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47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47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문서자료실
이미지자료실
동영상자료실
추천사이트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332
어제 720
최대 10,145
전체 2,768,524



    제 목 :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강추)    
  글쓴이 : 돈큐빗 날 짜 : 06-10-07 02:21 조회(9391)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g001/15 
  LINK 1 : http://historicaljesus.co.kr (1713)
  LINK 2 : http://www.doncupitt.com (3829)




미국의 스퐁만큼이나 매우 솔직하게 글을 토해내는 유럽의 돈큐빗의 글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스퐁까지도 넘어서고자 한다. 돈큐빗은 현재 유럽의 상황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만큼 매우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오늘날의 현대 기독교에 대해 까발리고 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어차피 나 자신이 생각하고자 하는 바와도 현대의 기독교를 보는 시각에 있어선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의 입장이 돈큐빗과 아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의 형이상학관이나 자유주의 신학 견해 등등 몇 가지들은 나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차이가 있다. 즉, 구체적인 대안에선 차이가 있긴 하다. 적어도 돈큐빗의 입장은 형이상학 실재론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볼 만큼 초월성이 아닌 내재성의 원리에 따른 종교를 얘기한다. 그만큼 그의 종교관은 모든 초월성을 거세시킨 내재성의 삶에다 단지 '종교'라는 언표를 붙이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해도, 내가 보기에 그다지 무리한 비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만일 그가 또다른 형이상학자 화이트헤드를 온전히 알았다면(서구에선 난해한 철학자로만 알려져 있기에), 그러한 주장이 나왔을까를 생각해본다. 그의 주장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유동적인 다원주의 흐름에 멈춰있는 걸로 보이는데, 화이트헤드는 이미 이를 넘어서고 있을 뿐더러 <형이상학 실재론자>이자 철저하게 <지금여기>를 강조하는 현실론자이면서 동시에 신을 말하는 유신론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말의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돈큐빗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나라하고도 솔직하게 글을 쓰는 데 있어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본인의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해도 보다 큰 합의점들에 비하면 그러한 것은 매우 사소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재의 기독교가 그만큼이나 절실하게 이천 년 역사가 왕창 통째로 뒤집어져야 할 정도로 새로운 기독교로 번혁되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기선 개혁(reformation)이란 말을 썼지만, 개인적으로는 변혁(transformation)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될만큼 좋아한다. 
 
가끔 해외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스퐁이나 고든 린치 혹은 이러한 돈큐빗 같은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꼭 해외에서 활동하는 우리 세기연 사람들을 만나는 느낌이 들 정도다..ㅎㅎ^^;; 어쨌든 이번에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조만간에 출간할 돈큐빗의 책으로 보이며, 아래의 글은 그 가운데서 몇 부분씩 발췌한 글이다. 번역은 김준우 선생님이 하셨다. 꼭 필독을 권하고 싶다. 물론 출간하면 꼭 사서 두고두고 곱씹어 읽어보면 더욱 좋을 듯~!

 
(*긴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결코 시간낭비의 글은 아니라고 보며,
오히려 청년들과 함께 세미나 내용으로서 서로 나눠봐도 좋을 듯 싶다)

.......................................................................
 
 
 
 
  
돈 큐빗,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김준우 역 
 
 
 
서론
 

오늘날 교회들은 사라져가고 있다. 대다수 통계에 의하면, 적어도 유럽에서는 남아 있는 교회들이 매 십 년마다 1/4씩 사라지며, 한 세대마다 절반씩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감소의 주된 이유는 기독교의 중요한 믿음들의 객관적 진리성에 관한 일반 대중들의 확신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여 기독교 교리의 진리성에 대한 정당하고도 설득력 있는 이성적 논증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솔직히 믿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논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더 이상 기독교 형이상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가? 첫째는, 하느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인간 영혼의 존재, 도덕적 자유, 불멸성에 관한 논증처럼, 신앙에 관한 전통적인 철학적 토대가 모두 무너졌기 때문이다. 즉 고대의 기독교 자연철학은 근대 자연과학 세계관으로 대치되었고, 인간의 경험세계를 성과 속이라는 두 개의 큰 범주로 나누는 것과 같은, 종교에 관한 전통적 전제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더 이상 옛날 방식의 전통지향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의 삶이 교회와 성서가 가르쳐온 계시된 진리라는 고정된 틀에 의해 항상 짜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아직도 그 사회의 기본적 틀을 제공해주는 이슬람 종교의 영속성을 전반적으로 수용하는 토대 위에서 공개적인 토론이 행해진다. 그 정도로, 이슬람 세계는 오늘날도 하나의 거대한 지역적이며 문화적인 사실(fact)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Christendom)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백 년 혹은 이백 년에 걸쳐, 성서비평학은 성서를 종교적 진리에 대한 공적 표준으로 인정해온 낡은 권위를 부식시켜왔다. 우리는 더 이상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하나의 음성만을 듣지 않는다. 단지 인간들의 서로 다른 아우성 소리들을 듣게 될 뿐이다.
 
이렇듯 커져 가는 난관들에 봉착하여, 대다수 형태의 기독교는 19세기 이래로 점진적으로 그들의 시각을 낮추어, 전통주의, 권위주의, 혹은 "신앙"이란 사람들이 무엇이든 믿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격증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로 후퇴하였다. 그 결과, 설교와 기독교 저작들은 일반 대중들의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을 잃어버렸고, 점점 하나의 소종파(a cult) 안에서만 통용되는 은어처럼 들리게 되었다. 불가피하게도, 교회는 일반 대중들로부터의 존경심과 자부심을 지속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영국 성공회만큼 이러한 현대의 발전과정이 하나의 재난으로 나타난 교회는 없을 것이다. 1845년에 존 헨리 뉴만(John Henry Newman)이 성공회를 떠나 로마 가톨릭으로 옮겨갈 때만 해도, 그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더 작은 교단으로 옮겨가는 셈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영국 성공회는, 사회적으로나 지성적인  위상에 있어, 기독교 세계 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종교개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교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목청을 높이는 상황에서, 어떠한 형태의 몰이성(irrationality)도 참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반면에, 이성적으로 기독교를 해석하며 변호하기를 시도하는 수정주의자들(revisionists)은 불행하게도 곧바로 영원한 사회적 추방상태에 처해질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적 종교개혁이란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물 건너 간 것처럼 간주된다. 아랍세계에서 이슬람 교리는 아직도 모든 것이 거기에 종속되는 일종의 권위적인 신적 이성의 질서(Order of Reason)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주적 서방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난날의 강력한 형이상학적, 종교적 의미를 지닌 신적 이성의 질서(Order of Reason)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미국에서 헌법이 그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체로, 현대 서방세계에서는 누가 권력을 장악하든 간에, 여전히 권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단지 기술문명적이며 관료적인 합리성, 즉 효율성에 대한 믿음(belief in efficiency)뿐이다. 현대인은 유동적이며 다원주의적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구세대의 강력한 신적 이성을 숭상하는 이성주의자(Rationalist)가 아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저 바깥에 존재하는 진리(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 - 역주), 그래서 누군가 듣기를 기다리고 있는 진리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나는 왜 기독교의 합리적 개혁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가? 답을 하자면, 나는 결코 기독교가 그 옛날 유럽에서 가졌던 대중적 지위를, 혹은 아랍 세계에서 이슬람 종교가 현재 갖고 있는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혹은 그런 지위를 다시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 나의 기독교 개혁은 기독교가 일반 대중들에게 그 어떤 형태의 공적인 권위를 지닌 초진리(supertruths)를 내놓는 듯이 행세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교조주의를 넘어선 탈교조적인(post-dogmatic)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철저한 개혁으로 그 틀을 새롭게 바꾼 기독교 신앙고백과 실천이 교조 이후(after dogma), 교회 이후(after the Church)의 시대를 사는 현대의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시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적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전체주의적인 요구를 하는 이데올로기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며,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가 단지 하나의 참된(true) 삶의 방식--왜냐하면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포기하기 때문에--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한다. 그 참된 삶의 방식은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참될 뿐만 아니라, 현대세계에 대해서도 참된 것이며,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우리의 삶에도 참된 것이다.
 
말이 난 김에, 우리가 도그마를 포기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어떤 계시된 진리(revealed truth)라는 생각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모든 형태의 기독교란 가장 오랜 형태로부터 최신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결국 역사가들이 이해하듯이 단순히 인간의 문화적 산물(human cultural formations)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을 되풀이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정통"이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확장하는 방법으로 고안한 하나의 신화다. 실제로, 원래의 순수한 기독교의 본질이란 것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즉 여러 세기를 걸쳐 내려오면서 오염되고, 그래서 오늘날 회복될 필요가 있는 기독교 원래의 순수한 본질이란 것은 없다.)
 
따라서 내가 주장하는 개혁된 기독교가 좀더 순수하고 좀더 진정하며 좀더 원래적인 기독교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과거는 결코 실제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 규범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술을 판단하듯 순전히 주관적이며 인간적으로 확립된 기준에 의해서 종교를 판단해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비록 종교적 진리에 대한 보편적인 평가 기준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기독교(church Christianity)는 더 이상 그 스스로가 입증할 수도 없는 엄청나게 큰 주장들을 너무 많이 쏟아내고 있으며, 분명히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으며, 단지 하나의 종교로서도 더 이상 잘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별로 생산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기독교는 더 이상 중요한 건축물이나 예술작품, 혹은 문서를 생산해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인생들을 산출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 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교회의 기독교는 여전히 인도주의적인 윤리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며, 교회가 도덕적 솔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처럼 가치 있는 일조차 중단되었으며, 최근에는 교회가 교회 밖의 이질적 사람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도덕주의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통해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으려 한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기독교는 끝장이 났다. 교회의 기독교는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개혁하고 싶다 하더라도 개혁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기독교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충분한 의지가 없으며 에너지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전통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우리들은 교회에 대해 염려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종교생활, 즉 진정으로 진실하며, 살아낼 수 있으며, 생산적인 새로운 형태의 종교생활을 발전시키는 작업이 최선책이다. 그 새로운 형태의 종교생활을 기독교적인 생활이라고 부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이, 그 이름을 가지고 장사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나쁘게 변색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기독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기독교라는 옛 이름에 대해 나만의 어떤 개인적 감정을 갖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종교개혁을 시도하도록 자극하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는 역사적 정통 기독교가 원래의 예수(original Jesus)의 의미와 메시지에 대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잘못된 해석에 근거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 이유들 때문에, 원래 유대인 교사였던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 종교(the kingdom religion)는 교회 종교(church religion)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교회 종교란 오늘날 정교한 성례전을 통해 중보되고, 약속되었으나 연기된 구원, 곧 성육하신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발전한 종교이다. 예수, 즉 긴박한 세상의 종말과 인도주의, 그리고 일종의 허무주의까지를 독보적으로 결합시킨 예수는 그에 대해서 잘못 읽어낸 오늘날의 전통적인 기독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래서 당분간 나는 기독교라는 오래된 상표를 붙잡으려고 한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이 기독교를 시작했던 한 유대인 교사에 대해 집착하려 한다. 이제 예수가 말할 시간이다. 즉 그가 마침내 다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교회의 기독교가 죽어 가는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가 신뢰할만하고 매력적인 종교생활의 그림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종교로서도 너무 천박하다. 교회에 다니고, 올바른 교리를 믿고, 기도하고, 헌금 생활하고, 그밖에 뭐가 있는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기독교 윤리는 꽤 존경받았으며, 기독교인들은 중요한 인도주의적 자선활동을 시작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윤리에 대한 대중들의 평판은 망가졌으며, 너무나 많은 불행과 해악의 증거들이 교회 내에 존재한다. 그동안 너무 많은 아동 성추행, 난폭한 여성혐오, 동성애 혐오, 그리고 새로운 기술과 과학의 발전, 특별히 의학과 유전공학에 대한 반사적인 두려움과 적대감이 교회 내에 똬리를 틀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너무 심한 충돌도 벌어졌다. 공공기관이 교회 대표들을 그들의 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는 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같은 작가가 기독교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삶에 대해 말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져야 했다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교회들과 종교는 서로가 분리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비록 교회와 기독교 교리의 신뢰성을 회복하는 일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독교적인 종교생활의 형태를 이해가능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제시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장  기독교를 개혁하기
 
