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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글쓴이 : 미선 날 짜 : 12-04-28 11:27 조회(902)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b001/624 




 
단일 실체가 아니었던 초대 교회

<초대 교회>란 어느 한 집합으로 묶이는 단일 실체가 아니다. 
예수운동/예수사건으로부터 분화된 다양한 예수운동<들>에 해당된다.
 
필자의 다중예수론만 하더라도 본래부터 다양한 예수운동들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를 마가신학공동체가 아마도 그 중심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나사렛예수를 중심으로
당대의 다양한 예수운동들을 수난설화를 가미하여 합성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초대교회라는 실체는 결코 단일화된 하나의 실체로 묶일 수 없다.
이는 성서를 대략 문자적으로만 보더라도 당시 바울노선의 기독교와
또 다른 베드로-야고보 노선의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실제적으로는 훨씬 더 다양한 예수운동들로 분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게르트 타이센은 예수의 가르침을 곧이 그대로 따라서
어느 한 곳에 거처하지 않고 방랑하는 급진적 무리들도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종종 이천 년 전의 초대 교회를 손쉽게 단일 실체로 파악해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
 
애초 예수운동/예수사건은 새로운 유대교 운동의 맥락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초기의 기독교 역시 다양한 맥락적 차원의 유대교의 쇄신 운동에 가까웠다.
이미 당시에 유대교는 헬라문화권의 영향으로 헬라화된 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바울 노선의 기독교는 시대적 필연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의 공과..
 
나는 바울을 생각할 때, 딱 장점과 단점이 반반씩 되는
그런 공과를 지닌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몰랐다는 사실은 지극히 분명하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유명한 텍스트 침묵은 더할나위 없는 예증이다.
진보적인 신학자들 중에는 바울의 선교적 관심이 달랐기 때문에
굳이 역사적 예수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설득력이 너무나 떨어진다. (물론 보수 신학자들은 아예 이런 생각도 않는 부류들이지만..).
 
아마도 진보 신학자들은 웬만하면 바울을 좋게라도 해석해내고 싶었을 것이다.
워낙 현실 상황에서의 보수 기독교인들의 득세와 바탕을 감안해 볼 때
아무래도 그런 전략으로 가는 것이 꽤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점에서 2세대 민중신학자이자 신약학자였던 김창락 교수의 바울신학 해석은
단연 돋보였다고 볼 수 있는데, 한때 본인도 바울의 신학에 대해 이 분의 해석을 따라
매우 진보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김창락 교수의 작업은 바울의 미션을 민중신학적으로 해석한 바울신학이었다.
상당히 그럴듯 했을 뿐더러 어떤 면에선 정말 수긍되는 부분들도 많다.
바울의 의인론은 약자해방의 논리로서 당시로서는
유대민족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의로운 의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마음 한 켠에 남아있는 찜찜함을 거둘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러한 바울은 그토록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인가.
숱한 예수의 비유나 주의 기도문조차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그였다.
 
이에 대한 대부분의 진보 성서학자들자들이 마련한 변명은 바울의 선교적 관심사와
그 삶의 자리가 달랐기 때문에 굳이 이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같은 선교적 관심사를 위해서라도
오히려 역사적 예수를 언급하는 일은 더더욱 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만일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알았다면
그의 선교 사명을 위해서라도 훨씬 더 유용하지 않았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신이 알았던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너무나도 필요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몰랐었다는 점에 대해 특히 <예수퍼즐>의 얼 도허티가 마련한 주장은
아마도 이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증일 것으로 본다.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진보적 신약성서학자들의 온전한 답변을 아는 바가 없다.
 
바울의 그 침묵에 대한 여러 추정되는 가설들 중에서 오캄의 면도날을 적용해 볼 경우
그냥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몰랐었다고 보면 가장 깔끔하게 해결된다.
바울의 그 깊은 침묵이 그냥 자연스레 설명 되는 것이다.
 
물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천상의 예수를 만났었다.
그의 선교 작업은 굳이 역사적 예수를 알지 않더라도
여전히 신앙이 가능한 그러한 예수를 전했던 것이다.
 
바울 나름대로는 그리스 로마 문화의 시대에서 새로운 유대교의 맹아로서
당시 유대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업은 어떤 면에서 절실히 필요했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당시 유대교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헬라화 되어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바울이 제시한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신앙은 그런 면에서 매우 유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애초 우리가 알던 원형의 역사적 예수의 급진성,
예수 운동의 그 급진성은 그러한 바울 신학의 성격과 맞물리면서
많은 부분에서 완화되고 유화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고 본다.
바울의 의인론 신앙은 그런 면에서 좀 더 손쉽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바울의 로마서 주장과 달리
또 다른 노선의 초대 교회 기독교 공동체는 행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만일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가 있었을까를 생각해볼 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어쩔 수 없이 회의적인 사람에 속한다.
 
