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68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68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자유토론광장
문화 예술 Cafe
생활 나눔 Cafe
책과 이야기
Sayings
한 줄 인사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531
어제 690
최대 10,145
전체 2,954,233



    제 목 : 세기연은 명칭을 세계와 종교 변혁 연구소로 바꾸는 것이 낫지 않을까?    
  글쓴이 : 거시기 날 짜 : 08-10-31 17:18 조회(11233)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f001/1486 


 
가입인사 후 아주 오랫만에 글을 올리네요.
 
정강길님의 숙주논쟁 또는 다비아에 대한 글이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게 하는군요.
 
보수기독교에 진보기독교가 숙주노릇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다, 다비아의 성격은  둘 사이의 혼합물이고, 대체로 보수에 경도되어있다는 취지의 글이고요.
 
이글에 댓글로 지목사님은, 그나마라도 어디냐하는 취지의 글을 달았더라구요. 이 글에 대한 다른 분의 글을 보니, 좋게보아서 디딤돌 정도이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글입니다.
 
제 스탠스부터 말해야 되겠지요? 전 다비아 정목사님의 위치도, 소화 못하는 보수입니다. 개혁적 복음주의 정도라고 이해하시면 될 듯하네요.
 
개혁적 복음주의 에서는 아직도, 바르트의 신학은 부분적으로 소화할 입장일테구요.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오히려 자유주의 쪽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정목사님의 스탠스를, 강길님은 보수정도로 보고 있지만, 보수입장에서는 자유주의로 경도된 입장으로 보고 있고요.
 
강길님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시작해서, 최근의 행보를 보면,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적절한 말이 없네요. 풀어서 정의하면, 기독교를 모태로한 신의 존재를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자 정도로 봅니다.
 
제가보는 진보는 진보적 기독교는 향린교회의 조정현 목사정도 입니다. 근저에는 문익환목사님이 있고요. 더 뒤로가면, 김재준목사님이 있을테고요.
 
자, 가치중립적인 신학이 있다고 전제한다면, 다들 나름대로 입장이 있을 테고 변명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삶의 정황은, 사실 가치의존적인 판단에 서 있는 자신들의 담론을 좀 중립적으로 끌어내려는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그래서 서로 밀어내기를 하는 거지요....
 
딱 2 가지만 물어볼게요.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도 예의가 있거든요. 님의 말처럼, 어느 한 종교를 우위로한 포섭은 매너없는 행위이지요. 아마도 상대방 종교에 대한 모욕일 겁니다.
 
님의 스탠스가 제가 말한 매너있는 종교다원주의자의 위치라면, 사실 다원주의자 입장에서, 기독교를 가타부타하는 것은 매너없는 행위라고 봅니다.
 
여기서 가타부타라는 말은 종교적 현상에 대해 침묵하라는 말은 안닙니다.
 
진짜 궁금하거든요. 어느 때보면,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루돌프 오토의 누멘적인 종교인의 모습도 보이지만, 어찌보면, 불교의 일체개공의 종교인으로, 또는 무신론자로 보이기도 합니다.
 
무신론자처럼 보인다는 말은, 좀 설명을 드리면, 초인으로서의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1. 진보기독교도 스펙트럼이 있거든요. 진보 기독교인이시라면, 어디 이신지 궁금하고요.
 
2. 글을 보면, 종교다원주의자 처럼 보이거든요. 일단 그게 궁금하고요. 그렇다면, 올바른 종교란 무엇인가의 관점에서 기독교 비판이 있어야 될 듯하고요.
 
어느 쪽이시죠?
 
 
기독교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스탠스에 따라서 처방이 달라지듯이, 일단 어느 쪽인지 알고 싶군요.
 
 
 
미선이 (08-11-01 07:09)
 
세기연의 위치가 자리매김 하는 진보 기독교의 스펙트럼에 대해선 이미 밝혀놓은 바 있습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d002/15 참조

게다가 저희 입장은 '다원주의'라기보다 <열린 중심주의> 입장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http://freeview.org/bbs/tb.php/d002/36 참조

세기연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예수와 성서를 먼저 중심으로 삼는 한 기독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단지 정체성의 문제는 불가피한 선택의 차원에서 개입되는 것뿐이지
결코 그것이 절대화될 수는 없다고 볼 따름이죠.

이곳 세기연의 신학적 입장을 좀더 일관성 있고 체계 있게 파악하시려면
차라리 졸저 <미래에서 온 기독교> 라는 책을 권해드리고 싶으네요.

만일 저희가 기독교 변혁이 아니라 종교 변혁을 의도하려 했었다면
명칭은 이미 벌써부터 바꿨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적어도 가능하면
세기연 입장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오해만큼은 추호도 없었으면 하는 바램일 뿐입니다.

상대 입장에 대해 전체적인 파악이나 그 어떤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도 없이
그저 다원주의자, 무신론자, 회의주의자 등등 그렇게 보인다는 식의
모호한 느낌 혹은 억측을 내리는 막연한 인상 비평이라면 정말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시기 (08-11-02 00:56)
 
교제를 하는데도 예의가 있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글로써 말을 건네는 것에도 예의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요. 상대방의 글을 잘 읽고 지향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그러다보면, 서로의 지평을 확인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님의 표현대로 ‘열린 세계 이해’를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서있는 ‘지평에 대한 이해’가 중요할 겁니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 대해 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자신의 위치가 가치중립적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것으로 보고, 결국은 교제나 대화나, 자기의 사회경제적 담론을 최종심급으로 삼으려는 노력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으로 봅니다.

기독교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요. 교회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자신 또는 자신의 공동체가 최종적 기독교 이해라고 했을 때, 항상 그 절대화된 해석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그 반발은 그들의 세계 해석에 대한 또 다른 지배담론적 성격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그 배후에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어느 새 세계 이해에 대한 절대자로 등극하는 것을 패퇴시키는 하나님의 간섭이 배후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간섭의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가, 더 넓게 봐서는 종교가 포이에르바하나 리차드 도킨스가 보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의 투사 그래서 유적인간의 회복이 필요한 인간의 소외의 부산물이 아니라, 바르트가 제대로 직시하였듯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말 건넴’ 속에 정초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비신화화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자하는 인간의 오만을 비신화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통섭’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피조물의 인식론적 유한성과 잠재성을 안다는 것에서 시작할 것으로 보고, 그 말은 곧 인간이 접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이라는 한계 속에서 ‘표촉’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며, 잠재적인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수평선을 향해 무한히 다가오는 탄젠트 값이 결코 수평선과 접촉하지 않고 지나치는 모습과 비슷할 겁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마치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흐미하게’ 하나님을 인식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윌슨의 ‘통섭’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희미하게 거울을 보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이해 또는 세계이해에 필요하다고 보고요. 그 인식‘너머’에 있는 존재의 말 건넴 또는 자기 드러내심, 자기 계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포섭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사실의 학문으로서 자연과학이 추출한 자연의 인과성만으로 세상을 보는 환원적인 세계 이해를 넘어서는 자세이며, 자연과학의 이해를 넘어서는 우발성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지향하는 세계이해라고 봅니다. 다비아의 정목사님의 표현을 빌리면, 인식론적 한계를 초월(포월)하는 존재론적 세계이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통섭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대상 또는 피조물로서의 자기 이해 및 낮아지는 자세가 요청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은 단지 인식의 한계 속에서 그 표촉되는 점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각 인간들, 또는 공동체의 세계이해는 자신들의 표촉점을 지배담론으로 삼고자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기에 결코 가치중립적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며, 가치의존적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가치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에, 자신이 어느새 ‘통섭하는 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많은 부정적인 종교적 현상이 뒤따르게 되는 거죠. 님의 글 중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들 코끼리의 각 부분만을 접촉한 사람들이 코끼리의 모습이 이러이러하다고 강변하는 자세 속에서 이런 모습을 봅니다. 자기 담론을 지배담론으로 삼는 모습들이 기독교회사에서도 많이 등장하죠.