원시교회 제1 세대와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ds, 퀘이커) 같은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교회 기독교는 지금까지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기독교 형태일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비교회적 형태(non-ecclesiastical forms)에 관해, 또한 옛 신앙의 개혁 및 갱신의 가능성에 관한 토론은 심지어 이처럼 늦은 시간에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금 개혁이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만이 아니고, 오히려 기독교 신앙 그 자체라고 하는 이 주장은 종교에 대한 사고가 비판적이기보다는 전통적인 사람들에게는 물론 거슬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원과 그 이후 초대교회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누구나 기독교가 지금껏 발전해온 역사가 반드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익숙해 있다. 즉 최초의 기독교는 서로 다른 사상과 학파들의 난장판이었다. 결국 지배적인 어떤 믿음이 나타나게 되자, 스스로를 정통 혹은 적법으로 선언하고, 다른 입장들은 이단으로 선언했다. 그 지배적인 믿음은 심지어 자기를 원형(original)이라고까지 선언했다. 그러나 신약성서 자체는 유일한 원형 혹은 진정한 신앙은 원래 없었음(no single original and authentic faith)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발전 과정은 아마도 다른 길을 걸어왔을 수도 있으며, 그랬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중세 말기에 이미 하나의 종교개혁이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근본적인 문화적 대격변 속에서도 또 다른 종교개혁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가? 최소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새로운 종교개혁의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은 그러한 생각을 다시 하지 않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 즉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복음이, 인간의 산물이며 원래의 예수 및 그의 메시지와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을 거부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복음은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으며, 더 좋고, 참된, 보다 적절한 메시지로 대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내가 이미 다른 데서 지적했듯이), 우리가 오늘날 통과하고 있는 문화적 변화는 너무 크기 때문에 종교적 사고에 있어 근본적 혁명이 요구된다. 전통적인 종교적 및 철학적 사고에 깔려 있던 뿌리깊은 전제들은 오래 전에 이미 깨졌으며, 이제는 포기해야만 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에서 최선의 대응책은 기독교를 그 역사적 발전과정의 다음 (마지막) 단계로 밀어 부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적 언어로 말하자면, '교회의 신학'(ecclesiastical theology)으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신학'(kingdom theology)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교회의 시대 다음에는 마침내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 혹은 그리스도의 왕국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진 새로운 메시아 시대의 도래로 이어질 것으로 믿어져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중보된(mediated) 형태의 종교(교회의 사제들이나 성례전을 통해 중보된 형태 - 역주)로부터, 사람들이 항상 이생에서가 아니면, 최소한 사후에라도 가능하리라 믿어오면서 희망해온 직접적(immediate) 형태의 종교(그리스도를 직접 마주 대면하는 형태 - 역주)로의 변화를 뜻한다.

그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발전을 점화시켰던 나사렛 예수는 지금여기에서의 직접적 종교(immediate religion)의 가능성을 설교했다. 그는 "하느님 나라"라는 새롭고 기이한 이름으로 이 종교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그 시대의 중보된 종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 곧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다. 그러나 그는 그 하느님 나라가 분명히 확립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사후 하느님 나라는 지연되는 것처럼 보였다. 교회 및 교회의 가르침은 그 후 점차 일종의 미봉책, 곧 하느님 나라의 약속과 그 성취 사이의 난처한 중간기(interim)를 때우는 하나의 임시 조직이 되었다. 교회의 사명은 마침내 하느님 나라가 임하는 그 때를 위해 깨어 준비하기를 원하는 깨어 있는 성도들을 모으고, 하나의 조직체로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이후 계속된 교회사는 셋 혹은 넷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완전한 선포가 이상하게 지체되는 것에 대한 일련의 이유들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의 유대교 신앙에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종말의 때에 일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했으며, 다른 이들도 이미 예수와 함께 부활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마태 27:51-3).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즉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이들, 곧 신앙의 눈에 의해서만 보여진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세상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 예수는 세상에 계시지 않고, 재림은 지연되는 것인가? 교회는 예수가 현재 무대 뒤편에 있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느님은 예수를 그 우편 보좌에 앉히셨다. 그러나 그분의 부재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분은 머지않아 메시아(Messiah)로 그리고 심판주(Judge)로 이 땅에 오실 것이다(행 1:11, 3:17-21).

이처럼 원시교회는 승천하신 주님 그리스도를 우러러보며, 그분이 곧 다시 오시기를 요청하며 예배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원시적 단계에서 기독교 도그마는 현재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 숨겨져 있는 그 어떤 것이 조만간 이 세계에 나타날 것에 대한 믿음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최초의 도그마가 취했던 형태이다. 즉 그것은 종말론적 희망의 표현이었다.

그 다음 둘째 단계는 속사도(續使徒, sub-apostolic) 시대로서, 이 시대에 교회는 복합적인 중보종교(mediated religion)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 때 믿음 교리들의 체계화, 그리고 성례전들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그런 예배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소속되고, 그분의 도래를 기다리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사도들 및 그 조력자들 가운데 교회의 지배자들인 교직계급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교회생활의 모든 부문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들 자신이 "교회"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주교들의 회의가 곧 모든 교회의 공의회가 되었다.

셋째 단계에서는, 완전히 틀을 갖춘 교회 기독교, 가톨릭 교회(Catholicism)가 2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나라는 너무 멀리 미래로 연기되어 역사의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교회는 더 이상 잠정적인 조직체가 아니고 영구적인 사실이 되었다. 시간이 종말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손상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는 그 자체를 오류가 없는(infallible) 것으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 및 새로운 그의 나라의 부재에 대한 변증으로 시작되었던 기독교 교리들은 이제 천당으로 들어가는 개별 입장권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가는 것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죽음을 대비하는 일에 소모되었다. 교회 안에서, 성례의 은총은 엄한 규정을 통해 저 천당으로 한꺼번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매우 관료적인 구원의 장치로서 베풀어졌다. 누구나 인생에서의 최대 관심은 그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어야만 했으며, 그 구원의 유일한 열쇠는 교회가 갖고 있었다. 이 세계는 그와 같은 구원을 입증하는 터전 이외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윤리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 되었고, 오직 죄를 피하고 은총 아래서 죽는 것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

넷째 단계, 곧 중세 후기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몇몇 사람들은 중보된 종교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거대하고 '전체적인' 제도, 괴물스런 우상이 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구원 장치인 중보종교의 체계는 더 이상 그 자신 너머를 제시하지 못했다. 반대로, 교회의 판결권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하였다. 한때 신속한 재림의 약속과 그 부재에 대한 한시적 설명 체계였던 교회의 교리는 이제 무오한 교사들에 의해 보증된 형이상학적 도그마가 되었다. 일련의 올바른 채널로서의 교회의 중보 체계는 이제 결과적으로 그 자체가 종교적 대상이 되었다. 이제 그 전체 체계가 실제로 그 너머의 참된 초월적 대상을 가리키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결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다. 신자들은 다만 교황과 신조, 그리고 교회와 성례를 믿었다. 즉 교회를 통한 기계적 구원에 대한 지적이며 도덕적 예속은 보통 신자들에게는 그들의 신앙을 '신앙적'이고 참된 종교로 생각하는 일종의 안전의식을 부여해 주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실제로 특정한 교리체계를 믿으며, 특정한 '순종'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이런 점에서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신비가들, 저항가들, 그리고 반역적 신학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방식에 대해서는 기술할 필요는 없다. 19세기말에 신 죽음(the Death of God)의 문제 제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 죽음의 문제 제기로 인해, 그 이후 관심의 초점을 영속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세상, 곧 인간 세상, 생명 세상으로 돌이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저 세상적인 중보종교(otherworldly and mediated religion)의 거대한 장치는 갑자기 공허하고 진부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도대체 그 따위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그런 종교를 참아왔는가? 왜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참된 행복은 죽음 저 너머에서 시작될 뿐이라는 가르침에 설득 당해, 삶을 위한 우리의 감정이 독살되도록 만들었던가?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히 니체(Nietzsche)라는 이름과 19세기말의 서구 문화가 그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순간을 암시한다. 당시까지 사람들을 항상 인도해왔던 일련의 깊은 철학적, 종교적 전제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형이상학의 종말,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너머에 더 참된 세계가 있다는 믿음이 끝장나자, 사람들은 먼 훗날에 대한 생각을 단념하고 현재의 삶 속에 담겨 있는 구체성과 잠정성에 그들의 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많은 철학과 종교사상들이 후에 실존철학이라 불려진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전에 '하느님'에게 바쳐졌던 헌신이 점차적으로 새로운 대상, 즉 처음에는 '실존' 그리고 그 이후에는 '삶'이라는 주제에 바쳐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는 오늘날의 종교개혁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 지금 교회 신학을 포기하고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오랫동안 약속되어온 그 다음 단계, 곧 하느님 나라에로 기독교 운동이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기독교 신앙의 초창기 시작과 그 초기 발전과정의 흥미진진하고 복합적인 이야기를 회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하느님 나라는 순전히 이 세상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윤리이며, 우리 자신을 삶과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식이다. 그것은 교회 시대 이후(post-ecclesiastical)의 것이자, 탈도그마적(post-dogmatic)인 것이다. 우리는 이 새 시대를 위해 기도해왔으며, 이제 그 시대가 온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순수한 종교적 직접성이다. 다른 많은 종교 체제와 같이 이스라엘에서도, 지상에서의 하느님의 지배를 대신하는 왕에 의한(through) 지배와 하느님에 의한 직접적 지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느님이 직접 다스릴 때--이상적 과거와 이상적 미래에서처럼--는,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아무런 내적 갈등 없이 하느님의 법에 순종하도록, 하느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시고 그들의 마음 속에 당신의 영을 넣어 주셨다. 놀라운 것은 자기 표현과 도덕적 행위는 항상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직접 종교(immediate religion)는 하느님에 대해 상당히 실재론적(semi-realist)이다. 즉 하느님은 믿는 자들과 아주 가까이에 있으며, 믿는 자들과 함께 거하시며,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 집중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혹은 '안에'(entos)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마음에 그렸던 바로 그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는 '은밀하게 자라난다.' 그것은 우리 앞에 어느 날 나타난다. 하느님은 더 이상 믿는 이들 옆에 타자로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완전히 내재화되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매우 놀라운 것은 바로 하느님의 내재화 및 숨어 계심이다. 하느님은 너무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 종교적 세계는 이 세상의 삶과 일치하며, 만물은 거룩하게 된다.

하느님 나라 종교에서 옛 시대의 객체적 하느님은 사라졌음을 강조하는 또 다른 대안적 방식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zer)가 취했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칸트의 제자였고, 신에 대해 비실재론자(non-realist, 신이 저 밖에 어딘가에 객체적으로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 - 역주)였다. 슈바이처는 우리가 역사에 진실해야 하며,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초자연적 행위에 의해 도래할 것을 기대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가 그와 같은 하느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기대하는 세계관을 지지하지 않으며, 그 대신 비실재론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여, 하느님은 도덕적 요구를 인격화한 존재(God as personifying moral requirement)로 이해한다. 이 경우,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우리의 도덕적 분투, 곧 우리에게 달려 있다. 슈바이처의 비실재론적 신 이해는 그로 하여금 역사적 예수에 관해 진실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세계관에 대해서도 진실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 이해는 일반 교인들, 즉 신학적 실재론(하느님이 저 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주장 - 역주) 및 그리스도의 중보(mediation)에 열광하는 일반 교인들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초월적 영역에서 신자들을 좌지우지하며 지배하는 신비하고, 엄격한, 주권적 타자로 투사하였다. 하느님과 신자 사이의 이 무한한 질적 차이는 둘 사이의 행복한 종교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그 간격을 메워 줄 어떤 중보자(a Mediator)를 필요로 한다.
 
교회 기독교에서는 승천하신 예수가 바로 그 중보자가 되며, 방대한 전체 중보체제(the whole vast system of mediation), 곧 교회, 목회자, 그리고 성서와 교리는 모두 그분 승천하신 예수에게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우리는 왜 성육하신 하느님의 아들, 곧 중보자가 성부 하느님과 동등하고 성부 하느님과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며, 동시에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신앙조항이 성립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그 중보 체제의 종교적 효율성을 보장한다. 게다가 이 거대한 중보 체제 자체가 지고의 종교적 목표가 되는 길을 열어놓았다. 만약 하느님이 개관적이고, 무한하며, 이해할 수 없는 분이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면, 예수는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유일한 신이 된다. 그리고 성자 예수가 막강한 종교적 중보 장치, 곧 그분이 토대와 보증이 되시는 교회라는 형태 안에서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면, 교회를 향한 일종의 우상숭배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마침내 드러났다. 교회 기독교는 마침내 마지막 거대한 형태의 우상숭배가 되었다. 최소한 위대한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슬프게도 그들이 그 우상숭배를 완전히 극복해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그 쇠퇴기에 놓인 교회 기독교가 왜 그렇게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지를 보여준다. 공관복음서 안에서 우리는 원래의 예수, 곧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로서 우리에게 종교적 직접성을 곧바로 선택하고 살아내라고 촉구하는 그의 거친 음성을 아직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또한 매우 다른 신학을 가르치는 문서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다른 신학은 새롭게 예수를 핵으로 삼아 거대한 종교적 중보 체제를 고안해낼 신학이었다. 따라서 예수는 종교적 중보 체제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다 죽어갔지만, 그의 비판과 반대는 이제 새로운 종교적 중보 체제의 기초로 둔갑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오직 한 사람만의 기독교인이 있었으며,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옳다.