아마도 바울의 작업이 없었더라면 예수운동 자체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알려지기란 매우 힘들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마가복음 이후로도 여러 복음서는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일찍 쓰여졌던 바울의 서신들, 그리고 그 서신들에서 보여졌던
바울의 신학적 작업이 없었다면 그 영향력이 어떠했을지는 분명 의문이 남기도 한다.
 
특히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의 차이에 있어 결정적인 건
바울 서신에는 일종의 형이상학이 보다 강하게 배여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헬라철학의 언어와 개념들이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바탕의 세계관은 일종의 종교를 암시해준다.
이 차이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에도 공통된다.
요한복음서 역시 상당히 우주론적인 형이상학적 바탕이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노선의 기독 공동체가 있었더라도
바울의 노선을 더 많이 따르는 이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이 아닌 다른 노선의 기독교는를 따랐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야고보 노선의 기독교나 요한복음 노선의 기독교 등등 말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상황에서 로마 권력의 지배권 하에 놓여져 있었다는 점은
다양한 분파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넘어서야 할 공통된 과제였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결국 살아남은 건 다름 아닌 <바울 신학 노선의 기독 공동체>였다.
 
다윈의 진화생물학에 자연 선택이란 말이 있듯이,
만일 문화에 적용한다면 <문화 선택>이 될 것이다.
당시로선 그러한 문화 선택의 결과라고 본다.
 
한 마디로 바울 신학 노선의 교회 공동체는 결국 당시의
그리스 로마 체제의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기독 공동체였다는 얘기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선 침묵했지만,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은 매우 핵심에 속한다.
여기에 일종의 단절과 간격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그리스도론은
나름대로 바울 신학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그리스 로마 시대에 새로운 신앙으로 발아되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통일된 단일 기독교로의 확립
 
바울신학 노선의 기독교 공동체가 적어도 여타 노선의 기독 공동체보다는
좀 더 중심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점점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콘스탄티누스 때는 국교화 되기에 이른다.
 
콘스탄티누스라는 이 정치적 로마 황제는 일생을 태양신을 믿는 신자였지만
죽기 직전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예수가 인간이냐 신이냐>의 종교 영역의 문제에 대해
이를 그 자신의 권력적 지배를 위해서 아무래도 이를 활용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세상에는 두 주인(주님: 큐리어스)이 있다는 이른바 <두 주인설>이란 게 있다.
하나는 정치 영역에서의 왕, 종교 영역에서의 왕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경우, 황제는 세속적인 정치 영역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고,
예수는 거룩한 종교 영역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다. 이때 그런 에수를 놓고
그 예수가 인간이냐 신이냐를 놓고 종교인들끼리 논쟁한다고 했을 때
정치 영역의 왕으로서는 예수가 신과 동격이 되는 것이
아무래도 그 자신에게도 덩달아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져다 줄 것으로 봤었다.
 
그런 점에서 그 자신의 니케아 별장으로 초대하는 수고로움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상 그 지리했던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논쟁이
니케아 신경으로 합의되기 까지는 (물론 그 이후에도) 많은 피의 댓가들이 치뤄지곤 했다.
예수에 대한 교리적 논쟁은 일찍부터 있었고,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무참히 죽거나 희생당했었다.
 
마침내 기독교는 서서히 단일한 실체로서의 기독교로 확립되어지게 된다.
내가 볼 때 여기까지에 바울신학의 역할은 매우 컸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바울신학이 초기 기독교 이론 체계의 확립에 많은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본다.
 
심지어 예수의 기독교냐 바울의 기독교냐 라는 그런 주장들까지 나오는 것도 보면
그만큼 기독교 역사에 바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까지 나오는게 아닌가 싶다.
 
요컨대,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의 재수립은 그러한 바울신학에 암암리에 깔려 있었던
낡은 형이상학적 잔제들을 드러내어 그 한계를 폭로하고
예수사건을 다시금 재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당시의 헬라철학의 세계관
곧 그리스 철학의 유용성과 한계를 함께 숙고해보는 작업과도 같이 맞물려 있는 점이 있다.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건설은 오류와 비극에 대한 겸허한 합리적 태도로부터
 
이제 우리는 동서융합의 시대에서 가급적 오늘날 첨단 학문의 성과들까지 함께 곁들여
새롭고 건강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 된 예수로서
그리고 그러한 기독교로서 다시금 새롭게 건설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획일화된 교리로서의 통일된 단일 기독교가 아니라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다양한 노선의 기독교를 추구함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바로 그런 점에서 필자는 최소한의 두 가지 전제만을 희망한 것이다.
 
1.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
2.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적 소통으로서의 기독교
 
우리에게는 그 어떤 새로운 종교 교리가 필요하다기보다는
사실은 종교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a New Attitude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며,
훨씬 더 필요한 것임을 보다 힘주어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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