처음에는 다들 선한 의도로 시작했을 겁니다. 그 근저에는 신이해 또는 인간의 세계이해에 대한 고민과 어려움이 담겨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의 역사와 동행했고, 하시는 그 신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경험했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신, 그것도 모든 물질의 형태를 거부하는 신의 모습을, 단지 부분을 ‘표촉’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속에서 설명해야한다는 인간의 모습이, 성서기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페르시아 또는 바벨론 문화를 통해서 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 또는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자로서의 신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헬라문화를 통해서 이를 나타내거나 변증하고자 하는 흔적이 있고요. 교부들이 플라톤의 철학을 원용하고, 어거스틴이 이를 발전시켜서 신 이해를 한 흔적이,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콜라신학에 차용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루터의 경우처럼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흐름도 있었지만,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사실 기독교회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내지 ‘해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독교회사가 각 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재해석했다는 사실은 무신론자들이나 불신자들의 말처럼, 기독교회사가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표현 불가능성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야한다는 어려움을 증명하는 것으로 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의 정황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표현했다는 것은 문화와 유리된 현재의 기독교는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아야 될 것으로 봅니다. 삶과 유리된 하나님이해는 사실 허구거든요. 삶과 유리된 하나님 이해는 필연적으로 토마스 쿤의 말처럼 패러다임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 패러다임적 변화가 가능하게 되는 조건들이 성숙해야합니다. 자신의 담론이 지배담론이 되려면, 일단 다양한 증거와 세력이 필수적이겠지요. 종교 개혁자들을 예로 들어볼까요?  교황과 대척점에 서서 그들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봉건영주들과 그들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반면에, 루터가 농민투쟁을 정죄한 것은 그들의 이해에 반하기 때문에 좌절된 것이고요. 칼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스위스라는 기반이 있었기에 개혁이 성공했으며, 그래서 그들의 종교개혁을, 제도권적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반면에,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가장 바람직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정죄되고 변방화됩니다. 시대와 ‘함께한’ 개혁이 성공한 것이죠. 여담으로 미국의 아미쉬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의 삶의 정황은 그들의 신학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대조사회나 대안사회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의 개념에 대한 재해석이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삶의 정황’을 배제한 하나님 이해가 얼마나 위험한지 좀 설명을 드려야겠네요. 보수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많은 것처럼, 소위 진보라는 분들이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해서 설명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시고, 그 경험을 인간들은 자신의 언어 속에서, 표현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 역사 속에서 동행하신 분을 자신의 신앙고백적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들입니다. 두가지 사태가 있는데요. 하나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모습과, 인간의 인식 불가능성을 아시고, 스스로 인식 범위로 낮아지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 존재의 불가시성이 가시성으로 바뀌었다는 사실과 전능성에 대한 스스로의 제한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겠지요. 또한, 성령의 보편적 임재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확증된다는 점에서, 인내천의 가능성이 열린 겁니다. 이것이 초월하시면서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3위일체의 하나님 성격으로만 해석이 가능한거죠.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심에 대한, 인간의 이해의 발전이 성서에 나옵니다. 특히 3위일체로서의 신이해는 제 2의 성서라고 볼 수 있는 기독교회사의 모습에서 볼 수 있죠. 어거스틴이 그 선두에 있을 것이며, 바르트 해석, 칼 라너의 해석은 그 연장선 속에서 봐야 할 겁니다. 특히 라너의 경륜적, 내재적 3위일체의 통전적 이해는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각 삶의 정황 또는 역사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시고, 그분의 드러내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신앙고백의 언어로 표현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보수적 기독교인과 진보적 기독교인들 일부는 이 사실을 망각합니다. 한쪽은 삶의 정황 속에서 드러내는 실체를 포착하지 못하고, 표피 또는 껍데기만을 보는 상태가 돼서 문자속에 하나님을 가두어두려고 합니다. 루터의 표현처럼 죽은 문자를 보다가 살리는 영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하는 것이고, 이것은 이미 메시아를 염원하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정작 자신들의 눈앞에 오신 메시아를 포착하지 못한 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진보적 기독교인들 일부는, 문자를 내치다가 살리는 영까지 내쳤다고 봅니다. 슈바이쳐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는 삶의 정황을 배제하고서는 이해가 안되죠. 시작은 온전한 예수를 찾고자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과는 예수의 신성을 비신화화하는 당시의 역사적 철학적 이성의 우위에 둔 사조에서 그 근원이 있을 겁니다. 결과는 히틀러의 나치에 무력한 문화개신교의 비윤리적 모습만 보여줬고, 바르멘 선언을 통한 본 회퍼의, 바르트의 자세에서 볼 수 있듯이 소위 진보 또는 자유주의 신학의 허약성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인으로서 예수를 통전적으로 보지 못하고, 예수를 비신화화한 결과입니다. 비신화화 해야될 것은 인간의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이지, 하나님이 아니지요. 진정한 ‘통섭’이란 신이 인간을 포섭하는 것일 겁니다. 님의 글 중에서 보니, 칼뱅을 마치 살인자(?)로 묘사를 한 것을 봅니다. 그 시대에 칼뱅의 한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 그를 해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또는 인간의 자기이해, 세계이해는 역사적 삶의 정황을 떠나서는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양파처럼 겹겹이 싸여있는 실재를, 그것도 단지 표촉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인식적 한계를 가지고, 무시간적으로 해석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오류를 낳을 뿐이죠. 공관복음을 봐도, 실재이신 예수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들 자신의 공동체의 삶의 정황에서 이해를 한 것이고, 각자의 의도에 따라서 배열과 배치가 다릅니다. 초기에는 이런 모순을 교정해보고자 통합복음서를 만들려고 한 흔적이 있죠. 디아테사론이라고요. 시리아지역 공동체에서 만든 것이지만, 결국은 원위치됩니다. 기독교의 다양성을 인정한 겁니다. 즉 다양한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겁니다. 예수에 대한 이해도 편차가 있습니다. 복음서에서의 이해와 바울의 이해가 편차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최근에는 부각이 됩니다. 바울이 본 예수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죠.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인정이 되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그 한계도 봐야할 겁니다. 그것도 그가 살았던 삶의 정황 속에서....

기독교 역사는 참으로 다양성 속에서 하나님을 본 역사입니다. 다양한 삶의 정황 속에서 만난 하나님 고백이죠. 그래서 역사적으로 자신의 담론, 또는 하나님 이해를 최종심급으로 올리려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철퇴가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의 모습에서, 최근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우리나라의 민중신학, 생태신학, 여성신학 등등은 다 이런 시도라고 볼 수 있죠. 이 모든 시도들은 사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첫 계명, 즉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네 앞에 두지마라’라는 부정명령에서 시작된 것이고요. 역사는 다 그 주해일 뿐입니다. 역사는 인간의 계획을 패퇴시키는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심’의 역사이거든요. 예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제 2 긍정명령은 사실, 첫 부정명령의 확장입니다. 재 해석입니다. 불가시적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 가시적 인간 또는 생명사랑에 대한 동어반복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문제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시작됩니다. 이말은 곧 인간의 인식적 한계에서 표촉된 하나님의 이해를 말하는 것이고, 인간은 통섭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포섭의 위치에서, 즉 가치중립적인 위치가 아니라 가치의존적인 자리에서 삶의 정황을 봐야한다는 말일 겁니다. 다시 이 말은 인간의 하나님 이해가 사실은 인간의 자기 이해를 의미할 겁니다. 자기이해는 세계 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를 말할 것이고요. 필연적으로 삶의 정황이 다 다르기에 다양성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다만, 다양한 삶의 정황 속에서, 자신 또는 자기 공동체의 이해를, 지배담론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로 올리고자하는 노력들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그 정당성은 자신을 통섭의 주체로서 인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포섭된 자로서 자신의 담론을 얼마나 가치중립적인 방향으로 열어놓는 가에 있을 겁니다. 이 말은, 결국 자신의 담론이 얼마나 실재를 포함하고 있는가에 달려있겠죠. 그 실재는 창조주 하나님이실테고, 구속주 하나님 이실테고, 세계를 유지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얼마나 담고 있는가에 있을 겁니다. 즉 3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그분을 얼마나 담아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죠. 과연 진보와 보수 중에 어느 쪽이 더 실재를 더 담고 있을까요? 혹 실재를 찾다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혹은 연목구어를 하는 것인지 살펴봐야 할 듯합니다. 이건 진보, 보수 모두에게 해당되거든요. 

서론이 길었군요. 불필요한 논쟁을 불식시키고, 교제하고자 하는 논점에 집중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의도입니다. 

강길님의 댓글을 보니, 보수와 진보에 대한 설명글을 좀 읽어보라고 권하시네요. 다시 한번 정독을 했습니다. 보수에 대한 설명은,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고, 진보에 대한 설명이 3단계로 나눠진 것을 보니, 님의 진보에 개념의 변천과 모습이 보입니다. 저도 아마 님과 동시대이거나 좀 더 이른 시대 사람이라서, 같은 경험을 공유해 왔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 치열함이 차이가 있겠지요. 소위 보수기독교가 삶의 정황을 공유하지 못하고 피안의 세계로 도망치는 모습, 기독교를 개인 감정의 도피처로 여기는 모습, 게다가 오히려 기존 질서를 추수하는 모습에서, 기독교 자체에 대한 회의도 있었고,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 동참해서 같이 운동에 참여한 적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차안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서 오히려 그 안에 있는 영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회의주의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하고 님하고 차이점은 님은 아마도, 비슷한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갔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님의 새로운 민중신학 또는 살림신학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거든요.아마도 진실은 피안도 차안도 아닌 그 중간 어디 쯤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님의 분석은 그간의 치열한 상황인식의 결과라고 생각되어서 공감하는 바가 많습니다. 다만 복음주의에 대한 해석이 너무 편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만큼 포괄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해석한다면, 기독교의 보편성을 회복하자는 운동으로 봐야할 겁니다. 제 종파를 초월한 하나된 성령의 보편성 안에서 영성을 회복하자는 주의일 겁니다. 물론 에큐메니칼한 모습을 회복하자는 운동이겠죠. 논점에서 벗어난 것이니 이정도로 하고요.

결론 부분을 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이 님의 신학을 표현합니다. “진리 탐구 과정 자체를 중요시 여기는데, 여기서는 오류와 비극이라는 요인이 중요하게 취급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삶의 유용성과 적실성을 지향한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민중신학, 곧 살림신학(Salrim Theology)을 추구하는 현재 본인의 입장이기도 하다.”

위의 결론을 나름대로 풀어 보면, 기독교 안에서 진리탐구를 시작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진리탐구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부조리한 기독교 모습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자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유용성과 적실성이라는 말 속에서, 자신의 삶의 정황에 대한 올바른 하나님 인식과 해석, 적용을 추구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새로운 민중신학이고, 살림신학이라는 말이죠. 과정철학은 아마 베이스에 깔린 것이고요.

상황에 대한 인식은 저도 대동소이합니다. 신학에서 차이가 납니다. 저야 뭐 신학까지 할 정도는 아니니 별 이견이 없죠. 삶의 정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니까요. 다만, 보수와 진보의 인식이 좀 표피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그 안에 얼마나 실재이신 하나님을 품고 있느냐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껍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내용이 문제이지..... 내용물이 얼마나 실재를 포함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겉으로 다르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그 내용물 또는 진리에 대해서 좀 의견을 나누고 싶은 생각입니다. 왜냐면, 진리에 대한 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좀 다를 듯하고, 아마도, 여기 어디쯤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거든요. 요한 복음을 보면, 진리를 로고스로 표현합니다. 헬라어로 보면, 로고스는 예수님은 호로고스로입니다. 호로고스는 유일한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에서도 헬라문화를 수용한 모습이 보이기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는 지혜라는 의미가 있어서 유대 묵시문학운동의 모습도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유일한 진리라고 봤다는 거고요. 그 예수는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현현을 목도했거나, 아니면, 그분이 보내시겠다고 하신, 보혜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보혜사란 말이 좀 거북하다면, 루아흐 즉 성령이라고 옮겨진 그 분을 경험한 사람들일 겁니다.

레디칼하게 물어볼게요. 진리를 경험하셨나요? 좀 까칠한 질문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무례한 질문이거든요. 그렇지만,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로고스이신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호로고스를 아는 - 경험한- 분들은 많지 않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호로고스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더 직설적으로는 “불 받으셨어요?” 라는 말일 겁니다. 에둘러서 표현해 볼까요? 오토의 표현처럼 ‘성스러운 것’을 경험해 보셨나요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좀더 포괄적으로 표현하면, 음악이나 미술 속에서 나타나는 ‘숭고라는 것’을 경험해 보셨나고 묻는 겁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존재와 세계의 합일이라는 경험을 해보셨냐고 묻는 것이고요. 일체개공의 경험이 있냐고 물어보는 거죠. 좀더 풀어서 물어볼까요? 영원이 시간여행자인 인간과 만나는 표촉점인 카이로스를 경험해보셨나요?