교회 기독교가 얼마나 뿌리깊게 예수를 오해하고, 잘못 표현해왔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만약 요한복음이 신약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가 가르친 종교와 그분을 기초로 해서 만든 종교 사이의 모순을 아직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19세기에, 스트라우스(D. F. Strauss) 같은 학자들을 통해,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사이의 엄청난 간격이 밝혀짐으로써 기독교가 그 초기 발전단계에서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즉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나의 인간 교사(human teacher)로서 혹시 메시아일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그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땅에 온 성육화된 신적 존재(an incarnate divine being)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교회가 예배해왔던 예수는 바로 이 요한복음의 예수였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원래의 예수가 선포했던 훨씬 더 높은 단계의 종교로 되돌아갈 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마침내 직접적 종교(immediate religion)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대보다 2000년 앞을 미리 살았던 어떤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2000년이라는 세월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또한 그의 추종자들과 동지들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야만 하기에는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4장  직접 종교의 도래
 
나는 이제까지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하려는 전체 주제 가운데 하나를 설명했다. 즉, 우리는 개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나 신조의 개혁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의 개혁이다. 왜냐하면, 이 근대 후기에 지금까지 거의 모든 종교적 철학적 사상의 근저에 깊이 깔려 있는 많은 대다수 전제들의 몰락을 우리는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적한 사실은 이것이다. 즉 2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전된 "가톨릭' 교회 기독교는 거룩함과 불결함에 관한 고대 사상의 복귀에 의해 깊이 영향 받았다는 점이다. 이 사상은 기독교를 두드러지게 독신자의 종교(celibate religion)로 만들어, 그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 절기들, 장소들에 대해 거룩의 등급을 정교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의 정상적인 재생산 구조에 대해 종교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게끔 했으며, 아직도 계속해서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사상은 사람들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이러한 사상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정도를 생각하면 충격적이다.
 
당신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 거룩한 사람의 유형은 아직도 '세상'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삶의 현실에 전적으로 개입하기를 움츠리며 뒷걸음치는 어떤 염려에 싸여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섞여 들어가는 것은 더렵혀질 위험이 많다. 이런 사상은 기독교 예술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쳐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나 그 어머니가 정상적인 인간의 생활을 했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기독교 예술에서 마리아는 궁극적으로, 아무리 짓밟혀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사촌인 엘리자벳 외에는 그 어떤 어른도 맨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마리아는 단지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특별히 그 아들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산다.
 
예수 역시 이상하게 왜곡되기는 마찬가지다. 예술에 나타난 예수는 경건하고, 수동적이며, 조용한 예수인데, 이런 모습은 상당히 논쟁적이고 문제아였던 공관복음서의 예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조용히 회중석에 앉아 있는 예수를 상상할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종려주일 전날 밤만이 유일한 예외이다. 예수는 성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성전은 이미 저물고 있으며 텅 비어가고 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마가 2:2). 그는 당황해서 떠났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전날의 미진한 결말을 보충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가 이전에 성전에 들어갔을 때 어떤 중대한 문제도 일으킬 수 없었다는 사실에 당황한 나머지 그 이야기를 삭제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예수의 격렬함과 논쟁적 특성은 기독교 예술에 나타나지 않았다. 즉 예술에서는 요한복음에서처럼, 그의 갈등에 대한 강한 열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술 속에서 그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그 같은 열정을 나누지 않는다. 정말로 거룩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섞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섞여지는 것은 곧 오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은 분리되어야만 한다. 기독교 예술에서 예수는 거의 항상 뒤로 물러서 있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야단을 칠 듯하며 조금은 슬픈 표정이다. 그는 그렇게 처신해야만 했고, 또 그렇게 했지만, 그것을 즐기지는 못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의식적으로 세례요한과 같은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먹고 마시는 일을 즐긴다. 그래서 그의 비판자들은 그를 "먹기를 탐하고 술고래"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기독교 예술에서 그는 삶을 사랑하는 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실로, 기독교 예술은 전체적으로 삶을 긍정하기보다는, '근엄하며' 저 세상적이다. 공관복음서의 예수는 항상 기독교인들에게조차 너무 벅찬 인물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좀 더 내향적이고 '이상화'(理想化)된 기독교 예술상의 예수로 바꾸었다. 육신을 입은 하느님으로 생각하게 됨으로써 예수는 매우 심하게 축소되었다. 그것은 그분으로부터 모든 삶을 제거해버렸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거룩(the Holy)에 관한 옛 개념은 갑자기 무너지고, 불결에 관한 옛 개념, 특별히 월경과 출산이 제의적으로 불결을 초래한다는 개념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적극 폐기시켰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대체로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사람들에 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대상에 대해 신성한 경외감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특별한 삶의 영역으로서의 거룩함은 오늘날 관광산업에 의해 완전히 잠식되어, '유산'(遺産)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과거 속에 상실된 다른 나라이다. 우리는 거룩함의 뒷맛이라도 맛볼 요량으로 그것을 찾으면서, 과연 그처럼 위대하고 틀림없는 것, 그러나 동시에 아주 싫은 그 거룩함을 갑자기 잃어버리도록 만든 것이 도대체 어떤 부주의함 때문이었을 지를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은 거룩이 단순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거룩이 인간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어 흩어졌다. 소설이 신학을 대체한다. 즉 종교는 오늘날 결코 이차적인 구별되는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단순히 '삶'의 세계이다. 톨스토이가 그의 삶의 절정에 있었던 1860년대에 집필한 <전쟁과 평화>는 '삶'에 대한 새로운 종교적 감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초기 증언이다.
  
삶은 모든 것이다. 삶은 하느님이다. 만물은 변하며 앞뒤로 움직이는데, 그 운동이 바로 하느님이다. 삶이 있는 곳에 하느님에 관한 의식 가운데 환희가 있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거룩과 속된 영역 사이의 구분--한때 종교를 구성하는 요소였던 구분--이 최근에는 사라진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것과 더불어 종교의 다른 많은 기본적 특성들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첫째는, 가시적인 세계와 나란히 있는, 감추어진 초자연적 세상, 즉 영의 세계(spirit world)에 대한 개념이다. 영의 세계의 거주민들, 곧 하느님, 신들, 영들, 성인들은 각기 서로 다른 정도로, 이 가시적인 세상에서 사건들을 통제하는 매우 거룩하고 힘있는 존재들이다. 전통적 종교의 두 번째 기본 특성은 교리이다. 영의 세계 및 영들과 우리와의 관계에 관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믿음들이 인간에게 드러났으며, 전통에 의해 전수되었다. 그리고 전통적 종교의 세 번째 특성은 의식(ritual)이다. 우리는 예배가 필요하며, 영적 존재와의 타협이 필요이다. 영들과의 소통을 위한 올바른 상징적인 행동 언어는 신성한 전통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지금까지 종교의 주요업무는 신들이나 영들의 초자연적 세계와 관계된 것이다. 우리는 초자연적 세계에 관한 올바르고 권위 있게 입증된 교리적 믿음을 지녀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세계 문화 속에서 거룩은 더 이상 특별히 종교 영역에만 집중되지 않고, 삶의 세계 전체에 퍼져 있음을 발견한다. 많은 19세기 문필가들이 이러한 사태가 다가옴을 보았지만, 나는 다른 책에서 오직 지난 40년 어간에만 이것들이 모든 사람들의 삶의 경험과 일상 언어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구체화되었음을 논증한 바 있다. 그것의 도래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중보된 교회형태의 기독교의 종말을 가리킨다. 만일 그것들이 살아 남으려면, 신조와 제의는 매우 다른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통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적 종교의 새 시대가 이 땅 위에 오는 것을 설교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예수는 그것을 '하느님 나라'라고 불렀다. 그의 비유와 말씀 속에서 그의 메시지의 내용은 확실히 이 세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의 순교 이후에도 그 나라의 도래가 지연되는 것처럼 보였기에, 군대같이 규율에 가득찬 교회 기독교의 조직이 임시적으로 발전했다. 종국에는, 예수가 다시 돌아오고 그 나라가 마침내 이 땅에 도래할 것을 사람들은 소망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심연을 강조하고, 심지어 원래의 예수를 '기독교' 밖에 위치시킬 준비까지 함으로써, 예수의 하느님 나라 종교와 교회 기독교 사이의 대조를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복음서를 배우는 학생들은 예수가 자기 자신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참으로 그는 결코 교리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으로 선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공적 가르침에서는 최소한 자신이 개인적으로 메시아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초자연적 질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것이 없다. 그는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고, 교회의 목회사역을 위임하지도 않았고, 문자적으로 '성례전을 제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유대인 악령추방자이자 교사였으며, 하느님의 나라의 예언자이며, 중보종교에 대한 논쟁적 비판자였다.
 
그가 죽은 후, 그를 교회와 목회사역과 성례전과 교회중심적 신앙의 기초이자 설립자로 만들려는 교회의 시도는 무언가 다르고 흥미롭던 그의 메시지를 참담하리만치 모호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와 같이 원래의 예수를 모호하게 만드는 일은 요한복음서를 정경화함으로써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오늘날 전체 교회 구조가 쇠퇴해감에 따라, 예수가 마침내 다시 부각되고 더욱 명백하게 보여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종교적 삶은 도덕적 삶, 곧 '인도주의적 윤리'(humanitarian ethics)로서, 내가 '태양의 맹렬함' (solar fury)이라 부르는 자세, 그리고 어떤 이들은 종말론적 긴박성이라고 부르는 강렬한 자세로 살아낸 윤리였다.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마치 하루살이처럼 깨어나 날개를 말리고, 수액을 빨아들이고, 짝을 발견하고, 정열적인 짝짓기를 통해 알을 낳고 죽는 곤충들의 환희에 찬 열정을 지니고 살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으니, 그 일들을 맹렬한 기쁨을 가지고 서둘러 해내야만 한다.
 

앞에서 논의한 것들, 그리고 오늘날 다시금 우리가 물어야 할 주제와 관계된 또 다른 종교적 전제는 종교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들에 관한 관심이라는 전제이다. 영적인 영역은 신성하고 매우 권위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거기에 사는 존재들은 죽지 않고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다. 일상적인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에 상응하는 원형적인 상대(counterpart)를 영적인 세계에 가지고 있다. 경험적 세계 속에 있는 만물은 영적 세계로부터 창조되었고, 그곳에 터전을 갖고 있으며, 정당화되고 통제된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식하고, 그 세계와 더불어 잘 지내야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안녕에 결정적이다.
 
