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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펌]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글쓴이 : 고돈 린치 날 짜 : 06-02-27 05:12 조회(7527)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g001/59 


비록 나 자신이 아직까진 외국에 나간 적은 없으나 나는 외국의 이런 글들을 접할 때마다
현재 개인적으로도 표방하고 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에 대한 잠재적 지지와 예증을
이미 전세계적으로도 확인하는 느낌이라서 어떨 때는 뜻모를 희열마저 느낀다..
즉, 아래의 고돈 교수의 얘기는 현재 유럽과 미국의 종교신앙의 현상들을 보면서
이제 교리 전통을 강조하는 기존 기독교로서는 더이상 설득력 없고
<새로운 기독교>로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시대적 징후들을 파악한 얘기인 것이다..

나 자신은 고든이 말하는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의 실체가 결국은
본인의 <새로운 기독교>가 지향하는
1.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한 기독교
2. 오류와 비극에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
로 요약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이것은 1번인 삶의 증진을 모색하는 <현실적 합리성>과
인간의 한계를 상정해두고 있는 2번의 <궁극적 신비성> 사이의
긴장과 균형으로서의 기독교라는 사실이다..

그외 다른 그 어떤 신조나 교리들을 종교 안에 상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 한 일이 될 수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진리, 예수, 성령, 교회 등등 이러한 대상들이 그 교리적 틀 속에 가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참다운 교리이고 혹은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세 안에서 <삶의 증진>으로서 지속적으로 확인된다고 본다..
따라서 궁극적 합리성은 현실적 유용성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썰이 약간 길었지만, 어쨌든 아래의 글은 매우 읽어볼만한 글이라고 생각되어진다..


=====================================================================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고돈 린치 (영국 버밍험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학자들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일반적으로 충실한 연구에 기초하여 현재 진행 중인 학문적 논쟁을 자신의 분야에서 연결시키는 무거운 논문을 써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이 짧은 글에서 나는 그리스도교의 신조적 형태(credal form)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신앙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내가 여기서 신조적 그리스도교(credal Christianity)에 관해 쓸 적에, 나는 특정한 종교현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즉 제도적 교회와 교회가 지난 2천년 동안 발전시킨 구체적 신조들과 교리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믿음들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뜻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성령, 나, 세계에 관한 특정한 개념적 명제들에 대해 내가 지적으로 동의하는 한, 나는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내가 니케아 신조에 완전히 동의하는 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혹은 좀더 대중적인 차원에서, 복음주의적인 기본 교리, 즉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복음주의적 기본 교리에 동의하는 한, 내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므로 신조적 그리스도교는 근원적으로 그와 같이 근본적인 신학적 진리들 속에 계시된 진리에 나의 이성, 감정, 생활방식을 맞추는 문제이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이런 식의 신조적 그리스도교 형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이상하다고 여길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교리들과 신조들에 대한 믿음, 그 교리들과 관련된 생활방식에 충성하는 일은 과거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정통의 근본적인 요소들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신조적이며 정통적인 그리스도교가 계속해서 자신들의 삶에 큰 의미를 주며 치유하고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는 증거는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중요한 문제는 지난 2백 년 동안 서구 문화는 점차 종교신앙에 대해 엄청난 태도변화를 목격해왔다는 사실에 있다. 즉 삶의 의미가 성경이나 교회와 같이 외부적인 권위에 의해 계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에서부터 점차 진리는 우리들 자신의 체험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다는 믿음으로 바뀌어왔는데, 이런 변화는 이제 다시 되돌릴 재간이 없는 변화이다. 종교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중개된 "보다 높은" 진리의 원천에 충성할 것을 강조했던 태도는 점차 우리들의 참다운 자아의 정직함과 그 참자아를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강조로 바뀌었다. 선함이란 종교당국자들이 정해놓은 도덕규칙들을 따르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관념은 점차로 그런 도덕규칙들이 실제로는 그 종교당국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의심으로 바뀌었으며, 그런 도덕규칙들이 흔히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지 못하는 규칙들이라는 의심으로 바뀌었다.