이 경험이 제겐 매우 중요한 진리 판단 근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의 경험을 말하거나, 독서를 통해서 이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간 소외의 증거이자 자기 투사라고 합니다. 분명, 보수, 진보를 떠나서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자기 기만적인 상상의 산물을 가지고, 진리를 경험했다고 말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대, 또는 욕구를 패퇴시키는 진리를 만나는 경험이 있습니다. 진리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죠. 제가 드린 질문이 쉬운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일부분을 표촉한 피조물은, 그것도 거울처럼 희미하게 볼 뿐인 유한자는 칼라너의 말처럼, 그분의 ‘현현’ 앞에 침묵할 따름일 겁니다. 이런 경험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있는 겁니다. 있으시다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한계와 잠재성을 이해할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인간의 실존은 오직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관계이고, 그래서 피상적이고, 그 덧없음으로 인해서 잠재적입니다. 누구도 종말이 오기 전에, ‘마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본다고, 경험했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님은 진보, 보수를 나누었는데요. 저는 실재이신 그분을 얼마나 보았는가 여부로 진보와 보수를 나눕니다. 참보수는 인간 개인의 한계상황에서 만난 예수를 귀하게 생각하는 자들이고요. 때론 이 모습만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못난 자들입니다. 반대로, 참진보는 전태일의 모습에서 이한열의 모습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본 자들입니다. 그 예수는 김진홍 목사가 청계천에서 죽어가는 가난한 여인네를 등에 업고 하늘에 삿대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저주할 때, 등에 엎혔던 그 여인네였고, 몰트만의 말처럼,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지요. 같은 하나님을 봤지만, 그 모습에 홀려서 다 자기가 본 하나님이 진짜라고 우기는 모습이지요. 다들 코키리 다리 하나씩 잡고 이것이 코끼리의 참모습이다라고 하는 소경과 같지 않나요?

이런 ‘사시눈’이라도 뜨셨냐고 질문을 드린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모습을 다 본 사람이기에 양쪽을 조금 이해 합니다. 그래서 보수는 진보의 눈을, 진보는 보수의 눈을 가져야 온전히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 왜 예수가 그 나라를 씨앗에 비유를 했는지를 알 것으로 봅니다. 그 씨앗이 장성하여 그늘을 드리워서 새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보이고요.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개념은 대조사회나 대안사회의 중요성으로 발전되고 있다는 점만 말하고자 합니다.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로서의 교회의 모습이 달라진 거죠.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를 정죄하면서 내렸던 ‘밀과 가라지의 혼합’으로의 교회에서, 쯔빙글 리가 제세레파가 추구했던 급진적 종교개혁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보편교회의 이해가 증가되는 추세이고요. 제 생각으로는 중국의 형제교회의 모습에서 보듯이, 한국도 다양한 평신도 교회의 출현으로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열린 마음’을 말씀하셨는데, 아주 중요한 자세라고 봅니다. 문제가 다 거기서 시작된 겁니다. 역사 속에서 동행하신 하나님을 신앙고백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성서입니다. 성서 이후에 기독교회사는 때로는 전통의 모습으로, 정통의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이것도, 다 그들의 삶의 정황에서 본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요. 그 한계점을 포월하신다고 하면, 그들의 삶의 정황에 대한 이해가 먼저일 것이고, 그들의 편협한 하나님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기꺼이 동행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신들이 어느 덧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 정통이라는 모습으로 자신들을 신화화했을 때 어김없이 하나님은 인간이 피조물임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 즉 열린 마음이 필요한 거죠. 타종교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튼실한 지 살펴볼 필요가 있고요. 이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님의 글에서 보듯이 “<오직 예수>만 믿어라, 대신에 제발 좀 깊게 믿어라”에 방점이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님의 글에서 종종 보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드린 겁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르니,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이해도 다릅니다. 확신하건대 적어도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나라도 아니고, 민중이 주인되는 그 나라도 아니고, 그 너머에 있는 나라일 겁니다. 보편적 성령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인간이 자신을 비우는 곳에서 시작되는 나라이죠. 자신을 비워야 성령으로 하나 된 이웃들의 모습이 보일테고, 그 나라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보일겁니다. 이 나라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끝이 없을테니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 생각은, 보수 진보의 구분의 의미가 별로 없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실재를 담아내고 있느냐 여부이고요.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은, 보수기독교인들이 품는 5대 강령에 대해서, 이해를 할 것으로 봅니다. 다만, 최종적인 진실은 종말로 향해 열려 있을 겁니다. 판넨베르크의 말처럼.... 그때까지 우리의 견해는 모두 잠정적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긴장을 느끼면서 살아야되는 존재일 뿐입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갈게요.  타종교 또는 타인에 대한 글인데요. 열린 중심주의에 대해 좀 물어볼게요. 님 글을 옮겨보면, “너의 종교 나의 종교에는 서로 다른 것이 많다. 일단 서로가 선 자리, 즉 서로의 다름들을 인정하면서 그 차이를 통해 배울 게 있으면 배워나가자.”라고 하시면서, 이게 열린 중심주의라고 하셨네요. 존 캅의 말을 인용하시면서는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도 크게 보면 ‘열린 중심주의’라고 하셨고요. 좋은 글입니다.

현대사회가 세속성, 다양성에 기초한 포스트모던 사회라는 점에서, 아직 우리사회는, 그 중간 어디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자들일 겁니다. 모더니즘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 미국의 변방에 위치한 이 나라는 아직 그들의 잔재물인 펀더맨털리즘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할뿐더러 극복이란 말은 아직 진행 중이지요. 소위 보수교회 일편인 한국교회가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비아나, 세기연이 중요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얼마나 실재이신 하나님을 담아내고 있는가는 아직 물음표입니다.

중요한 점만 짚어볼게요. 글이 너무 길어져서 긴장감이 떨어질테니....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성 또는 다양성에 방점을 찍습니다. 구심점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으며, 다양성은 성령의 보편성에 따른 다양성이고, 다원성은, 하나님 중심이기에 가치중립적인 성격을 가져야 하면서, 인간의 한계성 내에서 가치의존적 성격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 성격들을, 배제한 열린 중심주의는 님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오직 예수>만 믿어라, 대신에 제발 좀 깊게 믿어라”에도 벗어나는 일일뿐더러,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어느 덧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종교는 가치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풀어 쓸게요. 하나님만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고, 글을 정리합니다.
로고스와 동행하십니까? 더 직접적으로 물어봅니다. 성령, 루아흐와 동행하시는 지요. 많은 보수 진보 기독교인들이, 과거를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모습에 머물러 있거든요.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현존재’에 머물러서, 자신의 ‘실존’을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오늘 지금 나와 함께하는 예수가 아닐까요?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지 궁금하네요. 님의 하루 일과를 적은 글을 보니, 명상 30분이라는 말이 걸려서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명상을 안하거든요. 가톨릭에서 관상기도를 하는 것은 봤지만, 명상이라는 표현을 안씁니다. 명상은 불교나 뉴에이지에서 쓰는 표현들입니다. 명상도 그리스도 중심에서의 다원성으로 해석해야 되나요?

현대의 세속성과 다원성에 대해선 추후에 논의될 것으로 봐서 이만 줄입니다.

        
미선이 (08-11-02 02:59)
 
긴 글을 장황스럽게 남겨주셨지만 말씀하신 몇몇 부분들은 이곳 세기연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얘기들을 해주신 점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점에 대해서만 얘기하고자 합니다.
저로서는 윌슨의 사회생물학적인 개념인 통섭을 그렇게도 차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패러다임이 서로 다른 체계에서
다른 패러다임에 사용되는 개념을 빌려올 때는
기존 패러다임의 차이와 그 개념에 대한 상이한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 후에 썰을 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사회생물학자인 윌슨이 울고 갈 일이 아닐까 싶군요.
김지하가 윌슨의 통섭 개념을 비판한 이유도 다른 게 아니었죠.

인간의 오만을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얘기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진리를 찾는 누구라도 가져야할 자세가 아닐는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기연은 오류와 비극을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서 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정통교리를 포함한 기독교 사상사에서의
오류와 비극의 문제를 결코 도외시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는 어거스틴, 칼빈, 바르트 등등 마찬가지 입니다.
제게는 그들의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다가오니까요.

이들이 갖는 신 이해는 상호 관계적 사태로서의 신이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은 이 세계에 대해 간섭만 할 뿐이지
세계가 신에 대해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게 봉쇄되어 있는 차원일 뿐입니다.
'통섭'이라는 표현을 굳이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방 통섭'의 차원이지 '상호 통섭'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제 생각에는 님은 이곳 세기연이 주장하는 하나님 이해에 대해서도
잘 읽어보시진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21 참조

누구나 자신이 속한 바에서 자기의 주장하는 바를 내세우기에
여기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나 님이나 정목사나 모두가 마찬가지인 거죠.
이는 칼빈이나 바르트나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 얘기인 거죠.
님은 제가 칼빈의 한계를 전제하지 않고 해석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반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자신들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지하고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
이곳 세기연이 주장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님은 또한 '전능성에 대한 스스로의 제한'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저는 이런 표현들이 부지불식 간에 드러내는 그 같은 신학적 이해들의 한계로 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그 제한성의 이유는 무엇이며(혹시 불가지론으로서 정당화를?)
그 제한성의 주체가 그 역시 신이라면 악의 대한 책임성 역시
가장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 아닐는지요.

삶의 정황의 문제는 제가 알기에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문제 역시 결코 도외시하지 않고 올바로 고찰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복음주의>란 표현은 김경재 교수가 제대로 파악했듯이
신학적으로 끌어올 수 있는 용어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상 누구나 복음주의를 표방하잖아요. 이곳 세기연도 마찬가지구요.

거시기님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개념에 대한 해석대로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님은 복음주의를 기독교 보편성 회복 운동으로 본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세기연 역시 그러한 쪽을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지향하는 그 보편성에 대한 내용이 좀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차원에서 다를 뿐이겠지요.

님은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포괄적으로 봐야 한다지만
사실 포괄적인 개념일수록 동시에 불분명함과 모호함도 같이 낳고 있답니다.
님은 편협한 이해라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엔
오히려 님이야말로 구체성과 편협성을 혼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그 보수와 진보에 대한 분류는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 내용에 대한 분류라고 이미 그렇게 써 있질 않았었나요?
껍데기에 대한 분류가 아니었지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 해석학적 틀에 따른 분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류 중의 오류인 가장 기초적인 해석학적 전제의 오류를 염두에 두면서
이에 따라 신학적 내용을 담아 분류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님은 보수를 뭉뚱그려서 표현했다고 하시지만
결국은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그 신학적 내용들도 해석학적 틀에 의해 작동된 것이라
실은 근본주의나 개혁을 표방한다는 복음주의나 그다지 크게 다르다고 보지 않는 것이죠.

