러한 해석으로서 소통을 확보할 따름입니다.

앞서 유체이탈을 언급했지만, 이를 경험한 자신은 분명히 육체와 분리된 영혼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여러가지 과학적 연구에서는 뇌에 케타민이라는 약물을 투여할 경우 그러한 유체이탈적인 임사체험과 동일한 경험을 체험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춘이님의 그같은 경험은 춘이님의 관점에서는 진실일순 있으나 타인의 관점에서는 춘이님의 경험과 충돌하는 전혀 다른 목격 진술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충돌하는 부분에서는 서로 간에 합리적 소통을 도모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경험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의 경험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인 거죠.

인간은 지푸라기라도 그 어떤 의미를 부여잡고 싶어합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얘기죠. 따라서 갓구운 식빵에 나타난 우연적인 그을음을 보고서도 거기에서 예수님얼굴을 찾아내는 경험들 역시 알고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경험이기도 하지요. 일종의 투사(projection)작용이기도 하구요. 마리아상을 떠올리면 그게 또 성모마리아 얼굴로도 보이는 거구요.

이미 우리의 뇌 자체가 사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서도 서로 간의 경험된 진술들이 저마다 다르지요. 시지각적 감각으로 수용되는 과정에는 직접적 사실과 그러한 사실에 대한 가치평가가 함께 뒤섞여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환상을 잘 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냉철하게 자기자신을 객관화 시켜서 볼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그 어떤 설명하기 힘든 신비적인 체험을 했다고 한다면 제 생각에는 그냥 자신의 주관적인 내밀한 체험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이를 타자와 소통하고 싶으시다면 사실적 체험보다는 의미적 체험으로서 언급하시는 게 좀더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싶네요.

자신은 외계인과 대화를 나눈다는 빵상 아줌마나 자신은 공중부양을 체험했다는 사람이나 축지법으로 산을 훌쩍 넘고 달린다는 사람 등등 뭐 다양한데.. 인간은 여전히 이성적 존재라기보다 비이성적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상한 걸 믿기 좋아하는 습성들이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단 다음과 같은 책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마이클 셔머, <왜 우리는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freeview.org/bbs/tb.php/f003/163

마르틴 우르반,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할까?>
http://freeview.org/bbs/tb.php/f003/169

둘 다 읽어보시면 정말 좋은 책들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신비적인 체험은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신비적인 체험은 오히려 저 들녘에 있는 풀 한 포기 이상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에 피는 백합화 한 송이에 대한 체험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는 지극히 자연적이고도 일상적인 체험들이죠. 하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는 오늘날의 현대과학은 저 풀 한 포기의 체험조차 온전히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영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물 한 모금, 밥 한 공기, 들숨 날숨의 지극히 일상적인 체험들 속에서도 느껴지는 풍부함과 전율들이 있습니다. 굳이 그 어떤 초자연에서 찾을 필요가 전혀 없지요. 생명의 약동과 신비는 인간 지성의 한계에 서 있다는 안타까움 없이 시간에 대한 창조적 추이를 관찰하기가 매우 힘들답니다. 영성에 대해서는 혹시 필요하다면 제 첵인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제11장인 새로운 영성론의 글도 한 번 참조해보시길 바랍니다.

Logos (12-06-12 10:19)
 
글 가장 마지막에 밑줄 친 문장 중 첫 번째 문장

"오늘날 보수 근본주의자들만 초자연주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이 문장 뜻이 좀 애매모호 합니다.

"오늘날 보수 근본주의자들만 초자연주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 맞는 듯하네요.

    
미선 (12-06-12 14:17)
 
네에.. 그렇게 읽으시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르파 (12-12-08 13:36)
 
글을 잘 읽었습니다.
제 생각도 매우 비슷합니다
단지, 글에 나타는 "사탄의 계략" 같은 단어는 글의 함의를 약간 혼동하게하네요.
이부분을 별도로 다루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들의 초자연에 대한 믿음 안에는 초자연적 인격체로의 사탄개념이 있으니까요.

성경의 초자연적 언어 표현은 어쩌면 사건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으로의 기록이라 생각합니다.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들,
작게는 개인의 기도응답 같은 것 부터
크게는 이 우주가 존재하고 생명이 탄생한 것 까지.

그 모든 것은 일상일 수도 있고 신비일 수도 있는 사건입니다.
과학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없는 우리 삶의 대부분은 신비고
그 신비에 대해 우리는 고백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의미적 소통이라고 하신 말씀은 고백적인 소통과 같은 의미라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고백에는 개개인의 차이 에도 불구하고 사람이기 때문에 내재된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고 객관의 언어가 아닌 의미의 언어로 서로의 신앙을 이해 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생각합니다.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표현이라 망설여지지만

하나님은 서로의 입(글)을 통해 말씀 하시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미선 (12-12-08 20:03)
 
본문에서 말하는 "사탄의 계략"이란 일종의 레토릭일 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고백적인 소통 역시 의미적 소통에 해당됩니다.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계속 더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안아빠 (13-04-26 23:09)
 
매우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주희 (14-01-27 18:42)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미선 (14-01-28 00:04)
 
별말씀을요. 아직 많이 열악한 편입니다. 이런 논의 자체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정말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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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632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769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1566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763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996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828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1339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1178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1011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1135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1401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1177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1404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1612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1324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1189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3873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1292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1208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1130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1079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153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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