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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글쓴이 : 미선 날 짜 : 12-08-17 10:57 조회(865)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b001/636 




 

구원이란 곧 몸삶 건강의 증진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은 신학이 아닌 몸학을 통해 보다 명확해질 수 있다. 나는 종교에서 말한 구원(혹은 해방)이라는 것도 결국은 몸삶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때 나 자신이 말하는 건강이 단순한 신체 건강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여러번 설명했었다. 이미 WTO에서 말하는 건강의 의미부터가 신체 건강에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회적 차원에까지 확장되어 있을 정도다. 우리의 몸 자체가 전체 세계와 관계적으로 얽혀 있기에 몸의 건강은 전체 세계의 해방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우리가 몸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 갇혀 있어선 안된다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영어의 ‘salvation’라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있어서도 그것이 건강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분명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그 어원이 ‘save’(구하다)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을 가라앉히다>라는 뜻의 ‘salve’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내가 보는 구원의 참뜻은 <건강함>health 혹은 <온전함>wholeness이라고 생각한다(데이비슨 뢰어, p.66. 참조). 또한 진보적인 종교 진영에서는 구원이라는 용어보다 해방이라는 단어를 더 즐겨쓰는데(생각컨대, 보수 기독교 진영은 구속을, 진보 기독교 진영은 자유를 좀 더 강조하려는 경향이 아닐까 싶음) 이 뜻에는 자유롭지 못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몸삶의 건강을 추구하는 의미와도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따라서 종교가 추구하는 구원(해방)은 결국 몸삶의 건강과 직결된다. 이때 몸삶의 건강이란 것은 몸얼 발달과 함께 간다는 사실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몸얼 발달은 내적인 측면을 언급한 것이며, 몸삶 건강은 외적인 측면을 언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얼 발달의 9단계를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신앙의 과정은 곧 몸얼 발달의 추구

현재 내 삶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위해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자문해보자. 나는 매순간의 선택과 판단을 그러한 궁극적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거의 90퍼센트 이상의 인류는 몸얼 5단계의 가족주의 삶 그 이상을 벗어나 있지 않다. 4단계에서는 주로 전체주의적인 이상의 실현을 꿈꾸며, 5단계에서는 소시민적인 소박한 행복을 꿈꾼다. 대체로 현재의 인류는 4-5단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에 세계 안에는 좀 더 다른 몸삶을 추구하는 특별한 소수들도 없잖아 있다. 어떤 점에서 이들은 행복한 가족주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가족 간의 일상을 중요시하는 몸얼 5단계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예컨대 함석헌의 삶은 이해하기가 힘들 수 있다. 물론 스스로 자기 능력의 한계를 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튼 실제로 함석헌 선생의 가족들은 그로 인해 평탄하진 못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함석헌 옹의 삶은 어떤 면에서 그 자신의 가족주의를 조선 민족과 세계 보편으로 보다 확장하려는 삶이었기도 하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분신한 결심은 당연히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그 자신의 가족을 넘어서 대한민국 역사와 사회 안에 놓인 깨닫지 못한 많은 이들이 자각하고 새로운 눈을 뜬 경험을 갖게 된다. 심지어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故 이소선 여사)조차도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태일의 비폭력적 희생사건은 가족주의를 훨씬 넘어서 있는 전체 해방의 흐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한 가지 오해가 없길 위해서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어떤 면에서는 나의 현재 몸얼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현재의 몸삶이 적어도 이전보다는 더 나은 몸삶의 차원을 추구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즉, 내가 현재 낮은 몸얼 수준에 있든 높은 몸얼 수준에 있든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적 노력이라는 점이다(나는 이 점을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그러한 현재적 노력이 평생토록 이어지는 삶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허락된 가능한의 최선의 삶인 것이다. 한울신[Gio, 본인이 기존의 ‘God(신 또는 하나님)’ 대신에 쓰는 단어]이 있다면 현실 존재들에게 어떤 완전의 차원보다 최선의 차원을 원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몸얼 발달(몸삶 건강)을 추구하는 차원이 보다 더 중요하다.
 
새로운 기독교는 새로운 형이상학에 기초되어야
 
나는 기독교든 불교든 결국은 몸얼 발달 혹은 생명살림의 흐름이라는 몸삶 건강을 추구하는 데에 그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각각의 시공간적 특질에 따른 문화적 차이들이 있듯이 기독교는 예수와 성서를,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과 역사적 경전들을 통해서 몸얼 발달을 추구하기에 비슷할 수는 없을 걸로 본다. 만일 종교가 서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하다고 할 경우는 그 안에 기반된 형이상학이 닮아 있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형이상학의 체계가 다를 경우라면 그에 기반된 종교 역시 서로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이원론에 기반된 종교와 비이원론에 기반된 종교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갖는다.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세계와 존재를 이해하는 그 형이상학적 인식이 다를 경우 그 의미가 완전히 서로 다른 종교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예컨대, 같은 감리교 목사임에도 김홍도와 이현주 목사의 차이가 그러하다. 그들은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같은 단어들을 쓰곤 하지만 실상은 전혀 서로 다른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인은 예전에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형이상학 계통도>로서의 종교 분류를 언급한 바 있다.

형이상학 계통도로 분류할 경우 같은 기독교라도 서로 이질적으로 다를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종교라고 하더라도 서로 닮은 느낌으로 소통할 수 있다. 우리는 형이상학의 차이가 그 문화의 차이 혹은 그 문명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서구 문명의 정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나 유교 형이상학이 조선 왕조의 이념으로 자리하면서 문화적 틀을 형성했다는 점 등등 이러한 면면들이 형이상학의 중요성을 잘 예증해주는 사례에 속한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적 무의식에 속한다.
 
통합사상가인 켄 윌버는 이를 매우 잘 설명한 바 있다. “철학적 무의식이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져서 더 이상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개인의 관찰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가정, 개인적이지만 노출되지 않은 철학적 패러다임, 개인의 지적이고 근본적인 전제와 지도로 구성되어 있다.” (SC , 243)

만일 새로운 기독교에서 형이상학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대안적인 새로운 기독교 건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 방향을 혼동하거나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도 좋다. 그것은 기초 터를 놓는 작업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나 자신은 보다 명료하게 해두고자 하여 신학이 아닌 몸학을 주창하는 것이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가 낡은 형이상학이 아닌 새로운 형이상학에 기반된 것임을 좀 더 분명하게 표기해두고자 하는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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