이런 입장을 장황하게 나열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지만, 오늘날 종교적 근본주의의 여러 형태들이 끈질기게 세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면, 이런 문화적 변화가 단순하지도 않고 한결같은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종교의 신조들과 교리들 가운데 진리가 계시되어 있다고 강조하는 것에서부터 삶의 의미를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것에로 그 강조점이 이동하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역사학자, 사회학자, 종교학자들이 더욱 많이 지적하는 사실이 되었다.

교회는 (특히 서구유럽에서) 이런 문화적 변화에 직면하여 잘 대처하지 못해왔다. 영국에서는 오늘날 서점들 안의 분야별 면적 할당에서, '종교분야'의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차지하는 것이 '마음-몸-영혼 분야'인데, 여기에는 스스로-돕기, 건강 관련 서적들, 다양한 뉴에이지 영성 관련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주일날 교회당에 가서 설교에 귀기울이기보다는 오히려 일반 심리학, 혹은 최근의 불교관련 인기 서적을 읽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은 부분적으로 내가 말한 문화적 변화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우리의 이 세상의 삶을 초월해 있는 초자연적 영역에 대한 관심과 우리의 이 세상의 삶이 끝난 다음의 천상의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점차로 우리의 삶의 의미와 선함과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시간 동안뿐이라는 믿음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오늘날 영국의 탁월한 종교사회학자 두 사람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삶의 영성"이 꽃피고 있는 문화이다. 신조적 그리스도교는 우리 사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을 초월해 있거나 이 세상의 삶이 끝난 다음의 형이상학적 영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서 우리의 일생 동안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을 얻고 싶어하는 판국에, 그런 신조적 그리스도교는 현실적합성이 별로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전통적이며 신조적인 그리스도교에 깊이 만족해하며, 이 도전이 많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중요한 틀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신조적 정통주의를 간직한 많은 교회들, 특히 복음주의 형태의 교회들은 이런 정통주의를 오늘날의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위협을 느끼지 않게 전달하는 방법에 숙달된 교회들이다. 이런 교회들은 예배시간에 대중음악을 사용하거나 멀티미디어를 이용하고, 윌로우크릭 교회의 방문자 예배 형식, 혹은 영국에서 출발한 알파 코스와 같은 새로운 전도 전략을 개발하여, 사람들을 자신들의 핵심적 믿음 속으로 유도하기 위해 시간과 상상력과 자원을 퍼붓기에 열심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투자가 성공을 거두어, 적어도 영국에서는 그런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다른 교파들보다 교인 숫자 감소가 덜한 편이다.

그러나 이런 복음주의 사업가들이 제한적이나마 성공을 거두는 현실의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이런 신조적 형태가 현대인들의 삶에 현실적합성이 없다는 사실을 대다수 사람들에게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어느 정도 수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이것은 미국의 많은 대형교회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교인들의 수평이동에 기인하는 것이다), 명백한 사실들을 직시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 그 명백한 사실들이란 신조적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에게 비호감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신조적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소수자들 이상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안이 있는가? 신앙을 근본적으로 특정한 종교적 교리들에 대해 동의하는 것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종교적 신앙을 상상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는가? 이제부터 나는 그 대안이 어떤 모습일 것인지에 관해 간단히 그려보기로 하겠다.

우선, 나는 탈신조적 그리스도교(post-credal Christianity)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상 신비주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 신앙형태의 중심에는 우리가 신비와 진리의 현존 가운데 살고 있다는 인식과 우리는 개인적 삶을 넘어 확장되는 실재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인식이 놓여 있다. 이런 신비주의적인 인식은 더욱 확대되어 우리의 존재가 사랑과 은총이라는 더욱 폭넓은 맥락 속에서 사는 것이라는 심원한 깨달음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신비주의적 인식의 본래적 부분은 이런 진리들의 표현불가능성이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부정의 길'로 일컬어져 왔었다. 즉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어떤 교리나 고백문 너머에 계셔서, 알 수 없는 구름 속에 숨어계시어 단지 사랑에 투신함으로써만 그 구름을 뚫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느님의 표현불가능성에 대한 이런 믿음은 신조적 그리스도교의 확신, 즉 우리 존재의 진리들은 일정한 개념들과 신학적 주장들로 확실하게 축소될 수 있다는 확신과 완전히 대조적이다.