진리를 경험하셨냐는 질문을 주셨는데 오히려 굳이 대답을 드린다면
저로선 매순간 쉼없이 끊임없이 진리를 경험 한다고 대답드리고 싶군요.
동시에 시공간적 차원에 놓여있기에 오류와 한계 역시 끊임없이 체험하고 있답니다.
저는 이를 <계오>revealerror라고 부른답니다. 계시와 오류의 뒤섞임이라는 것이죠.
(미래에서 온 기독교 pp.184-185 참조)

그리고 역으로 저 역시 질문을 드린다면 님이 말하는 진리란 무엇인지요? 예수 그리스도?
그런 얘기라면 피곤한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잘 아실테구요.
혹시 님의 진리 체험 얘기라는 게 이런 것인가요? 게다가 님의 보수와 진보 분류법인
실재이신 그분을 얼마나 보았느냐에 따라서 보수와 진보를 나눈다고 하셨는데
'실재'는 무엇이며 '본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더욱 큰 설명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게다가 자기의 경험이 어떻게 보편적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성령 체험 자체가 곧바로 보편적 일반화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님은 이곳 세기연의 '열린 중심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구심점은 예수이며, 다양성은 성령에 따른 다양성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왜 꼭 굳이 예수여야 하고 성령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저의 입장은 그것이 꼭 절대적이라고 보지 않으며
단지 불가피한 선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정체성의 문제라고 볼 뿐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만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얘기는 솔직히 하나마나한 얘기입니다.
하나님만이 보편적이다, 하나님만이 진리이다 등등 이런 얘기들도 마찬가지구요.
이미 저희도 그렇게 보는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것인지요?
우리가 흔히 쓰는 신앙적 언명들의 무기력함과 반복적인 피곤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글도 좀 권하고 싶습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114

그리고 끝으로 말씀드리면 님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위험성을 얘기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님 자신만은 마치 장님이 아닌듯한 자세에서 얘기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은 두 가지 모습을 다 보고 있다는 얘기들 등등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가 만지는 코끼리가 온전한 코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요?
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해서? 은혜스런 성령 체험에 의해서?
무슨 우리들끼리만 통하는 비밀용어 놀이나 하겠다는 건가요?
즉, 오히려 님이야말로 진리 담론에 있어 하나님 자리를 넘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수행 패러독스'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렇게 얘기를 할 순 없잖아요.

진리 추구 방법론의 문제는 철학에서 다루는 지점인데 이 부분이 명쾌하게 얘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정용섭 목사의 글에서도 이 부분은 실종되어 있는 채로 신학적 전제가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저로선 여전히 서구적 학문의 주요 한계였던 폭력적 신학의 변종이라고 볼 따름입니다.
삼위일체론이라는 게 그런 데나 쓰여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고도 놀라운 일이지요.

P.S - 언제든지 글을 남겨주시는 건 환영하는 바이지만
너무 장황스럽게 쓰시기보다는 상대방의 스탠스와 신학적 입장을 잘 파악한 후에
(어떤 얘기들은 이미 세기연에서도 주장하는 바를 님도 주장하시던데 이는
님이 이곳 세기연의 입장들을 여전히 올곧게 잘 파악하시진 못한 걸로 보일뿐이랍니다)
메스를 가할 지점, 즉 자신의 입장과 충돌나고 모순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을 정확히 잘 포착하여
그 구체적 지점을 가능한 간단 명료하게 짚어서 촌철살인처럼 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행여 논의가 중언부언 하게 되는 것도 별로 생산적인 것은 아닌 거 같아서요.

            
거시기 (08-11-02 20:46)
 
답글 감사드리고요. 제가 올린 글이 좀 장황하죠? 다목적 성격이라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요.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의 삶속에서 얻은 생각들이 푹 익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씀드릴게요. 다목적이라는 말은, 보수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이해를 좀 열어보자는 의도도 있고, 강길님의 신학과도 일정부분 공유하는 바가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야 불필요한 댓글이나 오해가 없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장황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그리 콱 막힌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거죠. 현실의 삶 속에서 녹여낸 신앙이란 말은, 신앙의 출발점이, 자신의 삶의 영역인 ‘일상’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자세와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생활신앙에서 시작되어 그렇습니다. 성속의 구분이 없는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신앙이기에 아무래도 논리에 약하죠. 그러다보니, 막히는 부분을 독서를 통해서 공부하고, 생활에서 적용하다보니 좀 체계가 빈약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상에서 만나는 하나님이죠. 그래서 전 이걸 ‘성속일여의 신앙’이라고 나름 정의하기도 합니다. 또 장황하죠?


통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아무래도 이 개념이 좀 서로 다르죠?  님의 글을 보니, “저로서는 윌슨의 사회생물학적인 개념인 통섭을 그렇게도 차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라면서,”사회생물학자인 윌슨이 울고 갈 일이 아닐까 싶군요.“라고 하셨네요. 이 글만 보면, 제가 통섭이라는 개념조차 못 잡는 사람으로 오해되니 나름 또 정리를 해봅니다.

통섭이라는 말은 Consilience를 한글로 번역한 글이고요. 그 개념은 사실, 성리학과 불교에서 이미 사용되어온 용어로 '큰 줄기를 잡다'라는 뜻을 지니는 말입니다. 님의 글처럼 사회생물학적인 용어이지만, 윌슨은 진화생물학자이죠. 게다가 무신론, 또는 회의론자입니다. 윌슨이 통섭이라는 말을 쓰게 된 의도는,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흡수되는 통합을 말하는 거고요. '과학적 일방주의'를 주입 또는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과학적 환원주의이죠. 그 배경을 보려면 아무래도 그가 쓴 ‘생명의 편지’(The Creation)를 읽어봐야 할 겁니다. 생명의 편지는 지구 생태계를 살리자는 의도의 글이고, 이 명제 앞에서는 유무신론자를 막론하고 다 참여하자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죠. 속 내용을 보면, 낯익은 용어들이 챕터의 제목으로 나옵니다. 타락(decline),과 구속(redemption) 등등... 의도가 좀 보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청지기 정신'도 소환하고 있고요. 도킨스보다는 좀 세련된 진화생물학자이죠.  자 중요한 문제는, 진화생물학'을 핵심 고리로 한 '사실의 통섭'에서, 이제는 '가치의 통섭'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생물학은 단순한 사실의 학문을 넘어서서, 종교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실천을 할 때 따라야 할 규범이 되어 버립니다. 무엇보다 통섭을 지향하는 그의 학문적 태도와 방법론이 매우 기독교적인 발상이죠. 히브리 전통이든 헬라 전통이든 "모든 지식은 결국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발상은 자신이 유년시절 몸담았던 침례교회적 에토스의 반영이거든요. 사실의 학문 아래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을 통섭하려는 의도입니다. 이젠 통섭이라는 말이 더 이상, 님의 말처럼 사회생물학적 용어로 한정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더구나, 통섭을 번역한 분은 종교학자입니다. 저는 위의 주장을 반대로 해석하는 입장이고요. 통섭은 하나님의 가치중립적인 통섭만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입장이죠.

다음 주제로 넘어갑니다.
님의 글을 보면, 전통적 기독교 입장과 자신의 입장이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으셨네요. “신 이해는 상호 관계적 사태로서의 신이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은 이 세계에 대해 간섭만 할 뿐이지 세계가 신에 대해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게 봉쇄되어 있는 차원일 뿐입니다.”  어거스틴, 칼뱅, 바르트 등을 언급하셨네요. 일부분 맞는 말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루터의 하나님 이해를 넣으면 좀 사실관계가 다르죠.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고통당하신다는 개념은 얼핏 보면 생소한 개념이지만, 십자가 위에서 고난, 고통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성서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죠.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 신은 사실 좀 허구스럽거든요. 사실 제게도 이 문제는 중요한 삶의 부분이기도 하고요. 나의 삶의 정황에 관계되지 않는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촘촘히 천착한 분야이기도 하고요. 님의 신학에 베이스로 깔려있는 과정철학은 상당히 유용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몰트만의 신학이나, 본회퍼의 신학의 연장선 속에서 봐야 할 듯합니다. 이 부분은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관련된 부분이기에 이정도로 하고요.

다만, 실생활에서 적용 부분만 좀 언급할게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셨다는 것은 제게 상당히 위로가 되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삶에 들어오셔서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거든요. 성령 하나님이시죠.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라고 나름 정의를 내리고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의 삶의 과정에서 수많은 예수의 모형을 만납니다. 어제의 예수를 버리고 오늘 다가오시는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죠. 예수를 닮아가는 것을 어제의 이미테이션을 버리고 오늘의 이미테이션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한 겁니다. 사실 다 우리 삶이 짝퉁이거든요.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또는 하이데거의 실존하고도 같은 맥락이죠. 문제는 인간이 닮고자 하는 것을 그만두는데서 시작됩니다. 님의 표현대로 ‘열린 마음’이 닫히는 때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그게 전통이나 정통일 수도 있고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지점이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른 시점이고요. 그래서 전 삶의 과정성과 잠재적인 모습을 중히 여깁니다. 바울 사도의 말처럼 오늘 지금 날마다 죽는, 또는 비우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님의 표현대로 ‘수행 패러독스’를 중히 여깁니다.

다음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전능 개념과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개념이해라고 보고 하나로 묶어서 설명 드리죠. 님의 글을 보면, “님은 또한 '전능성에 대한 스스로의 제한'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저는 이런 표현들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그 같은 신학적 이해들의 한계로 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그 제한성의 이유는 무엇이며(혹시 불가지론으로서 정당화를?) 그 제한성의 주체가 그 역시 신이라면 악의 대한 책임성 역시 가장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 아닐는지요.” 라고 하셨네요. 사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이해는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또는 악에 대해서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죠. 이 개념만 가지고도 많은 토론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이 힘들 것으로 봅니다. 다만, 엘리스터 맥그래스의 책들을 좀 숙독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고 시작합니다. 신학적 한계가 있다고 한다면, 아직은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정도에서 시작합니다. 전능의 해석은 ‘하나님은 모순되지 않는 것들이라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정의합니다. 문제는 이거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고난이라는 이 악을 왜 방치하시는가?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라는 거죠. 이 문제를 님처럼 과정신학에서 해결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많은 합리적인 설명을 하고 있고, 현대 신학이 그에게 빚진 바가 크다고 봅니다. 맥그래스의 책들에 많이 인용되어 있고요. 범재신론은 신학적 성취일 겁니다. 고전적인 창조주 하나님 개념이 사망선고를 받은 현 시점에서 유용한 도구입니다. 그렇지만, 악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개념과 인간의 죄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한 거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과정신학이 전공이시니 명쾌한 해석을 부탁드리면서 시작해 볼게요.