 종교는 이 영적 세계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그들을 잘 예배하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존재하는데, 예배는 그 영적 존재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상징적인 소통체계이다. 예배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신들, 혹은 영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특별한 형식들을 사용하는데, 그 특별한 형식들이란 그들이 우리에게 소통하기를 원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참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한, 예배는 하나의 지적이며 중요한 행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내재론자들(immanentist)의 사고방식은 많은 영역(역사, 생물, 언어, 등)에서 특별한 진보를 이루어 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가 이 세계를 지원하고 유지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생명'이란 다시금 그 어떤 외부의 존재가 있지 않은 연속체(outsideless continuum)가 되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대중 스타들을 숭배하며 그 팬들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 속에서 예배는 예배받는 자나 예배드리는 자 모두에게 그리 좋을 것이 없다. 우리는 예배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버릴 수 있을까? 예배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전적으로 자연적이며(즉 초자연적인 존재를 가정하지 않은 채 - 역주) 삶 중심적인 종교, 그러면서도 여전히 참된 종교로 남아 있는 그런 종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종교가 이제는 초자연적 영역과 우리 자신을 관계시키는 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을 '삶'에 관계시키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 번째 종교적 전제는 이것이다. 최근까지 거의 모든 종교들은 중보 체계였다. 당신을 하느님 혹은 신들과의 바른 관계에 진입시키기 위하여, 당신은 모든 적절한 통로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즉 올바른 성서를 읽어야 하고, 바른 신조를 믿어야 하고, 당신이 예배하는 거룩한 존재에 대해 바른 이름을 사용해야 하고, 바른 종교공동체에 가입해야 하고, 바른 교황(pontiff, 교황, 고위성직자의 원래 뜻은 "다리를 놓는 자"이다)의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등. 물론 이처럼 신적인 존재에 이르는 적절한 통로 혹은 길의 수나 그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신비주의, 혹은 카리스마적 은사나 종교적 열심, 황홀경 등을 통해 하느님에 다가가는 직접적인 길을 찾으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종교적 직접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쉬운 길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펄럭이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그것을 확고히 잡을 수 없으며, 우리가 죽은 후에라야 그러한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생에서 단순히 중보종교를 받아들이고, 그 정당성을 지지하는 신화들(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위임, 그리스도의 성만찬 제정 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견해에 안주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중보종교의 정교한 기계적 구조가 얼마나 낡아빠지고 억압적인 것인지, 또 그 배타적 선언들이 얼마나 단순무지한 것들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암송되는, 얼마나 다양한 그 기원에 관한 신화나 제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지에 대해 인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이 점에 대해서는 논증할 필요조차 없다. 그것들은 더 이상 어떤 방식으로도 믿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 없이 살아갈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제는 폐기해야 할 두세 가지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다. 즉, 이 세상의 실재와 그 이해가능한 질서가 우리 바깥에, 그리고 지금 여기를 넘어선 한 점으로부터 결정된다는 믿음이다.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표상된 만물의 실재는 지금 여기 안에서, 그 만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 안에 존재한다는 사상에 점차적으로 익숙해지도록 했다. 따라서 실재하는 세계는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발전해 가는 세계이다. 그 요점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기에 지난 나의 세대에게 그것이 이해되도록 가르치는 일에 실패한 지난 이십 년을 돌아보면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다. 나는 단지 실재화(Real-ization)는 지금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를 통해, 우리를 위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적으로 우리에게 중보된 실재, 그리고 우리를 위해 미리 정해진 실재라는 식의 매우 오래된 실재 개념의 종말에 다다르게 되었으며, 마침내 직접성의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저 너머 초월적 세계를 바라보라는 요구는 없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부이다. 모든 것은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대로 형성되어 존재한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만들어내기 나름이다. 여기 있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에게 실재를 매개해주는 그 어떤 영적 세상도 초월적 실체도 없다. 우리가 이 세계의 질서를 잡는다. 현실화는 역사적 과정이며, 우리가 그 주역이다. 그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일어난다. 이것이 마침내 우리가 탈형이상학적인 직접성의 시대(post-metaphysical age of immediacy)에 이르러, 종교 역시 직접적(immediate)인 것이 되어야 하고, 철커덕거리는 낡은 믿음에 근거한 중보종교, 교회중심적 종교가 이제는 마침내 직접성, 곧 예수가 설교하기는 했지만 살아 생전에 보지 못했던 '하느님 나라'(Kingdom) 형태의 종교에 그 자리를 넘겨주어야만 하는 시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철학적 전제는 객관적 진리 혹은 진리들에 대한 옛 믿음으로서, 이 진리는 세대를 거쳐 어떠한 변화도 없이 계승된 것이다. 합리론자나 도덕론자 모두 객관적 무시간적(흔히 '전통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깊이 매달려왔었다. 가톨릭은 움직일 수 없는 도그마에 대해, 개신교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그에게 속해 있는 복음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완성적인 진리가 그들이 곧추서기 위해 붙잡는 단단한 봉이나 난간처럼 그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진리의 본질과 위상을 오해한 것이다. 진리의 자리는 현실화(Real-ization, 실현)의 자리, 곧 우리 안에서 궁극적 존재가 언어화되며,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자리여야만 한다. 진리의 자리는 언어만의 자리도 존재만의 자리도 아니라, 둘이 만나는 자리, 항상 현재이며 항상 변화하는 자리이다. 진리는 살아내야만 한다. 즉 진리는 항상 다시 만들어져야 하고, 다시 상상되어야 하고, 다시 생각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형태의 중보종교, 교조적 진리에 관한 믿음이 이제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직접성, 즉 삶 속에서의 진리에 그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살아 있는 진리는 과정 속에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철학적 전제는 조금 예민한 문제로서 본질주의(essentialism)인데, 이것은 사물에 고정되고 객관적이며 그 사물의 정의를 내려주는 본질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종교, 특히 종교적 논쟁에서 큰 역할을 했던 믿음이다.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불안을 일으켰다. 즉 그들은 무엇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기독교인이라 부를 수 있는 믿는 자란 누구이며, 믿지 않는 자란 누구인지를 물었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반드시 선이 그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그 선의 어느 편에 서 있는가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이런 종류의 모든 논쟁은 단순한 정치적 논쟁이며, 점수따기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단어에 어떤 고정된 강제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듯이, 그 어떤 참된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진행되는 방식처럼, 의미와 본질은 항상 변하는 것이다. 단어들은 우리가 현재 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뜻하듯이, 사물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 존재할 따름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중요한 종교적 변화의 시기란 물론 누가 어떤 깃발을 휘날리는가 대해 당파적 논쟁의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것에 의해 잘못 인도되거나 산만해지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우리가 본질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기 전까지는, 직접종교에 다다를 수도 없으며,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종교가 중보체제가 되는 한, 사람들은 누구의 중보체계가 본래적이며 진정한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종교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완전히 친숙하며 이름조차 필요 없는 곳에 도달하게 된다. 이름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더 이상 무언가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이 책이 <기독교 개혁하기>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사람들은 내가 서술하는 하느님 나라 종교가 '기독교가 아닌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비난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사라진 전제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5장  하느님 나라 종교
 
 
개혁된 기독교의 신학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이미 앞에서 기독교가 그 개혁의 과정에서 교회의 시대, 그 아동기가 끝나고 있으며, 이제는 완전한 성인의 형태, 곧 예수가 원래 살았고, 설교했고,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던 '하느님 나라 종교'(kingdom religion)로 옮겨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일상의 언어 속에 하느님 나라는 온다>(Kingdom Come in Everyday Speech)라는 책에서, 나는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왔던 교회적 형태의 신학과 새로운 하느님 나라 신학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교회 신학과 하느님 나라 신학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에 관한 간단한 점검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 신학에서는 지금 여기의 세계 전체가 더 위대하고 더 선한 저 너머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하느님 나라 신학에서는 저 너머의 세계가 전혀 없다.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다다르고, 승리하며, 쉰다.
 

다른 모든 차이점들은 이 첫째와 연관되어 있다. 둘째로, 교회 신학에서는 하느님이 초월적이며 알 수 없는, 전적 타자인 반면, 하느님 나라 신학에서는 하느님이 전적으로 내재적이다. 셋째로, 교회 종교는 성서와 신조, 의식과 사제들의 권위에 의해 중보되는 반면, 하느님 나라 종교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다. 넷째로, 교회 종교에서는 교리적, 교조적 신앙이 필수조건인 반면, 하느님 나라 종교는 비전중심적이며 비신조적이다. 저 너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기에, 교조적인 신앙이 필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와 역사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는 동일한 것이 된다. 즉 사람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열망해야 할 이유도 없으며 그것을 기다려야 할 이유도 없다. 다섯째, 교회 신학은 지위, 위계질서 그리고 불평등성에 강조점이 있는 반면, 하느님 나라 신학은 평등주의적이며 호칭이나 직위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 교회 신학은 로마 가톨릭 같고, 하느님 나라의 신학은 퀘이커교 같다. 여섯째, 교회 신학은 특정 어휘, 특정 문화 전통, 특정 교권 승계 전통을 신성시하는 반면, 하느님 나라 신학은 전통은 잊어버리고, 전적으로 '에큐메니칼'하거나 세계화, 곧 보편화, 범민족화를 지향한다.
 

일반화하자면, 일곱번째, 교회의 세계에서는 많은 것들이 신비에 싸여 있고, 어둡고, 잠재적이고, 유예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우리의 인식 범위를 초월해 있다는 사실에 중요성을 두고 있는 반면, 하느님 나라 신학에서는 모든 것은 명확하게 드러나 있어, 동등하고, 평상적이며 그 어떠한 어두움이나 그늘이 전혀 없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전적으로 투명하다. 따라서 여덟 번째로, 교회의 세계는 다원주의적이고 불일치 하는 많은 언어의 세계인 데 반해, 하느님 나라의 세계는 하느님 나라의 세계는 하나의 평등한 음악의 세계이다. 끝으로, 교회의 문화는 거룩/세속에 대해 분명하고 중대한 구분이 있는 데 반해, 하느님 나라에서는 거룩/세속의 구분이 단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언어세계 자체가 거룩한 언어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의 신학이 성/속의 구분을 피하는 필연적 결과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전통적 분리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또한 그런 분리를 만들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하느님 나라의 종교 공동체는, 그것이 특정 조직체로서 존재하는 한, 단순히 하나의 길벗들의 공동체(a society of friends)로서 묘사된다.
 
 
위에서 설명한 불만족스런 종교 체계(교회 신학)와 하나의 이상적인 미래(하느님 나라 신학) 사이의 대조는 성서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항상 살아있는 희망은 언젠가는 현재의 종교적 권위와 종교적 중보에 관한 거추장스러운 조직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고, 종교는 마침내 완전히 민주화될 것이라는 희망이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들의 하느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그들의 죄의 용서를 확답 받아야 하는 필요, 혹은 종교적 전문가들의 거대한 계급에 의해 교육받고 강요받는 종교적 율법에 관한 훈육체계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종교는 평이하고 자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을 '자연스럽게' 삶에 관계시키는 방식이 될 것이다.
 

종교적 민주화라는 이념은 결코 히브리 종교,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후대의 전통들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심지어 고대 이집트 종교를 포함해서 종교들의 역사 속에 널리 퍼져 있는 특징이다. 가장 흔한 패턴은 신과의 특별한 관계--본래는 오직 왕만이 신과 특별한 관계를 지녔다--가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마침내는 모든 사람이 그런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고 향유하기까지 확장된다는 패턴이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들이 얽혀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것은 교회로서, 교회는 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종교체계들 가운데 가장 장엄하고 매우 차별적인 형태로, 또한 잔인하게 핍박하는 중보종교 체계로 발전했다. 기독교는 그 자신을 거대한 우상으로 만들었다. 즉 사람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다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의 관계에서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의 관계에 빠져들었으며, 이런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두 번째 천년기(기원후 1000년부터 1999년까지 - 역주)의 교회사를 새롭게 쓴다면, 그것은 교회 내의 두 세력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충돌의 역사가 될 것이다.
 
즉 한편에서는 항상 중보체계를 구축하고 그 가공할 권력을 강화시킴으로써 불행한 개개 신자들을 짓밟으려는 자들과, 그 반대쪽에서는, 그 기존체제의 장악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투쟁했던 세력 사이의 갈등과 충돌인데, 이들 저항 세력이 택했던 신학적 방식은 기존의 통로를 벗어나 종교적 행복을 직접적으로 획득해냄으로써(신비주의, 개신교주의, 그리고 카리스마적 오순절 기독교), 혹은 이미 교회가 지배하던 시대는 종말에 도달했으며, 장차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시대로 옮겨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식(급진적 종교개혁자들, 친우회, 미국의 사회복음, 성숙한 시대의 인간, 그리고 오늘날 포스트모던 탈기독교)을 택하여 교회의 중보체계에 맞서 싸워왔다.
 

이런 싸움은 1520년대 토마스 뮌쳐 이후, 심지어 더 거슬러 올라가서 12세기 프란시스코 운동과 피오렌자의 요하킴(1132-1200) 시대 이래로 거의 중단 없이 계속되어 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싸움은 너무 오래도록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 안에서 질서와 자유 사이의 영구적인 긴장상태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즉 어느 역사적 공동체에서나, 표준적 상징들, 의식들, 그리고 규율체계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는 쪽과 우리는 이미 그런 필요를 넘어섰기 때문에 순수한 영적 자유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함성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갈등과 긴장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 개혁을 주장하는 나의 논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지만 다시 그 역사의 덫에 걸리고 만다. 나는 "지금은 마침내 교회 기독교의 질식시키는 한계로부터 탈출을 시도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따분한 답변이란 고작해야 "기독교 개혁에 대한 당신의 주장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일 따름이지요. 모든 역사 속에는 늘 당신처럼 교회사의 길고도 어려운 난항들을 참아내지 못하는 인내심 없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답니다. 당신은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달려나가고 싶어하는군요. 당신은 설익은 상태에서 완전을 잡아보려 하지요.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시작은 늘 그럴 듯하게 '혹시나'로 시작하지만, 결말은 항상 '역시나'로 끝장난다는 사실이지요." 따라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은 교회의 체제가 개혁에 관한 주장들을 예전에도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이 단지 나타났다가는 곧장 사라져버릴 주장일 거라고 생각한다. 즉 하느님 나라의 신학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간에 마이동풍(馬耳東風)이 될 것이라는 식이다.
 