내가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신비주의적 인식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궁극적 진리와 실재의 성격에 관해 말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반드시 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말하려는 모든 시도가 본질적으로 시(詩)적이라는 점, 즉 진리 선언은 그 진리가 최종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말 속에 포착될 수 있다는 신조적 억측보다는 오히려 그 말 너머에 있는 진리를 가리키는 한, 그 진리 선언이 성공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시(詩)는 유동적이며 살아 있으며 창조적인 힘이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곧 죽거나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인습이 되는 고정된 형식이 아니다.

이런 신비주의적 인식에 덧붙여, 내가 꿈꾸는 탈신조적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행복과 치유와 의미를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는 그리스도교이다.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의 변혁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열심을 그 특징으로 한다.

교회 역사에서 복음서 이야기들에 대한 가장 놀라운 수정 가운데 하나는, 나사렛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로부터 그리스도교가 근본적으로 특정한 교리들을 고수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그 자신이 목격한 대로, 이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증인(목격자)으로서 이해했다. 그리고 예수가 하느님의 통치가 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징조들을 보았을 때, 그는 특정한 변혁의 순간들 속에서 그 나라를 보았다. 그 순간들이란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절름발이가 뛰게 되고, 귀신들려 억압당하는 이들이 해방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 즉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어서 그 가난한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사람들로 존경을 받게 될 시대가 오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 순간들이었다. 예수는 교리적 정통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예수의 사명은 여기 지상에서의 변혁을 초래하는 것이었지, 사람들을 특정한 믿음체계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시작한 운동이 점차 제도화됨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변혁에 대한 그의 강조가 때로 잊혀지고 그 제도의 욕망, 즉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관한 그 특정한 사고방식에 동의하도록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나를 흥분시키는 탈신조적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우리 존재의 본성에 관해 주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직면하여 신비주의적 겸손을 유지하는 그리스도교로서, 이런 진리들의 궁극적인 표현불가능성을 인식하는 그리스도교이다. 또한 우리의 삶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시도에서 시적인 표현들의 가치를 인식하며, 우리를 하느님의 중심에 있는 침묵 속으로 인도하는 관상기도와 명상과 같은 수련의 가치를 인식하는 그리스도교이다.

이런 형태의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 운동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로서, 이 세상에서의 삶의 그 모든 아름다움, 공포, 환희, 슬픔, 그리고 줄일 수 없는 복잡성을 진지하게 다루는 그리스도교이다. 그런 운동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치유, 진정성, 행복이 증진될 수 있는지를 성찰함으로써 변혁적인 운동이며, 그런 변혁이 일어나는 때마다 축하하는 운동으로서, 그런 변혁을 갈망하지만 아직 그런 변혁을 체험할 수 없는 사람들 곁에 함께 하는 변혁운동이 되고자 한다. 그런 운동은 예술가, 영화감독, 음악가, 작가 등, 자신들의 작업을 통해 인간의 온전함을 돕는 것이 무엇이며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역사 속의 현재 시점에서 진정한 인간 존재가 뜻하는 바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우리에게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훨씬 더 많은 공통 근거를 찾는 운동이다. 더 나아가 그런 운동은 영적인 구도자들, 즉 종교당국자들의 지시사항들을 따르는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우리 존재에 대해 깊은 신비감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의 변혁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는 영적인 구도자들에게 훨씬 더 효과적인 다리를 제공해주는 운동이다.

