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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2-02-24 19:31 조회(803)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b001/621 




 

진선미(眞善美) 경험에 대한 기원과 예수사건
 
- 진선미 경험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에 대한 예수사건이 갖는 의미
 
 
 
<힘의 불균형 사태>와 <힘의 균형적 사태>
 
"존재는 힘이다" 무릇 철학에는 바로 이러한 고찰이 있다. 이는 화이트헤드 철학서에도 나와 있지만 원래는 후기 플라톤에 따른 것으로 안다. 즉, 존재 자체가 일종의 힘이라는 얘기다. 또한 현대물리학에서는 존재를 <에너지>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는 이러한 명제가 크게 틀린 얘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주 진화의 과정에서 힘의 불균형 상태를 떠올리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구행성에서 유전자 및 생명을 창발시키는 가운데 존재들 간의 힘의 불균형 사태들은 분명하게 목격되고 있다. 생물학적인 자연세계의 진화론 역시 이를 잘 예증해주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진화하는 자연세계가 힘이 지배하고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생하는 협력적 관계도 함께 발견되는 점도 결코 간과되어선 안될 것이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말했다면, 분자생물학자로서 요아힘 바우어 같은 학자는 도킨스 주장의 맹점을 찌르면서 자연세계가 보여주는 <협력하는 유전자>를 설파하기도 했었다. 바우어는 도킨스가 놓쳤던 지점들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의 자연세계와 역사는 결국 <힘의 불균형 사태>와 <힘의 균형적 사태>를 도모하는 두 가지 진화의 흐름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때 내가 보는 진선미의 기원은 후자에 대한 경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물론 종합적으로 보면 힘의 두 가지 사태 모두에 대한 대비적 느낌이 깔려 있기도 하다. 인류 진화에 있어선 바로 이 대비(contrast)에 대한 느낌이 매우 중요하다.
 
선악 경험과 진리 논쟁
 
따라서 힘의 역학 관계들이 시시각으로 변하는 인류 진화의 과정을 생각해볼 때, 우선 선악에 대한 경험과 발상의 기원은 손쉽게 인지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애초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그 힘에 의해 결핍을 당하는 희생자 혹은 약자가 꼭 발생하기 마련일 것이다. 그럴 경우 약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힘의 불균형성이 선이 아닌 악(그릇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걸로 본다. 물론 힘 있는 강자의 입장에서는 힘의 지배를 선(옳은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힘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선 강자를 지지하는 발언들이 펼쳐질 것이고, 약자는 오히려 그러한 강자에 맞서는 주장들이 나올 것이다. 진리 논쟁이란 결국 강자와 약자 간의 파워 게임을 정당화하기 위한 파생물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진리 논쟁 자체는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생명은 어떤 의미에서 타자의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측면에서 약탈이기도 한데, 그러한 약탈을 위해선 정당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아버지격이었던 니체가 놓쳤던 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힘에 대해선 힘으로 맞서는 것을 정당화했었고 진리는 없으며 따라서 그런 진리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보았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진리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로선 이것이 곧 진리라고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당화>justification라는 작업 역시 궁극적으로는 진화적 맥락에서 나온 존재 활동의 욕구라는 점을 간파하진 못했었다. 존재가 지닌 호기심을 충족할 설명 욕구라는 것은 이미 오랜 태고적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사회에 신화나 전설이 만들어지는 맥락도 그 어떤 자연현상이나 특정의 사건들을 사건들을 해명(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번개가 치고, 훙수가 치고, 바람이 부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면 그 의문에 대한 해소를 위해 정당화의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동양에서는 <입장>(立場)이라는 말이 있다. 즉, 정당화 자체가 자신이 서 있는 입장을 대변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행위에 해당된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진리 논쟁은 존재론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 단 한 가지만의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진리란 수천수만 가지의 진리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다양성 속에서 빚어지는 입장들 간의 충돌이다. 양립 가능한 다양성들 및 차이들이라면 함께 어우러질만 하지만, 게 중에는 서로 충돌하는 입장들이 있다. 만일 1+1=2와 1+1=4 라는 주장을 동시에 받아들일 순 없는 노릇이잖은가. 따라서 우리는 결코 <천 개의 진리>로 만족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맨처음에는 사소한 <힘의 불균형 사태>가 있다. 예컨대 산수를 모르거나 잘못 수용함으로써 겪게 되는 생활의 불편과 곤란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될 경우 심각한 폐해와 비극을 불러올 수 있다. 예컨대, 먹이를 나누어 주는데 공평치 못하게 분배될 경우 약자들의 불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볼 때 진리 논쟁은 결국 정의의 문제와 불가피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정의란 곧 <약자우선성>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세계 안에 개입되는 실제적 정의의 양태들은 그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역차별적이고 편파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
 