기독교에는 좀더 복잡한 일이 있다. 즉 하느님 나라 종교의 결정적 요소들은 초창기부터 교회적 신앙 속에 녹아들었다. 그 결정적 요소들이란 첫째로 오순절 성령의 선물로서, 그 성령의 선물을 통해 하느님이 신자들 속에 임재하게 되었으며, 둘째는 성만찬으로서, 이 친교의 식사는 예수 자신이 드러내놓고 하느님 나라의 특징적 요소로 가르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처럼 교회가 이미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 특징들을 그 안에 통합하였다(그 자신의 이해관계 속에서 재해석하려고 노력하면서)는 사실은 교회가 왜 스스로를 이미 하느님 나라라고 주장하는 언어와 자기 이해를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줄 뿐 아니라, 교회가 왜 그처럼 쉽게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하느님 나라의 생활방식을 사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는지(물론 사람이 자신의 언어를 알맞게 사용할 정도로 사려 깊고, 또 교회의 권위를 뒤집어엎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를 설명해준다.
 

기독교의 이 모든 주장들은 나의 허를 찌를 태세이다. 즉 교회는 내가 교회 종교에 반대하여 펼치는 주장을 이미 알고 있으며, 또한 나의 모든 주장에 대해서도 신학적인 논증을 통해 이미 교회의 것으로 소화시켰다고 주장하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거대한 종교적 중보장치는 종교적으로 억압적이며 낡아빠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포기해야만 하고, 기독교 역사 발전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다음 단계, 곧 하느님 나라 종교의 단계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교회는 느긋하게 미소지으며, 교회가 이미 (감추어진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모든 증거를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불행하게도 아직 지체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 나라가 완전히 오기까지는 우리가 교회와 더불어 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일반 사람들은 거대한 중보장치들, 즉 교회, 성서, 신조, 성례전, 목회, 교회법 등이 기독교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들은 공식적으로도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다. 보통의 신자들은 정통주의의 거대한 장치들이 우리가 거기로부터 벗어나야 할 하나의 흘러가는, 불완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교회의 중보장치가 참으로 실제적인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신학은 환원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하느님 나라의 신학은 훨씬 큰 것이 아니라, 축소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중보종교에 매달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바 전부이며, 어떠한 경우든 중보종교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무언가를 흡수했으며, 아직도 그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듯이 중보종교가 궁극적으로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중보종교가 마침내는 그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들은 내가 대심문관(Grand Inquisitor)의 고전적인 변증을 약간 수정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며, 나는 내가 위에서 설명한 형태로, 그 사실이 나를 내리누른다는 점을 인정한다. 아무리 나쁜 일들이 교회에 일어날지라도, 교회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위한 나의 역사주의적 논증에 의해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그 자신이 단지 과도기적인 기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항상 인정해왔으며, 최소한 지난 백 년 동안은, 정통 교리라는 것이 진짜 성서적인 것도 아니며 예수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항상 인정해왔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교회의 정통주의가 참된 기독교이며, 참으로 교회는 하느님 나라 종교의 몇몇 요소들을 그 안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 나라를 기대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항상 아직은 현상 유지에 매달리는 것이 당분간 더 '현명'해 보인다. 모든 감독들은 "주여, 우리에게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가 감독으로 재직하는 동안은 아닙니다. 제발 내가 재직하는 동안은 아닙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그러나 아직은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나는 하느님 나라의 신학에 관한 순수한 신학적인 변론으로는 충분히 멀리 나갈 수 없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우리의 종교적 전통은 매우 세대주의적(dispensational)이라서 종교적 진리를 '세대', 혹은 시대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며, 자신들이 특정한 세대 안에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율법'의 시대에는 하느님이 상대적으로 매우 뚜렷하며 생생하다. 또한 신약성서와 교회의 시대에는 하느님이 항상 그리스도로 바뀌어, 그 자신을 인간들 속에 부여하신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느님이 '영'이시며, '삶'의 도도한 흐름과 일상적인 인간관계 속에 완전히 들어와서 내재하신다. 그러나 그 시대는 겹쳐질 수 있으며, 한 사람의 시대를 특징짓는 방식에 관해서는 종종 논쟁의 여지가 있다. 우리는 결국 지난 300년 동안 전환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느꼈다.
 
문제를 보다 더 다루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학에로의 전이에 관한 나의 논증이 이번에는 이슬람 교도들의 주장, 즉 이슬람 자체가 이미 지상의 하느님 나라이며, 자신들이 기독교의 교회 신학의 참다운 계승자(하느님 나라의 종교라는 점에서 - 역주)라고 주장하는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밀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진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학에 속하는 것으로 볼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확립시키려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 시대의 신학적 위치를 특징지으려는 시도, 그리고 혁명적 순간은 도래했으며 바로 지금이 그 때라고 주장하는 모든 시도를 둘러싸고 있는 모호성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하느님 나라의 신학을 종래의 신학에 의해서는 충분히 그 정당성을 변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우리는 두개의 개념, 즉 계시와 도그마적 진리라는 개념을 폐기하려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나의 변증론은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인가?

이미 다른 곳에서 소개한 두 개의 슬로건이 그 답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일상의 언어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신학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과 철학 자체의 종교(Philosophy's own religion)라는 구절이다.

칸트와 헤겔의 사상 속에는 교회의 신학으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신학으로 나아가는 어떤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작은 세 권의 <일상의 언어>(Everyday Speech) 시리즈에서 나는 최근 오늘날의 일상 언어 속에 하느님 나라 신학의 세계관과 가치들이 상당부분 전제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하느님은 '삶'의 운동과 주장들 속에 확산되어 있으며, 일상 언어는 인간성에 가장 적합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 일상 언어는 '하느님 나라 세계'(kingdom world)를 가정하며 열망하는데, 그 세계는 성서의 하느님 나라, 혹은 칸트의 목적의 왕국 같은 완전히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세계이다. 언어는 인간들의 네트워킹을 위해 발전했다. …  따라서 일상 언어는 속박이 없고 상호투명한 인간 소통의 세계를 추구하는데, 그 세계 안에서는 우리를 에워싸고 위협하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들이 묶여지거나, 연기되거나 혹은 저지된다. 언어 자체의 철학은 급진적 휴머니즘의 한 형식이며, 그 정치학은 민주적이다. 현실은 인격체들의 네트워크로서 그 비인격적 환경이 지속되지만 왜곡시키지는 않으며, 자유로운 대화가 보장되는 네트워크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오늘날 일상 언어 속에서 얼마나 전통적인 종말론이 '실현'되었는지, 혹은 현 시대 속에 현실이 되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만약 일상의 언어가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깝게 보여주고 있다면,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오늘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인적 삶과 마음의 상태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역사 이후의 시대, 곧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가 더 이상 없는 세계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예'인 것 같다. 일상 언어의 기본적인 우주론적 구분은 더 이상 신과 인간을 포함한 창조 질서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인간 세계와 인간을 둘러싼 비인간 세계 사이의 구분이다. 일상 언어는 기독교를 이미 그 탈교회 시대, 곧 기독교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세계화되어가고, 인도주의적이며 소통이 매우 민첩한 시대가 되어 가는데, 이 세계는 아직도 인간의 오래된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또한 이 세계 자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하느님 나라의 세계가 되기 위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핵심 요소는 죽음 이후의 삶(life after death)에 대한 믿음이 끝장났다는 점이다. 다가오는 내 자신의 죽음은 단순히 나의 소멸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할수록, 나는 이 현세가 나의 마지막 세상이며, 이 세상에서의 삶의 가벼움과 덧없음이 내게 있어 종교적으로 궁극적인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종말은 참으로 임박해 있다. 우리 시대에는 일상적 삶이 인생에 대한 종말론적 긴박성을 느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우리는 단 한 번 사는 것이며, 죽음과 허무는 단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우리에게 전부이건만, 인간은 절망적일 만큼 깨지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 나라 신학은 매혹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 신학은 우리의 일상 언어에 의해 지금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신학은 우리 삶에 관한 진리로서 지금 우리가 이미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학은 또한 철학 자체의 종교이다. 철학 체계에서, 우리가 인간의 현실에 대해, 이 세계의 현실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한 비전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비전은 허무주의와 휴머니즘이 만나는 매우 가파른 경계에 서 있는 비전이다. 우리는 허무주의에 이를 정도로 철저하게 반실재주의자들(anti-realists)이다. 우리가 없다면, 이 세계는 공허한 흐름(an Empty flux)으로서, 언어는 그 공허한 흐름을 구성하고 차별화하고,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세계와 서로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바에 따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그런 공허한 흐름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실재론적 철학을 주장하며, 그것과 더불어 '태양 같은'(solar) 개인 윤리와 인도주의적 사회 윤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나의 철학 전체는 급진적 휴머니즘의 형태, 즉 전통종교에서 하늘의 세계로 표현된 비전, 곧 완전히 화해하고 서로 숨기는 것이 없는 인격체들의 네트워크가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비전을 통해 표현된 세계와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도 나는 다시 하느님 나라 신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에게(다른 곳에서 더 충분하게 설명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 신학은 내가 철학을 통해 배운 우리의 인간 조건에 대한 해석이며, 하느님 나라 종교는 우리 시대에 진실한 삶에 대한 종교적 응답의 한 형식이다. 근대 서구 문화가 기독교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기에, 보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설립 비전은 오늘날 아직도 우리의 희망의 토대이며, 우리의 세계 건설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논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하게 해 준다. 나는 교회 신학과 그 용어들로서는, 교회가 그 자체를 넘어서 하느님 나라에로의 개혁으로 인도할 논증을 전개하는 데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신학은 우리 시대의 진실이며, 하느님 나라 종교(즉 '태양 같은' 영성, 더하기 인도주의적 사회윤리)는 우리시대에 진정한 종교적 삶의 형태라는 것을 논증해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논증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들이 보기에, 기독교(한 종류)의 진리에 관한 의심쩍은 논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여기서 제시하는 새로운 변증론은 전통이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어떤 초자연적인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변증론이 어떻게 현재 우리들의 생각과 이미 하나가 된 변증론인지를 단지 보여주려고 한다.
 
 
 
 
 9장   교회가 그 존재이유인 하느님 나라를 이루지 못하는 구조적 이유 
 
 
 
기독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묘하게 얽힌 상황이다. 서구에서 기독교는 1840년대에 급진적 인본주의(radical humanism)로 발전했다. 그때 이후로 서구 문화의 주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인권, 인도주의적 윤리, 복지국가, 환경운동, 예술 분야에서의 모더니즘의 점진적 확립과 더불어, '교회'로부터 '하느님 나라'에로 꾸준히 이동해왔다. 이 문화는 어떤 면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완전히 흡수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 문화가 기독교라는 낡은 암호나 상표를 벗어 던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종교인들은 이런 사태에 대해 매우 불만이 많다.
 
그들은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희망을 매우 불만족스럽게 세속적으로 실현한 것이듯이, 오늘날 우리의 편안한 소비주의와 인도주의는 기독교의 종말론을 이 땅 위에 매우 불만족스럽게 실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대교와 기독교 내의 극단적 보수파들은 공격적으로 그들의 낡은 초자연주의와 구닥다리 상표를 다시 주장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데,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 교회가 공손히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실망했다고 선언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항해서 싸운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칼하다. 이것이 우리가 분간해내야 할 바로 그 상황의 악마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다. 즉 몇몇 다른 시대가 서로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어려움이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생겨난다. 교회는 자신이 오직 중보종교만을 가르치고 제시한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중보종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어느 불확정한 시기--아마도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아마 더욱 더) 우리가 죽은 후--에 올 참된 것, 곧 직접적 종교를 위해 준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환상적인 미래를 위해 지금의 훈육과 종교적 권위를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종교개혁시대에 일부 집단들은 직접적, 교회 이후 시대의 '하느님 나라' 형태가 마침내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퀘이커 교도들, 최근에는 친우회(the Society of the Friends)로 불리는 집단은 종교개혁 이후 가장 두드러진 생존자들이다. 즉 그들은 아직까지도 매우 인상적이고도 일관적인 하느님 나라 신학과 조직 형태와 윤리를 간직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인도주의 윤리학에 끼친 그들의 지대한 공헌을 통해, 친우회(the Friends)는 근대세계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 인물들이었다. 윤리적으로, 근대세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퀘이커적인 세계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영국에서, 그들은 현재 아주 작은 집단이며, 대다수 기독교들은 구조적으로 교회로부터 하느님 나라로의 전환을 이루기 어려운 대규모 감독제도 교단(가톨릭, 성공회, 정교회 등)의 신도들이다. 감독제도의 신학은 교구의 감독 자신을 그의 교구 안의 교회 자체로 보기 때문에, 전체 감독들의 회의는 전체 교회들의 에큐메니칼 회의가 된다. 모든 감독은 "짐(朕)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한 절대군주처럼 자신을 느낀다. 존재 이유의 전부가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하는 데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폐위에 찬성표를 던질 수 없기에, 교회가 하느님 나라로 계승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환상적인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교회를 존속시키는 과제에 갇혀 있는 것이다. 영원히.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전통 교리 수정  