성서에서는 인간의 타락이 죄를 불러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담 이래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개념이 발전하죠.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자라는 것을 말하기에 타락 전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방적인 지시와 순종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인간의 구속은 은혜에 따른 선물이고, 그 증거로 내재하시는 성령님이 있다는 개념이고요. 인간의 죄는 죄의 성향을 말하는 것이고, 그 증거로는 생명체가, 우주가 엔트로피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데서 설명이 가능할 겁니다. 즉 무한히 질적 하락을 초래하는 성향이 인간의 타락의 증거라면, 하나님은 그 우주와 생명체들을 재생하시는 분이시고, 성령님은 인간 안에 거하시면서 유지시키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생명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하나님과 성령님의 모습이죠.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모습이고요. 악에 대한 책임성을 언급하셨는데요.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의 산물이죠. 여기까지가 전통적인 설명이고요. 이번엔 제 생각과 바르트의 생각을 엮어서 말해보죠.

창조작업은 불가피하게 부산물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이 부산물이 죄의 근원이 될 수 있고요. 그래서 바르트 식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이 부산물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느끼시고, 예수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소했다는 입장이죠. 그래서 구원은 선택과 유기가 아니라, 선택된 예수를 통해서 유기문제를 해소했다는 입장이고, 이건 바울의 사상 또는 어거스틴이나 칼뱅의 예정론을 확대해석한 겁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선택된 아들을 통해서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하는 고난과 고통, 악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류에게는 이제 선택된 자로서 자기 결정만 남은 셈입니다. 덧붙여서, 예정론을 운운하시는 분들이 오해하는 것 하나 짚고 넘어갈게요. 예정에 있어서 바울의 고민은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교회가 선택된 무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칼뱅의 예정론은 선택과 유기의 문제로 간단히 환원해서는 안 되고요. 그의 예정론의 시초는 사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은 복음을 거부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시작된 겁니다. 그의 사유의 출발은 개개의 사례를 통해서 시작된 것이지, 예정론이라는 체계 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지요. 즉 연역적 사고에서 귀납적 결론으로 이른 것이 아니라, 귀납적 사고가 출발점이죠. 사실 죽을 때까지 본인 말고는 아무도 타인이 그 사람이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예정론을 잘못 이해해서 은사주의자로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과, 종종 이것이 인종차별이나, 사회계층을 합리화시키는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하죠. 편협하게 해석해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인간이 알 수 없다”입니다. 종말로 열려있죠. 누가 과연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지는.....

과정신학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다 장광설이 되었네요. 제가 이해하는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을 길항적 측면에서 바라본 신학 같네요. 여기서는 전통적인 죄의 개념은 실종되었다고 보고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도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이해될 뿐이고요. 그래서 “세계 안의 자율적 결단만큼은 전적으로 세계의 고유한 주체적 영역에 맡겨놓으셨는데, 그러한 결단이 신의 뜻과 어긋난 결단을 하게 될 경우 세계 안에는 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신은 세계에 대해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신 역시 세계의 자율적 결단에 의해 그러한 악의 발생을 감당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신과 세계는 관계적 지평에 놓여있는 동반자적 관계라는 사태에서 비롯된다.”로 표현되고,  “신이 현실 세계에 의도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주체적 목적인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자율적 판단을 빼앗고 강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결정의 주체는 존재의 자율적 결단에 맡겨놓으셨다. 이때 만일 세계가 신이 원하는 그 물리적 성취로 나아갔을 때 세계는 하나님 나라에 한 발짝 다가서는 진보를 보여주지만, 반대로 세계는 그 자율적 결정에 따라 얼마든지 신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악의 성격은 '불순종'에 해당한다. 악은 현실 세계의 잘못된 결단에서 빚어진 사태이며, 신은 이러한 악에 대해서 어찌하지 못하고 현실 세계의 자각적 성장과 참여를 유도하면서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에 대해 설득적으로 접근할 뿐, 세계의 자율적 결단 그 자체를 침범하여 건드리진 못하기 때문이다.” 결론 내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자가 아니라 상대적 존재로서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인간과의 관계는 길항적 관계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또는 통치는 인간의 자율적인 성향에 따라서 확장되거나 축소된다고 이해됩니다. 동등한 자격 또는 관계이기에, 하나님의 주도권이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되고요. 존스타인백의 ‘에덴의 동쪽’을 읽은 느낌이군요.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나중에 설명 부탁드리고요.) 이 관계가 과정과 실재라는 형태로 무한 반복된다는 말이죠? 종말이 올 때까지. 이 글만 봐서는 종말이라는 우주역사의 대단원이 없네요.

전통신학과 차이점을 몇 개만 짚어 볼게요. 아주 다른 신학이라고 봐야겠네요.
1.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위계적 관계가  상호의존적인 상대적 관계 또는 동등한 관계로 바뀌었다.
2. 악의 개념에 대하여 전통 신학은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과정신학에서는 신의 의지에 반대되는 결단을 할 때 발생한다. 즉 원죄의 개념과 구속의 개념이 없다.
3. 전통신학에서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고,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성을 가진다. 반면에, 과정신학에서는 구원받은 자라는 개념은 없고, 도상에 있는 자만 있을 뿐이다.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갈게요. 복음주의 문제인데요. 이 문제는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을 쓰셨으니 같은 의견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복음주의가 보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그간 많이 오용되어서 복음주의를 마치 어떤 한 종파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만 말씀드리면 되겠네요.

다음 주제입니다.  진리를 경험하셨냐고 좀 무례히 질문 드렸네요. 무례한 질문에도 답변을 해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요. 의도는 아실 겁니다. 무한히 질적 차이를 가진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 엎드려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았냐고 물어본 거죠. 이게 전통적인 기독교의 회개를 통한 구원을 설명하는 글이죠. 그런데, 님의 답변을 보면, 그 부분은 없고요. 다만, 진리의 경험 문제 즉 성령과 동행의 문제를 진리의 경험문제로 설명합니다.

“저로선 매순간 쉼 없이 끊임없이 진리를 경험 한다고 대답 드리고 싶군요. 동시에 시공간적 차원에 놓여있기에 오류와 한계 역시 끊임없이 체험하고 있답니다. 저는 이를 <계오>revealerror라고 부른답니다. 계시와 오류의 뒤섞임이라는 것이죠.”

기독교 전통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는 점만 말하면 될 것 같네요.

마지막 주제입니다. 성령에 대한 문제하고, 그 보편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신앙의 잠재적 성격에 대한 말을 좀 하고 마칠게요. 지금 전 무신론자하고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기본 전제로, 인간의 감정의 투사로 취급되는, 때로는 몰이해되는 신비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공유된다는 점에서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누미노제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 거고요.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 관점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기독교를 올바로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이고요. 성령의 보편성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을 하나의 띠로 묶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겁니다. 보편적 증명의 문제가 아니기에, 개인의 감정 차원에서 믿음이 시작된다고 보고 있고요. 이 감정이 개인의 허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자기 드러냄, 또는 자기계시라는 점을 바르트의 말을 통해서 설명 드렸고요.

신앙의 잠재적 성격은 이미, 위에서 충분히 설명 드렸기에 길게 쓸 필요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 진품을 모조하는 과정의 존재로서 실존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본다는 것만 말씀드리면 진보와 보수에 대한 눈을 떴다는 의미는 사실, 커다란 모자이크에서 단지 몇 조각을 손에 넣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식 너머에 있는 그분을  조금 표촉한 것이죠.

님의 신학이 전통신학과는 상당히 다른 기반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네요. 님의 책 제목처럼 미래로부터 오는 신학이죠. 좀 궁금한 것은, 전통을 재해석했다는 점은 높이 삽니다. 다만, 현 기독교 토양을 좀 고려하고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신학이라도, 현실에 대한 고려나 적응이 없이 시작한다면, 애초에 의도하던 뜻도 못 이룰 뿐더러, 담론으로 형성되지도 못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과 함께 가는, 그러면서도 현실을 조금 넘어서는 신학을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되는군요. 이미 서구에선, 인지과학, 신경과학으로 인간의 종교적 신비를 해체하려는 단계에 와 있지만, 한국은 아직 미국의 변방으로 남아있습니다. 아직 근본주의의 폐해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거든요. 그래서 관점은 달리하지만, 다비아를 이끄시는 정 목사님을 좀 좋게 보는 입장입니다. 이성적인 신학이거든요.

긴 글 읽으시느라고 고생하셨네요. 그래도 토론을 통해서 많이 배웁니다.

                
미선이 (08-11-03 01:30)
 
답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략 문제가 되는 지점만 얘기하고자 합니다.

루터의 신학에 대해 언급하셨지만 고통 받는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신의 불완전성 개념이 분명하게 깔려 있는지에 대해선 다소 불분명하지요.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말한 몰트만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몰트만에 대해서는 사실 좀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데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그에게선 개념들이 다소 왔다리갔다리 하는 혼재된 모순을 보일때가 있답니다
이는 본회퍼 신학 역시 보수와 진보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과도 함께 유비됩니다.)
저로선 루터 신학의 한계는 그의 두 왕국설에서 이원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극명함을 봅니다.

하나님이 고통 당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불완전성인데
과정신학에서도 얘기되는 바지만 하나님은 존재의 결단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전능하지 않으며 과거를 전지하게 파악한다고 해도
창조적 미래에 대해서만큼은 전지하지 않다고 보고 있지요.

혹자는 이를 신 자신의 자기 제한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도 보겠지만
이때 자기 제한의 주체가 궁극적으로 신 자신에게 있다고 볼 경우
결국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빚어지게 되는 근본 한계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데
그럴 경우 여전히 세계 안의 많은 죽음들에 대해서도
신은 과연 선하신 분인가라는 의문을 해소하진 못하게 되지요.