이제 미( 아름다움)에 대해 살펴보자. 화이트헤드는 진선미 중에서 미를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보았었다. 물론 몇몇 화이트헤드안들 사이에선 이 문제가 분분하긴 해도 대체적으로는 그렇게 보고 있다. 선과 진리의 문제가 어느 정도 의식상에서는 체감적 구분이 되어진다고 한다면,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그보다는 좀 더 무의식적이며 좀 더 원초적인 경험 사태에서부터 비롯되어진다고 본다. 화이트헤드가 말한대로 예술가들은 논리학자에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서로의 목적들이 조화되는 사태에 해당된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순응 및 적응에 대한 관련성이 있게 된다. 문제는 존재가 항상 유동적인 과정의 현실에 놓여 있듯이 조화는 부조화에 대한 느낌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변화되는 맥락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미 존재 자체가 생성 소멸의 과정에 놓여 있잖은가. 따라서 완결된 아름다움이란 있을 수 없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 역시 상대적 관련성 속에서 갖게 되는 비교의 느낌에 따른다.
 
이때 임의의 순간 그 자신을 형성하게 되는, 객체적 경험으로부터 느껴지는 친화적 특성들은 그 어떤 유한한 한정성을 낳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그 자신을 정립시키는 존재 형성의 강도(intensity)에 기여하는 조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존재론적 양태가 바로 우리가 느끼는 저마다의 미적 경험들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경험은 인류만이 느끼는 특질도 아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물리적 세계로부터 그리고 식물에게도 동물에게도 일종의 익숙한 패턴이나 혹은 이끌림의 느낌이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임의의 순간에 그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강렬한 유혹의 느낌이나 친숙함은 도덕이나 윤리마저 너머서 있기도 하다. 흔히 경험하듯이 거대한 피라밋이나 만리장성 앞에서 그리고 사악한 밀수꾼이 나오는 카르멘 오페라 앞에서도 윤리나 도덕의 문제는 뒤로 밀려나고 아름다움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물에 대한 숭배도 이같은 관심의 병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개체성 안에서의 세부적 조화가 갖는 느낌이 다른 개체들 간의 부조화라는 대립의 느낌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대립은 플러스가 되는 요인일수도 있고 마이너스가 되는 요인일 수도 있다. 보다 상향적인 경험들은 보다 폭넓은 가능성들을 소화하는 가운데 이뤄지길 원한다. 따라서 낮은 수준의 완전성에 대한 경험은 보다 고차원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불완전성에 대한 경험과 비교해볼 때 그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때 낮은 수준에 대한 경험도 결국은 상향적 경험을 위한, 깊이를 형성하는 강도 혹은 일종의 무대배경으로서 기여할 수 있다.
 
확실히 미적 경험은 선악이나 진리에 대한 경험보다도 좀 더 광범위한 느낌을 담고 있는 경험 유형에 속한다. 이때 앞서 말했듯이 선악과 진리의 문제가 힘의 불균형성과 균형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봤을 때 아름다움 또한 이 점과 관련해서 논의해볼 수 있다. 그러나 원초적으로 아름다움은 힘의 불균형성 속에서도 그 느낌을 가질 수 있기에 좀더 광범위하다고 여겨진다. 힘의 불균형적 느낌을 정작 그 자신 안에서는 힘의 균형성에 대한 느낌으로 착각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미적 경험은 임의의 순간에 그 어떤 완결된 사태에 대한 감각을 불러오기 때문에 착각을 일으킬만큼 마비나 억제를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정된 완결정 그 자체 안에서만큼은 저혼자 조화롭다고 느낄 수 있다.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히틀러가 느끼는 희열이나 붉은 색을 보며 흥분하는 투우장의 황소들, 특정 사물이나 옷차림에 대한 집착들 등등 수천만가지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도 언급했듯이 아름다움에는 그 유형에 따른 여러 등급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어떤 특정의 아름다움을 선별하여 이것이 가장 고차원적이라고 확정할 순 없으나 적어도 여기에 선악 및 진리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도 그 깊이 있는 강도를 확보하고 있는 유형의 아름다움이라면 어느 정도 보편적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나의 경우는 바로 이러한 미적 경험을 <예수사건>에서 경험하고 있다.
 