 
 
이제 악의 문제로 넘어가서, 19세기와 20세기 초엽에 인간 사회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유일한 방법이란 부유하고 힘있는 이들의 간헐적인 자비의 개입을 간구하는 일이 고작이던 시대로부터, 모든 곤궁에 처한 시민들이 복지혜택을 하나의 권리로서 법률적으로 획득해낸 시대로 변화하였다. 불행하게도, 하느님은 항상 앞의 방식으로 활동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왔다.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에게 구원을 울부짖을 때에, 하느님은 경우에 따라 개입하여 고쳐주기도 하고 먹여주기도 하지만, 국가가 행하는 복지혜택처럼 우리 모두에게 최소한의 돌봄을 보장해주는 안전망(安全網)을 확립하지는 않으셨다. 왜 그런가? 왜 하느님은 몇몇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도와주는 것으로 묘사되면서도, 국가가 오늘날 행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일상적으로 도와주는 것으로는 묘사되지 않는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말하자면, (위에 말한) 더 새롭고 더 인도주의적인 도덕적 가치가 훨씬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서와 표준적 기독교 교리 모두 안에 잔인하고 매우 구태의연한 도덕적 태도가 보다 더 고결한 이상과 함께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예수보다 여호와에 더 빚지고 있는 교리들을 복음이라고 설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며, 훌륭한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도덕적 관념들을 기독교가 거부하고 정화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것은 상당한 교리적 개혁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자들의 신론은 매우 비간섭주의적(non-interventionist) 성향을 띨 것이며, 심지어 하느님은 단순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영적인 이상, 도덕적 필요조건이라는 '비실재론적'(non-realist) 견해에 거의 닿아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인과론적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영감이다. 하느님은 다만 사랑이고, 사랑은 우리 하느님이며, 그것이 바로 요한 기자의 비실재론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설명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느님의 사랑이 실천된 하나의 비유로 보는 모범론자(exemplinarist,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낸 최고의 모범으로 보는 입장 - 역주)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죄의 형벌을 감당함으로써 하느님의 노여움을 달랜 분으로 묘사하는 일종의 '객관적'(objective) 이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인간 운명에 관한 설명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마지막에는 지옥이 텅 빌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될 것이라는 보편주의적 입장을 매우 선호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매우 모호하고 희미한 설명을 한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입장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기 위해 죽음 이후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기독교적 가치들이 그 효과를 나타내기를 바란다.

이런 의제를 밀어붙임에 있어 자유주의자들은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성공은 그들이 '보수주의자, 복음주의자 및 근본주의자들'로부터의 야만적인 공격에 대한 그들의 잦은 불평을 통해 여러분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큰 성공이다. 다양한 보수주의자들 집단이 기독교 교회 내에서 양적으로 우세한 것은 사실이다(이슬람이나 유대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 역시 자유주의자들을 그토록 내리 눌렀던 똑같은 주장에 노출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오늘 종교적 보수주의자 집단에 들어간다면, 새로 태어난 아기를 자랑스럽게 안고 있는 부모를 향해, 어느 목사도 정통 교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자녀가 '죄 속에서 잉태되고 출생했다'고 확신시키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오늘날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만일 그런 주장을 하면 사람들이 격분할 것이다. 또한 당신이 가장 보수적인 교회의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최후의 심판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빨리 회개하라고 재촉하는 것을 듣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지옥의 고통이나 천국이나 환희에 관한 자세한 설명도 듣지 못할 것이다. 보수적인 장례식조차도 이제 더 이상 장례식은 주로 회개나 사후의 삶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표준적인 기독교 교리의  상당부분이 이미 가장 공세적인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조차 암암리에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보다 더 인간적인 도덕적 전망이 그들로 하여금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관해 더 정직하게 만드는 데 반해, 보수주의자들은 (성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 역주) 이 세상에 대해 보다 고리타분하고 잔인한 입장이 이미 사라져버렸으며 우리들의 전통적 종교 언어의 상당부분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회피와 터무니없는 그들만의 논리를 선호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압도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전통 교리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암암리에 자유주의자들 만큼이나 전통 교리를 수정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낡은 단어들에 매달리지만, 심지어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하느님'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당신은 상당한 과학교육을 받은 친구에게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을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설명할 것인가? 만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면, 그리고 아직도 그의 자연적 인간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가? 보수적 신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대답을 시작할 수도 없다. 따라서 복음주의적 저술들이 황당한 헛소리일 뿐인 이유는 단어들은 사용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10장   교회 청중들의 공격적 성격

 
스퐁 감독은 흥미롭고 용기 있는 인물로서 그의 저술이 매우 큰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또한 그의 경우 역시 교회 안에서 고위직에 있으면서 새로운 종교개혁을 시도하는 것의 난관과 불가피한 실패를 여실히 보여준다. 언어 사용에 대한 정치적 압박감은 한 사람의 감독으로 하여금 모호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마치 그의 청중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뜻으로 들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런 뜻으로 들리도록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그처럼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교회 청중들이 그의 지지자들이며, 그 청중들의 호응을 얻어야 했기 때문인데, 교회 청중들이란 비정상적으로 잽싸게 공격을 감행하는 청중들이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항상 '강력한 지도력'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즉 그 청중을 확신시키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모든 기대를 충족시키고, 가장 비합리적 편견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양보하는 것을 뜻한다. 만약 그가 청중들에게 어떤 흥미 있고 정말로 도전적인 것을 한 마디라도 한다면, 청중들은 당황스러운 분노로 반응할 것이며, 그의 동료들은 즉각 그를 버릴 것이다(존 로빈슨 감독과 데이비드 젠킨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만일 필요하다면, 그들은 공개적으로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할 것이다(스퐁 감독 자신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주었듯이, 최소한 1860년대 콜렌소(Colenso) 사건 이래로 '정직한 감독'은 결코 교회 청중을 설복시킬 수 없다. 단기적으로 그는 악평과 함께 잘 팔리는 인물이 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교회가 움직이는 집단역학(group dynamics) 방식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로버트 W. 펑크는 스퐁 감독처럼 그렇게 심하게 교회로부터 제한을 받지는 않는다. 그는 더 솔직하게, 그리고 더 철학적으로 말할 수 있다. 영어권 사회에서, 칼빈주의와 영국 경험주의가 결합된 영향력은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그들이 교리적 진술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특별히 문자적으로 만들었다(예술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흔히 유사하게 문자적이듯이).
 
 만약 어떤 감독이 공개적으로 교리적 진술은 너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즉시 그 해당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될 것이고, 곧바로 난리법석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펑크는 한 사람의 신학자로서, 예를 들어 복음서 이야기들과 예수 자신의 발언 모두의 특별한 수사학적 특성을 지적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나아가 이런 종류의 고찰에 입각하여 종교적 진리의 본성에 관한 전반적 논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요컨대, 신학자들은 감독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거나 그로 인한 교회의 올가미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있다.
 
 
 

 
11장  자유주의 신학의 개혁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유들

 
 
지난 한 세기 동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매우 비슷하게 정의했던 두 가지 거대한 기독교의 도그마, 곧 성육신 및 삼위일체 교리가 틀렸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즉 두 교리 모두 충분히 성서적이지 않다. 신약성서의 전체 신학들 가운데, 오직 요한 기자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재적(先在的, preexistent) 신성이 우리 가운데 육화되었다고 가르칠 뿐, 신약성서의 그 어떤 저자도 그리스도가 (성부 하느님과) 완전히 동등한 신성을 지닌다는 '정통적' 교리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전체 성육신 교리가 비성서적이고, 나아가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께 기도했던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분명히 모순되며, 그가 기도를 바치던 분과 동등성을 가진 것처럼 행세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삼위일체 교리 역시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만일 교회가 목회 훈련을 위하여 신학을 공부하도록 요구하고, 그들이 그들의 수업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들이 더 이상 성서적인 것으로 변호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면, 모든 사람의 정신 건강과 장기적인 온전함을 위하여 그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도록 요구하거나,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성서 비평에 근거해서만이라도 교리들에 대한 수정이 긴급하게 필요하다.
 

보수주의자들과 교회 권력층들은 물론 기독교의 진리는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로서, '사람'에 의해 변할 수 없다고 답변할 것이다. 그런 답변에 대해서는, 지난 200년 동안 교리사(敎理史)의 비판적 연구의 결과로, 도그마는 역사, 그것도 매우 인간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지적해야만 한다. 즉 정통 교리의 각각의 항목을 사람들이 작성하고 승인했으며, 4세나 5세기에 그들에게 좋게 보였던 교리적 논증들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좋은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이전에 사람들이 만든 것을, 후대에 사람들이 다시 평가하거나 다시 바꿀 수 있으며, 심지어 폐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기독교 교리사를 공부하고 시험에 통과된 후, 마치 그 교리들이 하늘로부터 완성되어 떨어졌기에 결코 다시 생각해보거나 심지어 의문시해서도 안 된다고 평생 동안 설교하면서 살도록 기대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로서는, 교회가 비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상들에 집착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교회 자체를 불구자로 만들고 그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을 재검토하여 수정하고 새롭게 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하는 방법은 분명 쉽고도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제안을 발표하고, 그 때마다 똑같이 공개적인 항의와 분노의 합창이 진동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1853년 이래로 거의 10년마다 한번씩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사람들은 그 논증들에 주목하고 배울 시간이 결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번 즉각적이고 폭력적으로 반응한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가라앉고 잊혀진다. 다음 논쟁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모든 것이 마른하늘에 벼락치듯 다시 나타난다. 그 주제와 논증도 거의 달라지지 않은 채 말이다. 즉 몸의 부활과 동정녀 탄생 등이 단골 이슈다. 모리스(F.D. Maurice), 콜렌소(J.W. Colenso), 캠벨(J.Y. Cambell)의 '신신학'('New Theology'), 톰슨(J.M. Thompson), 메이어와 근대 교인 연합(H.D.A. Major and Modern Churchmen's Union), 헨손(Hensley Henson) 사태, 반스(Barnes) 감독, 로빈슨(Robinson) 감독, 제프리 램프(Geoffrey Lampe), 데이비드 젠킨스(David Jenkins) 감독과 리처드 홀로웨이(Richard Holloway) 감독--이런 이름들이 한때 신문을 장식했던 이름들이다. 주요 집필자들은 그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투고자들은 그들을 향해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파멸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들이 다시 잊혀졌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으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아무런 진보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그 어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결과를 확립하지 못했기에, 지속적인 성장을 향한 도약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실제로 비판적 신학(critical theology)은 전반적으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존 로크와 이신론(理神論, deism) 논쟁 이래로 2∼3세기 동안, 비판적 신학은 전반적으로 대중에게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했으며, 교회에 거의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비판적 신학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설교자는 그 누구도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적 개혁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한 것처럼 보이며, 아마 실패할 것임에 틀림없다. 자유주의적 개혁은 부분적으로 사회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즉, 각종 종교 조직은 종교 직업인들에 의해 통제되는데, 그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며, 따라서 야심과 경쟁, 그리고 위계질서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젊은 사람들은 승진과 권력을 위해 적극 경쟁하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서 도덕적 기반과 정치적 특혜는 항상 충성파, 곧 기성 정통주의 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레고리 16세 사후로 모든 선거에서 자유주의적 교황이 선출될 희망이 공표되어 왔지만, 우리는 자유주의적 교황이란 자가당착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영국에서처럼, 성직자들이 무엇인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고독한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은 회의이며, 회의는 저항되어야 할 유혹일 뿐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1970년대 초반 이래로 자유주의 신학은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강력한 문화적 변화로 인해 일반대중 영역에서 '솔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그 어떤 신학적 진술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존경받을 만한 종교적 언어와 어리석은 종교적 언어 사이의 오래된 구분이 사라졌으며, 교회와 컬트 사이의 구분도 이제는 사라졌으며, 모든 교리적 언급은 한 소종파 내부의 은어처럼 들려지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의 가장 깊은 이유는 형이상학적 실재론(metaphysical realism)의 종말, 곧 플라톤주의(platonism)의 종말, 현상/실재 사이의 구분의 종말, 결국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질서, 곧 '지성적' '본체적'(noumenal) 혹은 '영적'이라 부를 수 있는 질서에 의해 결정되고 우리에게 중개된다는 사상의 종말에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제 더 이상 낡은 이원론, 즉 우리의 삶이 막후의 보이지 않는 실재(Invisible Reality)에 의해 적극적으로 형성된다는 낡은 두 세계의 이원론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실천적으로 탈형이상학적(post-metaphysical) 시대의 사람들이다. 즉 오직 하나의 무대만이 있을 뿐, '막후'는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전통 종교, 그리고 모든 유신론적 종교는 분명히 신들의 실재와 대리자, 영들, 신의 은혜, 분리된 영혼 등, 보이지 않는 존재와 세력에 대한 믿음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 플라톤주의 같은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주의의 종말은 또한 거의 모든 전통적이며 저 세상적인 형태의 종교적 의식의 종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 더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 곧 상당히 솔직한 이들이 전통적인 종교적 믿음 같은 것을 일반 대중들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도덕적으로도 의미 있게 만들어보려 했던 시도의 종말이다. 이것은 왜 지난 세대의 탁월한 영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살아 남은 이들이 1970년대에는 모두 새로운 사상을 가지기를 중지하고, 그 후 대중들의 주목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1977년의 <성육한 하느님의 신화>(The Myth of God Incarnate)에 대한 당황스런 언론보도는 더 이상 종교적 사상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에 대한 분명한 신호탄이었다. 참으로, 대중들은 더 이상 종교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유익한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 자유주의 신학, 그리고 '솔직한' 신학적 진술에 관한 일반 대중들의 이해가능성은 1970년대에 모두 중단되었는데, 그 시점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교차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그 후 어떤 가능성이 있어왔는가? 학자들 사이에서는, 많은 유명한 예들이 증명하듯이, 그런 모든 논쟁들을 회피하고 역사 속으로 날아감으로써 놀랍도록 탁월해지는 일은 쉽다. 다른 이들은 로이드 기링(Lloyd Geering)이 잘 깔아놓은 길을 따라, 태연하게 되어 자유로운 탈기독교인들(post-Christians)이 된 것을 애석해한다. 미국 대학의 종교학과에는 그런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지만, 아직 영국에는 훨씬 적다.
 