그런데 맥그래스 책에 화이트헤드와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이 많이 인용되어 있나요?
이건 제가 금시초문이라.. 제가 읽어 본 맥그래스 책에선 본 기억이 없어서리..
혹시 제가 과문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제가 여쭙고 싶으네요.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죄에 대한 이해는 이번에 이곳 문서자료실에 올린
김희헌 박사의 글에 좀더 상세하게 나오기에 잘 참조해보시면 될 것으로 봅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g001/79

그리고 저로선 칼뱅신학이 귀납에서 나왔든 연역에서 나왔든
결국은 그 이론의 정합성에 대한 문제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의 신학에 반대를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의 신관이나 예정설 등등..
반대로 칼뱅이 다른 사람들을 처형시킬 때는 자기 신학 이론을 잣대로 하는
연역적 태도로 나왔었다는 점도 분명하게 인지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이 세계와 동반자적 관계지만
하나님의 주도권이 완전히 상쇄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매순간 모든 존재의 위상에 최초의 목적들로 임하시는 하나님은
단지 설득적 사랑으로서 개입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끊임없는 참다운 비전들을 제공하고 있지요.
물론 현실 존재는 그것을 거부할 자유도 있지만요.
그래서 무책임한 하나님도 아니면 강제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매순간 끊임없이 설득적인 하나님이랍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신과 세계의 관계 자체는 영원하답니다.
태초라는 건 넌센스라고 볼 뿐 시작도 없으니 끝장을 보는 종말도 없겠지요.
단지 우리의 우주시대의 종말은 얘기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의 우주시대의 종말은 다른 우주시대의 시작이 되기도 할 뿐이니..
그리고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태초에 일어난 것이라기보다
매순간 ing로서의 창조를 얘기하고 있답니다.
기회가 되면 과정신학 개론서도 나와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신과 세계가 동등한 관계라는 말은 좀더 설명이 필요한 얘긴데
그 역할의 내용까지 똑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서로 주고받음의 관계적 영향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동등한 관계라고 볼 따름이죠.
하츠온이라는 과정사상가는 하나님을 민주대통령으로서 비유하기도 했지요.

과정신학은 모든 것을 관계적 패러다임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신의 결단에 반하는 차원이 악의 발생이라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씀드린다면
그것은 관계의 충돌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God-I-Others의 차원에서의 관계이구요.
과정신학은 철저히 신과 나와 이웃이라는 관계에서 모든 사항들을 고찰하고 있는 신학입니다.

과정신학이 해석하는 죄와 구원 개념에 대해선
앞서 말씀드린 김희헌 박사의 죄와 구원에 대한 과정신학적 이해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저 간단하게만 소개하면 과정신학은
죄를 관계상에서의 불필요한 폭력으로 이해하고 있고(마조리 수하키)
구원은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관계로 들어서게 됨을 말하고 있지요.
참고로 제가 보는 시각은 앞의 과정신학적 이해와 배리되지 않으면서
약간 좀더 구체화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고 보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저로선 구원 기능이 꼭 예수에게만 있다고 보진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점이 다르지 않을까 싶으네요.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활동과 열매는 얼마든지 다른 이웃종교들에게서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는 차원에서는 기독교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진 않다고 봅니다.

이렇게만 볼 경우 저를 상대적 종교다원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으나
제가 선 자리가 예수에 있고 예수가 더 익숙하기 때문에
저로선 예수를 선택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점도 첨언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기독교라는 정체성은 선택의 불가피성에서 오는 정체성일 따름이라는 것이구요.

그리고 개인의 믿음이 감정의 허구가 아님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는 것도
분명히 얘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님의 글에서는 결국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식의
불가지론으로 이를 정당화하려는 점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제 책제목은 '미래에서 온 기독교' 입니다. 현 기독교 토양은 예수와 성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일 분이죠. 제게 현실 고려와 적응을 얘기하셨는데
아마도 님과 저는 현실을 보는 이해가 다르지 않을까 싶으네요.
제가 보기엔 이미 <기존 기독교의 붕괴와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는 시작되고 있는 것을요.
http://freeview.org/bbs/tb.php/d004/45 참조

그리고 신비주의는 합리주의와 함께 있는 동전의 양면일 따름입니다.
과학으로 파헤친다고 해서 신비가 해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거죠.

그리고 앞서도 여러번 얘기했듯이 저로선 다비아의 정용섭 목사야말로
근본주의를 극복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묻어가는 입장이라고 볼 따름입니다.
오히려 근본주의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세련된 보수일 뿐이라는 거죠.
그렇지만 님처럼 거기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은 보수 근본주의를 극복했다고 착각하고 있구요.
이는 바르트 신학의 수혜를 입은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지요.
그래서 저는 님이 종종 바르트 신학을 강조하는 것이 저로선 매우 당연하게 보이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저로선 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도 그저 보수와 진보의 중간 어딘가에서
어정쩡하게 확보하고 있는 비평의 자리라고 보는 것뿐이구요. 이에 대해서도
언젠가 좀더 상세하게 썰을 풀게 될 날도 올 것으로 봅니다.

어쨌든 애초에 저희 세기연더러 기독교 변혁이 아닌 종교변혁으로 바꾸라 말씀하셨지만
논의를 하면서 저희의 입장이 그같은 상대적 다원주의 입장은 아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인지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곳 세기연은 <오류>와 <비극>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합니다.
그 어떤 막강한 기독교 전통도 이 오류와 비극의 문제에 선행할 수는 없다고 보는 입장이구요.
물론 세기연 역시 자기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열려 있구요. 마찬가지로
이곳 세기연의 입장과 토론을 나누는 그 어느 누구라도 자기 오류 가능성을 열어두길 바라지요.

또 토론을 나누도록 하지요.^^*

                    
거시기 (08-11-03 16:01)
 
답글 감사드리고요.
아무래도 ‘신앙과 신학’이라는 주제가 선행되어야 할 듯해서, 기독교의 양대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칼라너와 바르트의 생각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두 분의 신학을 다 이해했다는 점은 아니고요. 그들의 신학에 대한 자세에서 음미해볼 것이 있다고 생각되어서 서두로 삼습니다. 이건 강길님의 신학에 대한 자세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죠.

아시다시피 칼 라너는 가톨릭 신학의 대표주자입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이고, 수많은 제자들이 있죠. 그런데 그의 신학에는 교의학과 같은 큰 사상체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수많은 미셀러니들만 존재합니다. ‘침묵과의 만남’을 보면, 그의 신학하는 자세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신학은 일상이라는 ‘삶의 정황’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큰 신비’를 탐험하는 나그네신학이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를 제대로 이해한 신학자이자 신앙인이었고, 이런 생각은 우리의 최상의 사상이라는 것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전체의 불완전한 조각들이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아름다움의 모호한 투영이라는 그의 생각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그저 하나의 모조품을 들고 희희덕거리는 철부지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직시한다는 것이 꼭 그의 신학의 불완전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님이 말하는 신비에 대한 열린 생각입니다. 우리의 신학이 틈(약점)을 갖는 그곳이, 신비가 잘 포착되지 않는 지점이고,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이고, 그래서 신학은 더 위대한 신비의 ‘자기 드러내심’ 또는 ‘자기계시’를 지시하기 때문에 빛나기 빛을 발한다고 봅니다. 칼라너 신학의 특징은 ‘다가오는 신비에 대한 경이’에 대해서, 뒤로 물러나 침묵하고 내용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바로 그곳에, 즉 하나님 신비 앞에 선 인간의 겸손에 정초한 신학이죠. 그래서 그의 신학은, 자신의 신학 이전의 사람들이, 또 그와 나란히 같은 길을 걸어갔고, 또 걸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 사귐을 나누는 길동무임을 인식하는 신학이죠.

바르트는 어떤가요? 정반대의 길을 간 신학자이죠. 그의 미완성 교의학은 엄청나게 방대한 13권의 책들로 이루어져서, 아직 한국에서는 번역단계에 있는 정도입니다. 칼 라너와는 정 반대의 길을 간 신학자입니다. 틈새를 촘촘히 막으려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이죠. 바르트의 시대상황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죠. 문화개신교가 히틀러의 거수기로 둔갑한 현실에 직면해서, 절대적인 하나님, 철저히 이 세계에 대하여 낯설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의 새로운 신비의 소리를 들은 거죠. “이것은 그의 스승들이 가르쳐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기하고 새로운 세계'였으며,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라는 그의 고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신비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 탄젠트 곡선이 선에 무한히 접근하지만 서로 접촉할 수는 없듯이, 계시는 결코 역사가 되지 않는다. 계시와 역사 사이에는 오직 진공만이 있을 뿐이다.” 현대신학을 하는 분들 특히 해방신학계열에서는 바르트신학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신학에 대한 자세만은 배워야할 것으로 봅니다. 성서 중심주의!


바르트의 성경관은 진보 보수 양측에서 많은 협공을 당했죠. 자유주의자들은 성서를 거의 전통적인 축자 영감 교리에서 가르치는, 특별한 위치에까지 격상시킴으로써, 그것을 역사 비평적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고 비난했으며,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바르트가 성경을 성서의 무오성을 부정했다고 맹렬히 공격하기도 했죠. 그렇지만 아래 글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성서는 정적으로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적, 사건적 성격을 가진다. 말씀의 사건은 자신의 존재를 행동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하나님 자신이다. 성서는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이 된다. “성서는 하나님이 그것으로 하여금 그 분의 말씀이 되도록 하시는 경우에, 그 분이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잠시 곁길로 갔네요. 이렇게 교의학이라는 방대한 책으로 자신의 신학사상를 체계화하려고 했던 바르트도, 자신의 후학들에게는 ‘학파’를 만들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칼 라너와 비슷한 지점에서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본 겁니다. 그의 생각의 편린은 ‘마지막 증언(출발-전향-고백)’에서 명확히 드러나죠. 일평생 동안 자신의 서재에 걸려 있었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세례 요한을 그린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신학도 늘 세례 요한의 손가락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비웠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늘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 낮추었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사로잡히기 위해서 늘 새로이 출발하고 전향하고 고백하려고 애쓰는 자였던 것이죠.

인간의 신학이 하나님의 큰 신비 앞에서는 틈새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두 신학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추고,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드려내시는 것을, 자기를 계시하는 것을 경청한 거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학적 돌파, 성취에 주목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고 ‘침묵’을 한 겁니다. 겸손히 엎드려서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린 거죠. 강길님은 틈새가 없나요? 하나님의 신비를 다 목도하셨나요라고 묻고 싶네요.