예수사건, 그 이해되지 않는 현묘한 아름다움의 매력
 
예수사건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 블랙홀 같은 이끌림의 마력을 주는 황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음을 고백한다. 왜 예수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그토록 힘들고 낮고 천한 곳으로 뛰어들었는가. 애초 논리적으로도 내겐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넓은 문의 길로 가지 않고, 너무나 힘들고 좁은 문의 길로 다녔던 것인가. 정말이지 이해불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예수를 한편으로는 버렸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토록 그에게 끌리고 있단 말인가. 지극히 이해불가한 경험에서 나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든 현묘한 차원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뭐라 형언하기가 힘든 느낌의 경험이다. 예수에게는 블랙홀 같은 이끌림의 마력이 있다.
 
 
 
 
예수사건은 어떤 면에서 비극이면서도 실패한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그를 따르던 제자들마저도 그를 버렸을 정도니까. 그 사건은 스케일이 큰 궁정 왕들 간의 사건도 아니며, 어떤 면에서 너무나도 별볼일없는 조그마한 한 귀퉁이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물론 복음서는 그의 존재를 미화하기 위해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을 때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기록했지만, 그런 얘긴 복음서를 제외하면 다른 그 어디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예수사건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잊혀질 수도 있었던 그런 작디 작은 사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초라한 작은 사건에서 뿜어져나오는 에너지는 인류사를 통틀어 경천동지할 지경의 매력을 낳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있어 지극히 흥미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건은 비극이자 실패이면서도 동시에 희망이자 성공적인 부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사건은 세계 안의 온갖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해방시키는 표상적 모델로서도 당당히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의 비폭력적 희생이 힘의 균형적 사태를 도모하는 우주 진화의 흐름에 기여하는 대표사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현묘한 아름다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러한 매력에 이끌려 적어도 그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모방적 창조를 꿈꾸고자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힘겨운 점 역시 없잖아 있음도 고백한다. 이 긴장과 내적 번민의 갈등이 내게도 있지만 놀랍게도 예수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다. 아버지의 뜻과 나의 뜻이 부딪히기도 했던 것이다(누가 22:42). 그렇게 인간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적인 이 대비의 느낌이 예수사건에서는 양자가 절묘하게 녹아 있다고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도 예수사건은 내게 있어 세계 안에서 구현해볼 수 있는 최상의 진선미 모델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물론 지금도 세계 안에는 저마다의 다양한 진선미에 대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예수사건은 가장 안심하고 권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의 사건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이 경험이 불편할 수도 있고 피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서 있는 다양한 몸삶의 자리와 입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 자신이 민중일수록 곧 약자의 입장에 처해 있을수록 예수의 진면목을 알고자 할 경우 예수사건으로부터 뿜어져나오는 에너지는 더욱 크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야말로 예수의 진정한 파워를 경험하게 될 것으로 본다.
 
신의 원초적 본성이 세계 안의 인류사에 현실화될 경우 그것은 필연적으로 <약자우선성의 원리>로 드러난다고 생각되어진다. 이미 본인의 졸저인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약자우선성의 원리>란 불평등한 이 세계에 대해 관여하는 하나님의 습성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무의식적 습관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예수사건은 최상의 신적인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를 들여다보는 것과 자신의 입장을 가다듬는 작업은 결코 이분화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를 받아들이는 그 경험 자체가 그 존재에 있어선 새로운 재탄생의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수에 대한 모방적 창조 경험,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최고의 아름다움에 대한 최선의 경험이 아닐는지..
 
그리고 예수에 대한 모방적 창조 경험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으며 부단히 계속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매순간마다 진선미에 대한 최상의 경험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구현하는 일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나라화>되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천국이 이 땅에 임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 창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여 예수사건은 화산맥처럼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
오늘의 예수사건이란, 곧 진선미의 최종 이상적 형태인 <그 나라>를
부조리한 <이 나라>에서 끊임없이 실현하고자 하는 과정 그 자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레인보 (12-06-16 14:29)
 
'약자우선성'은 이 세계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습성이었군요... '아름다움'은 서로 목적이 조화되는 사태구요... 마음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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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1613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1325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1189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3874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1292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1208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1130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1079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153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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