 

 
 14장
 
 
 
이 두 가지 문제, 즉 예수와 중보(혹은 '제도적', '조직화된') 종교와의 관계, 그리고 역사에 대한 그의 세계관과의 관계는 만일 우리가 발전하려 한다면, 반드시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회당과 성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대적자들의 수와 다양성--곧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에서 나타난다. 중보종교 장치가 점점 더 정교하게 발전할수록, 거기에 개인적으로 깊이 개입된 사람들의 모든 계층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그 중보종교의 의식들과 특권들에 너무 매여있기 때문에, 결코 그것이 성취되는 시간을 알 수 없으며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바꿔 말해서, 그들은 그 중보종교로부터 분명하게 결별해야 할 결정적 순간을 알 수도 없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다가 그런 종교의식을 만들었기 때문에, 당신은 그 나라가 도래하는 순간을 결코 알 수 없으며 포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회당에서는 오래되고 익숙한 예언서 본문들이 다시 읽혀지고 있는 동안, 노인들이 그들의 기도 숄과 성구함을 지닌 채 정해진 의자에 앉아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회당에서 병자를 고치는 동안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들의 할 일을 하고 있었으며, 예수가 일어나서 "보라,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당신들이 기다려온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 그들은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들이 깨어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 종교의식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의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종교의식을 심지어 하느님 나라 자체와도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성전에서도 메시지는 동일했으나 좀더 강력했다. 왜냐하면 성전은 백성들의 잉여 농산물의 거의 전부를 소모할 정도로 커진 중보종교 체계의 고전적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중세교회와 같았다. 중세교회는 여전히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성직자들이 너무 많고 풍족하게 지내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실제로는 속으로 "그러나 제발, 나의 시대에는 당신의 나라가 오면 안 됩니다!" 하고 속삭였던 것이다.

성전은 중보(mediation), 도구성(instrumentality), 장기적인 관점과 '모든 것이 마땅한 질서 속에 있는 것'(라틴어 rite)이다. 성전은 강력한 사회적 제도로서, 그 자체의 사회적 중요성을 확신하며 '수세기 동안 생각해 온' 것을 자랑한다. 예수는 성전에 맞서서 그 자신의 종말론적 혹은 태양 같은 의식을 갖고 성전과 싸웠다. 상대적으로 고상한 이 의식은 매우 강렬하고, 직접적이며, 단기적인 것이다. 이 의식은 사람들의 눈을 핵심에 너무 가깝게 초점을 맞추도록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밖에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장기적 계획 및 도구적 사고를 조롱함으로써 모든 가치가 본질적인 것이 될 정도로 바뀐다. 예수의 세계관에서는, 만물은 무한히 중요하게 되든가, 아니면 완전한 시간 낭비가 되든가 한다. 가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인식, 포착, 실천, 확인되어야 한다. (에크하르트의 Nu, 곧 그의 지금 이 순간[Now Moment]은 더욱 신비적인 반면, 예수의 지금은 더욱 도덕적임을 주목하라. 당신은 그 지금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가 아니라, 지금을 위해 결단하고 온 마음으로 당신 자신을 지금에 헌신함으로써 지금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제 결정적 지점에 이르렀다. 극단적으로 장기적인(long- termist) 사고방식과 극단적으로 단기적인(short-termism) 사고방식 사이의 대조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장기적인 사고방식이 더 '역사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얼핏 보기에 성전의 장기적 종교가 예수 같은 예언자의 극단적인 긴급성과 단기성보다 더 확실하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고방식처럼 보인다. 그런 노선을 따라, 기성 교회 형태의 기독교는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라고 자화자찬한다. 즉 기독교는 광범위하게 사회적으로 뒷받침된 종교적 중보체계로서, 그 자체의 장구한 역사적 기원과 전통, 성직 계급, 일 년 주기의 장엄한 의식들의 거행 등에 커다란 중요성을 둔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종교라고 선언한다. 그런 체계가 발전하는 데는 여러 세기가 걸리며, 수천 년 동안 지속된다. 그 중보체계는 매우 오래된 과거를 돌아보며 또한 그만큼 긴 미래를 내다본다. 또한 그것은 매우 역사적인 의식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에 집도 절도 없이 노천에서 감히 눈을 치켜 뜨고 똑바로 쳐다보는 청중들을 향해 설교하는 헙수룩한 호언장담꾼이란, 쳇! 제깐 놈이 무어라고... 독자 여러분, 나는 대규모의 '조직화된 종교'에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강한 역사적 감각을 지닌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며, 예수를 매우 반(反)역사적이었던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종말에 대해 지나치게 흥분한 예언자였는데, 역사의 종말에 대한 그의 기대는 단순히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의 근시안적인 안목은 그로 하여금 우리들보다 무언가 '궁극적인' 것을 더욱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핵심적인 문제에서는 그가 틀렸다는 것이 곧 판명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엘리야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를 데려가려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죽었으며, 역사는 계속되었고, 지금 우리는 여기에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뒤집어서 말하고자 한다. 또한 정말로 반(反)역사적인 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성전 종교라고 주장하고 싶다. 즉 성전은 민중을 역사 밖으로 끌어내, 매년 예전적으로 순환되는 거대한 신화의 백일몽 속으로 인도하는 반면에, 예수의 종말론적인 종교의식(religious consciousness)은 지금 순간(Now Moment), 곧 그 안에서 자아가 그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그 자신이 되는 지금 순간에 강력하게 헌신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어떻게 종교적 행위가 완전히 이 세상적이며 역사적인 행동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에 성전의 행동 개념, 즉 예전적 행동 개념은 단순히 하나의 신화에 대한 주기적인 재연(再演)이다. 그것은 인간을 그 어디에로도 인도하지 못하며 그 무엇도 달성하지 못하기에, 결코 인간적인(human) 행동이 아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교회, 특별히 기독교는 그 중심에서 역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신화의 세계 속으로 실종되고 만 것인가? 그 대답은 기독교가 발전시켰으며 거기에 확고하게 매달려 있는 우주적 타락과 구원이라는 거대한 이야기(Grand Narrative) 속에 있다. 그 신화 속에서, 우주적 역사는 몇 개의 단계 혹은 섭리적 세대(dispen- sations)로 나누어지며, 각각의 단계는 하느님이 연출하는 우주적 드라마의 각 '장'(Act)이다. 이 섭리적 세대들은 낙원 시대, 족장시대, 모세의 율법시대, 복음 혹은 은혜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영광 속에 재림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천년왕국 시대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각의 세대에, 인간 존재는 모든 일이 그들에게 어떻게 될 것인가가 정해져 있는 고정된 종교적 상황 하에서 살며, 또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의 변화가 전체 우주적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것이지만, 그 변화는 인간 주체에 의해 일어날 수 없고, 하느님의 특별한 행위를 필요로 한다. 하느님의 그런 특별한 행위는, 예를 들면,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추방시킴으로써 낙원 시대에서 족장 시대로의 전환이 일어나며,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함으로써 족장 시대에서 율법 시대로의 전환이 일어나며, 예수의 출생, 죽음, 및 부활, 그리고 그 이후 오순절 성령의 은사를 통해 율법 시대에서 은혜 시대, 곧 지상의 교회의 시대에로의 전환이 일어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전투적 교회(Church Militant)의 종말과 그리스도와 그의 성자들의 지상의 천년왕국(the Millennial Kingdom of Christ and his saints on earth)이 시작된다.

나는 하나의 결정적 요점을 밝히기 위해 한때 익숙했던 커다란 이야기의 엉성한 개요를 열거한 것이다.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로서 그 전체 신학을 타락과 구원이라는 거대한 우주적 이야기의 형태로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 ('역사적 종교'의) 역사라는 것이 어떤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 의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히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의한 거대한 이야기로서 간주된다는 사실도 분명히 명심해야만 한다. 즉 하느님이 거의 유일한 역사적 주체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결정적인 중심에 있는 유일한 인간의 행위는 아담의 불순종(disobedience)이며, 그 정반대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순종(obedience)의 공적(功績)이다. 마리아 숭배주의자들은 여기에 구원의 경륜 속에서 그녀에게 부여된 역할을 받아들인 마리아의 순종의 공적도 끼어 넣기를 원할 것이다. 이런 것들과는 별도로, 하느님은 우리가 현재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그 아래에서 살아야만 하는 한계들을 설정해놓은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로서 남아 있다. 서방교회의 정통주의는 항상 예정론적(predestinarian)이었다. 즉 하느님은 모든 사건을 미리 예정했다. 총감독으로서의 하느님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J. Hitchcock)보다 훨씬 더 절대적 감독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서방교회의 고전적 신학이 인간의 공동 산물로서의 역사에 관한 개념이 전혀 없었으며, 우리의 세속적 역사적 삶의 일상과정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입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어떤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한다. 즉 우리는 역사적 행위을 통해 우리 스스로 인간 존재의 어떤 기본 조건도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섭리의 단계를 기다려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러나서, 그들의 에너지를 우주적 속량 드라마의 다양한 중요 일화들을 기념하는 연중 축제 및 금식 전례의 순환에 쏟아 붓게 된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이 주로 하는 일이 성탄절, 부활절, 성신강림 대축일 등등에 '교회 나가기'이고, 설교자들이 그들의 주된 노력을 '기독교 교회력'의 다양한 사건들을 해석하는데 쏟아 붓는 이유이다. 아무도 이 모든 것을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하는지 감히 묻지 않는다.

줄리앙 로버트(Julian Roberts)가 이 문제에 관해 한 가지 재미있는 언급을 했는데, 그는 고전적 프로테스탄티즘이 로마 가톨릭보다 인간의 역사적 행위에 대해 훨씬 더 비관적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가 떠난 이후와 최후의 재림 사이에 그의 영향력이 이 세상 속에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는 교리적인 문제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열린 공의회 - 역주) 이후의 가톨릭은 그리스도가 교회와 교황 안에서 이 지상에 현존한다고 가르쳐왔으나, 개신교는 보통 반대로 그리스도는 이 땅을 완전히 버렸으며, 이 땅에서 그의 현존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의 무가치함을 강조했다. 이런 교리에 설득 당한 윤리적, 정치적 정신 상태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침울(melancholy)로 묘사했고, <독일 비극의 기원>(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a)이란 책에서 자세하게 분석했다. 오직 개신교의 태도만이 참으로 메시아적이다. 가톨릭의 관점은 무언가 혼합된 것이다.

그는 특히 독일 사상에 대해 쓰면서, '역사에 대한 메시아적 관점'이라고 묘사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메시아주의의 핵심은 결렬과 단절이다. 메시아주의에서 메시아의 도래는 완전히 '역사'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메시아 이전에는 우리가 자연 조건 속에 있으며 무의미한 구조 속에서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메시아 이후에는, 우리가 자유하다. 자연적 속박상태로부터 자유롭다. 이 두 시대 사이의 중간 단계는 없다…첫째 시대의 타락은 너무 전체적이며, 둘째 시대의 구원은 그만큼 완전하기 때문에, 이 두 시대 모두에서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키에르케고르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개인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이 말이 (많은 사상가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합리성 또한 타락했다는 것이다.