바르트의 성서관을 인용한 것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우물 속에서 물을 마시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비의 해석은 말씀의 해석에 기초를 해야되고요.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자로서의 겸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삶의 정황이 각기 다르기에 다른 전통 위에서 해석되어 왔고, 고백되어왔다는 것이 이미 성서 자체로 입증이 되기 때문이죠. 다만, 월터 브루그만이 적시하듯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패러다임적 해석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패러다임적 해석을 벗어나면, 자신이 이미 사실과 가치의 학문의 주인이라는 주장을 하는 거고요. 하나님 한분만이 가치와 사실학문의 정수입니다. 통섭의 주체이고요.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님의 신학 속에서 또다른 환원론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도킨스나 윌슨이 자신들의 진화생물학으로 생물의 총체를 이해하고, 사실의 학문의 통섭을 말하고, 그 주체는 오직 자신들이라고 주장할 때 이미 그들은 자신을 신격화한 겁니다. 신이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거죠. 그들과 다른 점은 님은, 가치의 학문으로, 정확히 말하면, 화이드헤드의 과정철학이 베이스로 깔린 민중신학을 정점으로 통섭을 추구하는 환원론자의 모습이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를 말하지만, 님의 신학은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기독교 본류에서 많이 벗어난 신학입니다. 오직 과정 철학으로의 통섭만, 환원적 성격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과정철학 속에서 온전히 드러난다고 보나요? 과정철학은 과연 하나님의 신비라는 모자이크를 몇 조각이나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 보셨나요? 통섭이나 가치 중립적인 이야기를 첫글에서 언급한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을 말하고자 시작된 겁니다. 님의 신학 속에 녹아 있는 과정철학이 가치중립적인 것인가요?

플라톤의 이원론을 비틀어버린 하이데거식으로 질문을 드려볼게요. 하이데거에게는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시간을 사는 나입니다. 실존이라고 하고, 현존재는 망상에 불과한 거죠. 일면 타당성이 있죠. 이원론이 박살이 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기독교식으로 해석된 플라톤의 이데아는 실재이신 로고스 하나님으로, 인간은 로고스를 닮아가는 모상으로 유비되죠. 질문 들어갑니다. 내가 없다고, 실존하는 내가 없다고, 세상이 없나요? 단지 실존하는 나만 세상에서 사라진 겁니다. 시간 여행자인 하이데거가 없다고, 세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죠. 사라진 것은 하이데거죠. 님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 저도 마찬가지- 님이 없다고, 님의 신학이 없다고 세상이 없나요? 하나님의 신비를 품은 세상은 그대로 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단지, 시간여행자인 님과 님의 신학뿐이죠. 여기서 인간이란, 하나님의 신비라는 세계 안에서, 인간의 한계 또는 유한성, 잠정적 나그네라는 모습이 보일 겁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단지 세계 안에서, 몇 가지 인과율적인 모자이크의 한 부분을 발견한 거죠. 이 모자이크 한 부분을 가지고, 마치 세계의 신비를 다 벗겼다고 떠드는 것은, 윗 글에서 비유한 것처럼, 철부지 어린 아이가 이미테이션 하나들고 흡족한 미소를 짓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도킨스나 윌슨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렇다고, 그 이미테이션을, 신학적 돌파, 또는 성취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과정 속에 있는 실재의 잠정적 성격을 잊지 말자는 거죠. 좀 논리의 비약이 있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비, 또는 계시는 화이트 헤드의 과정 철학 속에서, 민중신학 속에서만 찾을 수 없습니다. 환원되지 않죠. 그렇다고 과정철학이, 민중신학이 얻을 철학적 신학적 돌파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분석틀이고요. 많은 분야에서 원용되고 있습니다.

담론으로서의 신학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을 하고 글을 이어갈게요.
아시겠지만,  ‘담론’은 미셀 푸코의 개념이죠. 여기서 담론 형성의 과정만 좀 살펴볼려고 합니다. 푸코의 '말과 사물'을 보면, 인간의 이성적 구축물인 담론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확대되는 과정이 잘 나와 있죠. 수많는 가치의존적 담론을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담론으로 밀어 올리는 사례들을 볼 수 있고요. 중요한 것은 그 배후에 계층적 권력구조가 있다는 거죠. 얼마나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담론 형성과정이 사실은 계획적인 권력의 음모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는 거죠. 종교적 담론도 마찬가지죠.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고 본 시대도 있었지만, 사실은 권력, 또는 그 포장지인 전통, 정통의 시녀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인간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죠. 이성은 다만 그 시녀이고요. 푸코의 공헌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위계적 질서를 미시적으로 해체를 했다는 겁니다. 언어는 주요한 도구였고요. 우리나라 좌파 중에서 이걸 제일 잘하는 사람은 아마도 진중권일 겁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으로 무장했기에 더욱 빛을 발하죠. 반면에, 김규항은 능력에 비해 좀 빛을 못보는 케이스이고요. 좀 심하게 말하면, 짝퉁이 진퉁보다 더 빛나는 현상이죠. 인터넷은 진중권에게 날개를 달아줬으니, 노마드적인 인터넷 속성을 가장 잘 포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죠. 진보나 보수나 다들 이미테이션을 들고 있는 입장이지만, 진퉁이라고 주장을 하는 상황입니다. 전통과 정통이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있는 이미테이션이 주도하는 형국이고요. 반대편은 그 이미테이션을 비신화화하는 작업을 - 푸코식으로 말하면 해체를- 하는 모습입니다. 도구는 성서이죠. 성서를 재해석해서, 어느 것이 더 나은 이미테이션인가 보여주는 권력관계입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관주도의 개혁자들이 성공한 것에서, 급진적 개혁자들이 정죄된 것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죠. 여기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비를 엿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비아, 에큐메니안, 세기연도 같은 지점에 있습니다. 모두 보수의 신학적 토대를 비신화화, 또는 해체를 하는 과정입니다. 그 중에 다비아가 좀 성공적인 것은, 보수의 눈높이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폭제가 된 것은 아무래도 설교비평으로 돌려야 될 듯하고요.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목사들의 설교를 ‘감히’ 난도질한 겁니다. 그런데 꼼짝 못하고 당하는 이유는, 비평의 근거자료가 바로 성서에서 끌어왔다는 점입니다. 보수의 신학으로 보수의 신학을 공격할 때 보수는 제일 당혹스럽거든요. 적어도 판넨베르크의 신학까지는 보수 또는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같이 갈 수 있다는 분위기입니다. 길동무로 여기는 거죠.

왜 그런지 생각해보셨나요? 일단, 종교적 현상에 대한 염증이 배경으로 깔려있습니다. 그말은 자신들이 가지고 놀던 이미테이션이 이 현상을 설명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죠. 반면에, 정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이미테이션이 좀더 반짝거린다는 것을 알게 된겁니다. 같은 짝퉁이라도 더 진짜처럼 보이는 짝퉁이거든요. 짝퉁이라는 말에 오해가 있을 듯해서 좀 설명을 드리면, 그리스도를 이미테이션한다는 의미에서 짝퉁입니다. 눈높이를 맞추면서 시작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이 중요하고요. 그 중심에는 하나님 중심이라는 공통지반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진보의 눈에는 그 나물에 그 밥일지 모르지만, 담론 형성과정을 모르는 소치이죠. 칼뱅식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인간의 눈높이로 내려왔기에, 성육신하셨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죠. 마치 하나님이 어린아이에게 말을 건네듯이 인간을 대한다는 거죠. 그의 교의학에서 ‘적응’이라는 개념입니다.

반면에 세기연은 어떨까요? 얼핏보면, 진보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호소적이죠. 신나게 종교적 현상을 까대는 모습에 쾌감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좀더 안으로 들어가보면, 종교적 현상을 까대다가, 종교 자체를 까대는 모습을 보고 당혹스럽죠. 요리조리 살펴보니, 하나님을 까대는 겁니다. 그것도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과정철학이 깔린 민중신학으로요. 이정도 까지 생각이 미치면, 보수는 달아날 것이고, 진보는 선을 그을 겁니다. 자신이 가진 이미테이션보다 더 반짝이는 것인 줄 알았더니, 이미테이션이 아니라 이건, 다른 물건이거든요. 솔직히 다른 종교 냄새가 납니다. 미래에서 온 기독교라고 말하시지만, 그건 판단하는 자의 몫이죠. 소비자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거든요. 루비통 짝퉁은 걸치고 다니지만, 로비통은 걸치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죠. 유사품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담론 형성과정부터 진통이 있을 것으로 보고요. 오히려,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들에겐 호소력이 있을 겁니다. 그것도, 과학적 환원론자들에게는 씨알이 좀 안먹힐 겁니다. 왜냐면, 님이 과학적 근거로 삼는 자료들이 거의 다 정통과학자들의 눈에는 유사과학이거든요. 검증되지 않은 사이비 과학자료라는 거죠. 좀 비평이 심했죠? 현실에 토대를 둔, 눈높이를 가진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다 그렇게 되었네요. 이해를 바라면서 본 주제로 넘어갈게요.

루터, 본회퍼, 볼트만을 거론한 것은, 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 성격입니다. 마치 화이트헤드만이 과정철학 속에서만, 고통, 고난, 죄에 대한 규명이 가능하다는 글의 답글이죠.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해서 이 신학들이 발전해 왔다는 것이고요. 과정신학도 이 연장선 속에 있다는 것이죠. 맥그래스도 과정신학이 이룬 돌파를 인정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과정철학으로 다 환원해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요. 역사를 통해 발전하는 것이 신학이라는 것을 아실테니, 루터나 본회퍼의 혼재된 모습은 이해할 것으로 봅니다. 다만, 볼트만은, 좀 변명을 하자면, 아직 미완이죠.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씨리즈의 주해판이 지금도 나오고 있고요. 이 분야는 이신건목사님의 글을 보시길 추천합니다. 아마도 더 근본적으로는, 신학체계의 완성보다는 삶의 정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생각입니다. 해방신학을 보시면 잘 아실테고, 서구 신학자들이 그의 신학을 삶의 정황에 적절한 툴로 추천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죠.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그다지 추천을 못받고 있죠. 삶의 정황과 좀 유리된 사색의 신학이거든요. 후학을 통해서 더 발전될 소지가 많죠. 원래 운동하는 사람 따로 있고, 체계를 잡는 사람 따로 있다고 봅니다. 함석헌 옹의 씨알 사상도 무궁무진한 거 아시죠? 그 속에 떼야르 드 샤르뎅의 창발적 진화나 과정신학이 녹아 있습니다. 이를 발전시킬 후학이 문제겠죠.