그런 탈신조적 형태의 그리스도교는 교회들과 여타 그리스도인 집단 안에서 거점을 마련할 수 있지만, 그런 집단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의 기초에는 이 세상 속에서의 의미, 진리, 치유, 은총의 현존이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현존이지만, 이 현존이 그리스도교 집단이나 상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의 나의 주장은 단순한 것이다. 신조적 그리스도교는 오늘날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신비와 근본적 진리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더욱 심원한 것이 되도록 만드는 데 효과적이지 못한 수단이다. 그런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밖에서 진정한 의미와 치유와 선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축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조의 순수성과 교리적 확실성을 귀중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신비주의와 변혁을 가치있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 형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중요한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런 가능성이 이미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탐구되고 있으며, 진보적 그리스도교를 위한 센터(CFPC)는 분명히 이런 작업을 위한 네트워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미래에 탈신조적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발전하고 대두할 것인지는 매우 흥미있는 질문이며, 아직은 그 대답이 개방되어 있는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많은 질문들을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독자들에게 상당히 불만을 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꿈이란 흔히 그런 것이다. 꿈은 잠시 동안 우리에게 다른 상태에 대한 비전을 보여준 다음 사라짐으로써, 그 의미에 관해 궁금증만 갖게 한다. 우리의 궁금증과 상상력이 계속 자극을 받게 되고, 우리가 계속 꿈을 꾸게 되고, 그 꿈을 살아내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탐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 시대가 갈급하게 부르짖고 있는 참다운 종교적 갱신이 다소간 현실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www.historicaljesus.co.kr/zboard.php?id=article

제얼 (08-09-18 01:52)
 
부족하지만, 동방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연구하면서 정통 교리를 극복하고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고든 교수님과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이 분의 글에서 탈신조적이란 용어는 신화(떼오시스)적 영성으로 보는 것이 어떤가 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래 섹트적이고 충실하고 삶의 기인한 신앙과 신학, 다스림의 영성과 크게 다르지 않아 어느정도 전통적인 개입성도 얻을 수 있고, 충분히 심오하고 축제적이기까지 하므로 대단히 고려해볼만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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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프레크 & 갠디, 『예수는 신화다』(국역판 전문) (4) 미선이 9618 07-20
27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 학자들의 SBS취재 인터뷰 내용 미선이 7904 07-06
26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 김민웅 마루치 7452 05-21
25 [펌]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1) 고돈 린치 7528 02-27
24 역사적 예수 제3탐구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 (김덕기) 정강길 7483 02-21
23 희랍 동성애의 특성과 사회적 역할 마루치 6926 02-15
22 몰입 (나에 대한 최고의 순간이자 그것 자체가 행복인 순간) 관리자 7902 09-12
21 예수 교회 예배 주보 표지를 장식할 '예수 이후의 예수들' 관리자 7995 08-03
20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초기지, 공동체 운동에 대한 좋은 자료들 관리자 9547 07-02
19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관리자 11573 06-27
18 김경재 - 한국교회와 신학의 회고와 책임 정강길 7110 06-06
17 이성정 -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강추!) 관리자 9101 01-27
16 행복 보고서 정강길 8050 01-18
15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3) 성직자 및 종교단체에 대한 평가 관리자 6992 01-06
1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2) 한국인의 종교관과 의식구조 관리자 9379 01-06
13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 한국인의 종교실태 관리자 8712 01-06
12 우리나라의 3대 종교-불교/개신교/천주교- 분포 지도 (*통계청) 관리자 15899 12-15
11 종교 인구 20년간 어떻게 변했나? (*통계청) 관리자 13566 12-15
10 한국 종교계는 치외법권지역인가? 관리자 9039 11-24
9 보수 기독교인들 특히 C.C.C가 널리 전파하는 <4영리> 자료 관리자 11756 10-27
8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김준우 11077 10-21
7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강추) 돈큐빗 9407 10-07
6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잠농 통프라스트) 관리자 9302 10-04
5 숫자로 보는 한국 장로교의 정체 (3) 이드 16095 06-21
4 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그것이 알고 싶다! (강추) 미선이 13372 05-31
3 [펌] 니케아 회의 시대 (313-590) 관리자 16657 05-30
2 [펌] "미국은 神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는가?" (1) 미선이 8244 05-17
1 [유다복음서 전문]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미선이 15344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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