위의 글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기독교가 예수와 정반대가 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보게 해주는 명료한 말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유대교 교사로서, 20세기 동안 매우 점진적으로 재발견된 예수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가 죄와 속량에 대한 신학을 전혀 만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교사로서 그는 구원사 전통보다는 유대인들의 지혜 전통(Wisdom tradition)에 더 속해 있다는 것에 대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대한 이야기꾼(a grand-narrativist)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역사로부터 사라지고 교회 속으로 들어가서는 매년 우리의 삶을 기독교의 거대한 속량 신화라는 쳇바퀴를 따라 도는 데 소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메시아주의로부터 만물이 달라질 순간(Moment)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상을 취하여, 우리가 그 순간을 위해 깨어 있고 적극적으로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가장 크게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메시아주의로부터 결별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우리 개인들의 인간적인 도덕적 결단 및 행동에 종말론적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당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니 와서 예배자가 되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당신은 마치 세상의 종말에서 사는 것 같은 방식으로 삶에 당신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 우리가 그처럼 살 때,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시작하며,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급진파는 교회를 넘어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였다. 불가피하게도, 그것은 도덕적으로 매우 적극적이고, 정치적으로는 혁명적이 되었다. 이것은 급진적 기독교가 참으로 매우 '역사적'임을 보여준다. 충격에 휩싸인 교회 개혁자들과 경건한 제후들은 무력으로써 그것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다음으로 넘겨져야 할 필요가 있는 영역이다.
 
 
 
 
 
아래의 글은 돈 큐빗의 홈피에서 발췌..
 
 
ABOUT NON-REALISM

    Don Cupitt's philosopy of religion is often described as non-realism, a word which has given rise to much confusion.  What Cupitt calls non-realism is very much what Richard Rorty calls 'antirepresentationalism'.  Before Kant philosophy usually tended towards dogmatic realism.  Euclid's geometry and Aristotle's logic were thought of as being objectively true.  There was an objectively-ordered intelligible Cosmos out there, independent of the human mind and copied or mapped by our descriptions of it.  Religious thought too was usually dogmatic-realist:  there was an eternal world 'up there', and a created, visible world 'out there'.  Only one religion reported the cosmic facts correctly, namely Christianity.  Our minds, being created by God, are made to know God, and can correctly track the cosmic and moral order he has pre-established for us. So, in the classic world-picture, the whole of religious truth was thought of as existing 'out there'.
 
    After Kant we began more and more to see that our knowledge and our language are only human.  In all our knowing, the mind conditions what it knows:  the facts are profoundly shaped by the theories under which we view them and the language in which we decribe them.  We are always inside our own human standpoint, and can never directly compare our vision of the world with the way the world is absolutely.  We are only human. In short, we cannot claim to have purely-objective knowledge of THE world, but we can claim to have many very useful ideas about OUR world, the world we see and the 'life-world' we live in.
 
    So, very briefly:  realists think that mathematical truth is discovered, whereas non-realists about maths think that maths is a complex collection of useful games invented by us.  Realists think that scientists discover 'the laws of Nature', whereas non-realists think that scientists invent theories that help us to tell stories about why things go the way they do, and to predict outcomes successfully.
 
    Today, a realist is the sort of person who, when his ship crosses the Equator, looks overboard, expecting to see a big black line across the ocean.  Realism tries to turn cultural fictions into objective facts. A non-realist sees the whole system of lines of latitude and longitude as a valuable fiction, imposed upon the Earth by us, that helps us to fix locations and to find our way around. For a realist Truth exists ready made out there; for a non-realist we are the only makers of truth, and truth is only the current consensus.
 
    In brief, we don't know and we cannot know THE world, absolutely. We know only OUR world, a world shaped by our ideas, seen from our perspective, and built by us with our needs in view. Such is Cupitt's non-realist philosophy. It implies, by the way, that we have no privileged knowledge of ourselves either, hence Cupitt's phrase "Empty radical humanism". It means "We alone improvise our knowledge about everything - including even ourselves".
 
    In religion, the move to non-realism implies the recognition that all religious and ethical ideas are human, with a human history.  We give up the old metaphysical and cosmological way of understanding religious belief, and translate dogma into spirituality.  We understand all religious doctrines in ethical and existential terms, as guiding myths to live by, in the way that Kant, Kierkegaard and Bultmannn began to map out.  We abandon ideas of objective and eternal truth, and instead see all truth as a human improvisation.  We should give up all ideas of a heavenly or supernatural world-beyond. Yet, despite our seeming scepticism, we insist that non-realist religion can work very well as religion, and can deliver (a form of) eternal happiness. Cupitt sees his religion of life as the "Kingdom theology" that historic Christianity always knew it must eventually move to, after the end of the age of the Church and the arrival of a religion of immediate commitment to this world and this life only.
 
- Don Cupitt (March 2006)
 


게시물수 90건 / 코멘트수 33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90 성 & 젠더 정체성은 참 많고 다양하다! 미선 1608 10-13
89 보수-진보 성서관 비교 & 정경 외경 확정 여부 미선 2184 06-27
88 의과대학 교수들이 만든 의학 만화 미선 7614 04-08
87 Rollin McCraty, "Heart-Brain Interactions, Coherence, and Optimizing Cognitive Skills" (1) 미선 16985 12-15
86 [펌] 과학적 회의주의자가 본 한의학과 대체의학 (한정호) (1) 미선 41077 07-08
85 수운의 시천주 체험과 동학의 신관 (김경재) (1) 미선 8927 05-03
84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신학의 변혁 (필립 클레이튼) 미선 7104 02-06
83 진화론에 대한 다섯가지 오해(Mark Isaak ) 관리자 8719 01-25
82 [펌] 이천 년 그리스도교 교회사 중요한 사건 연대 정리 관리자 7926 06-26
81 체화된 인지에 대하여, 뇌, 몸(신체), 환경은 하나라는 강한 외침 (이정모) 미선이 8024 02-03
80 안병무의 신학사상,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을 중심으로 (박재순) 관리자 6972 01-31
79 다석 유영모의 도덕경 한글본과 영역본(Legge) (3) 관리자 9234 01-31
78 연결체학(connectomics)에 관하여 미선이 9769 01-25
77 유교경전, 새천년표준사서 종합대역본 자료입니다. 관리자 6542 01-19
76 [펌] 오링테스트 및 사이비 대체의학 비판 미선이 15309 12-19
75 <몸과 문명> 느낌과 감각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미선이 6732 12-17
74 [박노자 칼럼]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의 공통 소망 '목적의 왕국' (1) 노동자 6768 08-07
73 [지리산 바람] 때로는 이혼(離婚)도 / 한성수 노동자 6030 08-01
72 [프레시안] "세상 사람들이여, '사탄의 시스템'을 두려워하라!" / 김두식 (1) 노동자 6643 07-31
71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모색 / 김윤성 노동자 6506 07-27
70 예수목회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 홍정수 노동자 6346 07-22
69 폴 틸리히의 종교 사회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원리 노동자 7086 07-21
68 [한국민중신학회발표] 제국의 신학에 대항하는 통합적 약자해방신학 (2) 미선이 8101 05-07
67 [구약] 종교다원주의 or 토착화 신학의 정당성을 구약성서에서 발견하기 (김이곤) 미선이 6563 04-25
66 [구약] 출애굽 해방 사건의 구약신학적 의미 (김이곤) 미선이 7339 04-25
65 [펌] 리더쉽 이론 미선이 11111 03-13
64 진화론, 생명체, 그리고 연기적 삶 / 우희종 미선이 7391 01-21
63 비폭력대화 주요 구절들 미선이 6830 08-26
62 세계공황과 한국경제의 나아갈 길 (김수행) 미선이 7139 06-29
61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 (석오진) 미선이 8361 06-02
60 마음의 지도(맥그로이) 미선이 8324 05-22
59 관상기도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수행 방법들(이건종) 미선이 7964 05-02
58 이슬람의 영적 가치관과 생활 속 수행 (이희수) 미선이 5873 05-01
57 새로운 민중신학과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정강길 6655 04-20
56 밑으로부터의 세계화/지역화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응 (김영철) 미선이 11334 04-19
55 다원사회 속에서의 기독교 (정진홍) 미선이 7378 04-17
54 영성의 평가와 측정에 대한 연구 자료들 미선이 6394 03-31
53 [자료강추!] 인도철학사 (길희성) 미선이 7321 03-02
52 기업적 세계화의 뿌리와 그 열매: 신식민주의와 지구촌의 황폐화, 세계인의 빈곤화(김정숙) (1) 미선이 7772 02-05
51 [강추!] 부자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채만수) (3) 미선이 15531 04-22
50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유정원) 정강길 8190 05-20
49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김경재, 오강남) 정강길 9609 04-28
48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강길 10804 04-27
47 이안 바버가 보는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 유형 (김흡영) 정강길 11089 07-16
46 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장윤재) 정강길 8241 01-07
45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경재) 관리자 7432 11-12
44 竹齋의 현재적 그리스도론 (김경재) 정강길 7530 05-06
43 경험은 믿을만하며,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황희숙) (1) 미선이 7568 01-07
42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갈릴리 복음'으로 돌아가야 산다! (김경재 교수) 미선이 6982 01-06
41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정진홍 교수) (1) 관리자 7598 12-15
40 진리란 무엇이며,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한전숙) (1) 미선이 7857 12-01
39 “복음주의, 알고 보면 기득권주의” (1) 미선이 6331 11-28
38 기존 기독교인이 동성애혐오증을 가장 크게 지녔음을 말해주는 조사자료들 미선이 6232 11-28
37 영성에 대한 원불교 교리적 고찰 (백준흠) 미선이 6409 11-21
36 '죄'와 '구원'에 대한 전통신학의 한계와 과정신학적 해석 (김희헌) 관리자 7028 11-02
35 영성과 영성수련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강길) (3) 관리자 6952 11-02
34 21세기의 종교-새로운 영성을 위하여 (길희성) (1) 미선이 7562 10-15
33 현대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 (오영석) 미선이 6467 10-14
32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이숙진) (1) 치노 8175 10-01
31 [기조강연 전문]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디서 오나? (길희성) (1) 관리자 7384 10-01
30 [참조] 세기연의 월례포럼 자료들은 '세기연 월례포럼' 게시판에 따로 있습니다. 관리자 6030 07-29
29 SBS'신의 길 인간의 길' <제4부 길위의 인간> 전문가 인터뷰 정리 미선이 9568 07-29
28 프레크 & 갠디, 『예수는 신화다』(국역판 전문) (4) 미선이 9601 07-20
27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 학자들의 SBS취재 인터뷰 내용 미선이 7880 07-06
26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 김민웅 마루치 7437 05-21
25 [펌]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1) 고돈 린치 7515 02-27
24 역사적 예수 제3탐구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 (김덕기) 정강길 7472 02-21
23 희랍 동성애의 특성과 사회적 역할 마루치 6917 02-15
22 몰입 (나에 대한 최고의 순간이자 그것 자체가 행복인 순간) 관리자 7889 09-12
21 예수 교회 예배 주보 표지를 장식할 '예수 이후의 예수들' 관리자 7935 08-03
20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초기지, 공동체 운동에 대한 좋은 자료들 관리자 9537 07-02
19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관리자 11549 06-27
18 김경재 - 한국교회와 신학의 회고와 책임 정강길 7098 06-06
17 이성정 -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강추!) 관리자 9088 01-27
16 행복 보고서 정강길 8040 01-18
15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3) 성직자 및 종교단체에 대한 평가 관리자 6982 01-06
1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2) 한국인의 종교관과 의식구조 관리자 9367 01-06
13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 한국인의 종교실태 관리자 8698 01-06
12 우리나라의 3대 종교-불교/개신교/천주교- 분포 지도 (*통계청) 관리자 15877 12-15
11 종교 인구 20년간 어떻게 변했나? (*통계청) 관리자 13546 12-15
10 한국 종교계는 치외법권지역인가? 관리자 9029 11-24
9 보수 기독교인들 특히 C.C.C가 널리 전파하는 <4영리> 자료 관리자 11745 10-27
8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김준우 11017 10-21
7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강추) 돈큐빗 9392 10-07
6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잠농 통프라스트) 관리자 9283 10-04
5 숫자로 보는 한국 장로교의 정체 (3) 이드 16048 06-21
4 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그것이 알고 싶다! (강추) 미선이 13357 05-31
3 [펌] 니케아 회의 시대 (313-590) 관리자 16630 05-30
2 [펌] "미국은 神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는가?" (1) 미선이 8233 05-17
1 [유다복음서 전문]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미선이 15318 04-28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