루터의 두 왕국론과 이원론 문제를 좀 짚어볼게요.
요즘 이원론을 극복하자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있고요. 저도 통전적 신앙의 중요성을 알기에 나름 천착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성속의 구분이 없는 삶 속의 신앙, 또는 발바닥신앙의 중요성을 살아내려고 하는 사람이고요. 종교적 인간에서 관계적 인간으로 그리고 통전적 인간이해가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이원론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그것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들 그러죠. 히브리적 신앙을 회복하자라고.... 좋은 말인 듯 하면서, 모순된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신앙은, 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정황에서 발전시킨 삶의 모습입니다. 신앙고백이라는 표현을 쓰고자하는데요. 단계별로 인간이 하나님을 표촉하는 과정 속에서 받아들인 산물이라고 봅니다. 즉 하나님 이해의 증가의 산물이죠.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 속에서 히브리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그 말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하나님을 고백하려는 그들의 고뇌와 몸부림을 보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죠. 페르시아나 바빌론 문화 속에서 전승자료를 모으고, 토라를 선지서를 성문서를 확립하려고 했던 그들의 모습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주체적 수용이라고 봐야겠지요. 히브리적 성격과 헬라적 성격을 초대교회에서 구분하는 것은 당시에는 별로 의미가 없죠. 교부시대에는 플라톤의 사상을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원용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준 측면이 있다는 거죠. 다만 이시점에서, 극복하자는 것은 그 부산물 또는 부정적 요소로서 이원론을 극복하자는 말을 해야 제대로된 극복이라고 생각되네요. 포월해야죠. 님의 표현처럼......

루터의 두 왕국론은 이원론적으로 해석해서 극복해야 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과정철학에서 해소될 성질이 아닌 거죠. 어거스틴의 ‘두 도성’에서 발전한 것인데요. 하나님의 나라, 통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한 것인데, 이걸 과정철학에서 환원시키는 것은, 오히려 후퇴라고 보고요. 이 지점이 님과 저와 갈라지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과정철학의 틈새이고요.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포착하지 못한 증거라고 봅니다. 불교와 과정철학이 궁합이 잘 맞을 거라는 생각만 밝힙니다. 예수에 의해 선취된 교회는 모형입니다. 성령으로 하나 된 보편교회이고요. 종말로 열려진 완성으로 달려가고 있고요. 종말에야 그 실체가 드러나는 잠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요. 지금은 거울처럼 희미하게 보이지만, 온전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날이 있을 거로 봅니다. 다만, 종말에 대한 심판과 화해에 대해선,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칼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바르트, 몰트만, 판넨베르크에게도 각기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했으니까요.

다시 하나님의 전능 개념을 말하시네요. 범재신론으로 해소가 된 것으로 보는데요. 아닌가요? 악의 기원은  창조작업의 부산물이라고 설명드렸다고 보는데요. 3위일체로 내재,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과정신학의 성취입니다. 다만, 수학적으로도 이미 8차원까지 증명 가능한 시대라는 것만 첨가드립니다. 이건 맥그래스의 저서에서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고요. 부분적이라는 말은, 우발적 자연재해나 사고에 대해서 과정신학이 설명을 못한다는 부분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네요.

과정신학이 맥그래스의 책에 많이 인용되었냐고 물으시는데요. 추천도서 하나 드리면, ‘그리스도교 신학자료’(Christian Theology Reader)와 각주에 나와있는 원자료를 참고 하시면 될 듯합니다.

칼뱅의 예정론을 잠시 부연한 것은, 보수 진보 양측의 이해를 좀 높여보려고 적은 겁니다. 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을 듯하고요. 종말론에 대해서는 두 왕국론에 대한 설명으로 대체하면 될 듯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지평이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다만, 인간의 고통과 고난, 죄의 원인에 대해서는 토론할 부분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해 좀 언급하고 마칠게요. 종말에는 동어반복이라는 점을 일단 언급하고요. ‘드러난 신비주의’가 합리주의라는 점에서 시작해 봅니다. 신비라는 모자이크에서 한 조각 합리성이 드러난 거죠. 수많은 합리성이 드러날 겁니다. 모자이크를 맞추어 가는 작업일 겁니다. 사실의 학문에서 이미 검증이 된 것들이니까요. 다만, 그 합리성 조각들을 가지고, 합리적 이성의 우위를 주창하거나, 신비주의를 단순히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경계해야 겠지요. 인간의 과학은, 사실의 학문은, 우주를 구성하는 암흑물질에 대한 것도 아직 규명을 못한 상태입니다. 즉 빛의 입자보다 작은 알갱이들, 빛이 통과하면서 깨져버리는 알갱이들에 대한 설명을 못하고 있죠. 그런데 사실은 우주의 96%가 이런 알갱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아실테니, 더 이상 설명은 안하겠습니다.

반면에 신비주의를 개인의 감정정도의 차원에서 다루는 분들이 있죠. 피안의 세계에 틀어박혀서 현실을 외면한 부류입니다. 이런 분들은, 신비주의를 왜곡하는 분들이기에 문제가 심하죠. 왜냐하면, 사실의 학문에 속하는 분들은, 시행착오라는 과학적 툴을 사용해서 교정이라도 가능하지만, 이분들은 좀 힘들죠.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교감정론(Religious Affection)을 추천할 뿐입니다. 진짜와 가짜 신비주의를 잘 분석한 글이니까요.

계속 정목사님을 언급하시는데, 윗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담론형성의 방법 정도는 그 분에게 배우고 오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이성의 신학’의 한계에 대해서 논의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 그분도 포함되겠죠. 

한 가지 자문자답하는 것이 있는데요. 신학자나 철학자가 되어야 해탈을 하고 구원을 받나요? 너무 다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요. 일자무식이라도 하나님의 드러내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문제를 과정철학으로 환원만 하지 않으신다면, 언제든지 토론 가능합니다. 다만, 좀 바빠서 즉시 답글은 못올릴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미선이 (08-11-03 17:02)
 
거시기님~ 아래 댓글에 답변 올렸습니다.

정관 (08-11-01 10:35)
 
비판하고 비난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왜 마음은 끌리고 있나?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인더언들을 학살하고 대륙을 빼앗은 미국인들이 다시는 이렇게 참혹한 만행을 저지르지 말자고 고백한 영화가
있었죠? 인디오들의 살갗을 벗겨 죽이는 만행을 잊지 말자고,  이러한 일들이 인류역사에 종종 일어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조개껍질로 수도자의 살갗을 벗겨내고 그것도 부족해서 화형에 처하고  지금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느 노 신부의
고백처럼 그때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인간의 그 잔혹성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은 그나마 이성적 시대에
살고 있다보니 그러한 양상이 드러나지 않을 뿐 깊은 내면에는 인간의 적대감,잔혹성 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바라보는 가톨릭에서 조차 다원주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은 있을 수 있다" 정도이지 결코 종교간의
동등한 대화는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문제시 하는 분들도 없지는 않지만  이단 아닌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정도의 문제일뿐이죠
왜 굳이 잣대를 갖다 대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다 솔직히 말해서 권력나누기 하는 겁니다.  서로 지 잘낫다고 하다 보니 이러한 여러 교파들이
생겨난것 아니겠습니까?  평신도들에게 구별의 실익이 있기라도 한가요? 

나는 결코 다원주의자는 아니지만  다원주의자들의 심성이 훨씬 훌륭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불자가 나에게 불교를 권하면 당신이 훌륭한 부처가
되라고, 설령 여호와의 증인이 오더라도 그곳에 더 신실하라고 합니다. 가톨릭을 권하면 마찬가지로 가톨릭교리에 더욱 충실하라고 할 뿐입니다.

나는 단지 나의 삶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면 족할 뿐이지, 판단은 그들이 할 몫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르다고 어떻게 그들을 징계하며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막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  여기서 "내"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내"를 자기들만의 것이라 합니다.
이러한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겠지요.

    
거시기 (08-11-02 00:57)
 
관심 감사드리고요. 추후에 다양성 또는 다원성에 대해 토의가 있을 거로 봅니다. 그럼 이만...

sydney (08-11-01 17:45)
 
거시기 님은 자기 입장을 확실히 견지하면서 다른 입장들에 대하여 많이 이해 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요?
어디든 치우치기 마련인 인간이 '내가 중심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놈이 미친 놈이지.

거시기 (08-11-02 00:58)
 
지목사님 반갑고요. 대화가 말건넴이라고 보는 입장이니... 좀 다목적성 글이라는 점만 밝히겠습니다. 존경합니다^^

정관 (08-11-02 03:07)
 
같은 길을 걸어 왔으며, 같은 주를 고백하고 있으며,같은 이해의 과정을 겪어 온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적 괴리로 인하여
진리에 대한 내향성은 우리의 의식을 더 다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영성적. 신비적 입장에서만 언급하려 합니다.

일자(oneness)와 공(void)의 해석에 있어 위치를 서로 달리 놓고 있으며 서로 상위라 하고 있습니다. 그곳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체험적 인식으로 밖에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개신교 신비가로는  언더힐과 같은 분들이 있긴 하지만 개신교 신비학자가 전무하다 보니까
가톨릭 신비학자들과 타종교 신비학자들간의 견해 비교로 귀착이 되지만, 자기가 고백하는 종교의 틀로 바라 보고 있기 때문에 서로 연구하고
대화하고는 있어도 자기 고집은 죽기까지 꺾이기는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이정도 까지 되면 서로의 신인식, 관념같은 것에서 벗어나서 얘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뭡니까?    마음이죠, 마음 . 주님께서도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였으니,  남이 하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하는것이
아니라. 남의 철학을 논문 쓰듯 조립해 놓을 것이 아니라. '바로 너' ,'나'로 귀착이 되고 그곳에 바르게 진입이 되었다면
아무리 훌륭한 서술이라도 그저 그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뉴에이지나 자연영성을 경계하지만 속 내용을 보면 자기들이 더 뉴에이지적입니다.
 말씀 묵상이라고 하지만 명상보다도 깊게 들어가지 못합니다. 설교는 더 무속주의적이고요...  왜 뉴에이지가 문제이냐? 
뉴에이지적 상태를 교회는 더 이용하고 있죠. 가령 영상예배나..온누리 계열에서 하는 것들..  좀 같잖기도 하고 어린 백성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감정의 정화도 있고 치유 효과도 있으니 분별없이 하는 짓들이라도 그저 그러려니 합니다.
뉴에이지의 치명적 결함이 더 상승을 못하게 하는. 계속 그 상태로 빠지게 하는데는 뭐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통합심리학 책에서도 영적수행의 중요성에 대해 얘길 하는데,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수행을 제대로 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영성과 신비에 관심을 가진 분들중에는 자기 내적 체험을 확인하려고 하는 수도자들도 있고 신학자도 있는데 거기서 만족과
결론을 얻지 못하더라구요.  사변은 사변일뿐 마찬가지 착각이기 때문에 진보를 이루어 내지 못합니다.
마치 의처증과 같아서 거기서 해방이 일어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그래서 그다음은 뭐냐?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던 선악과를 따먹고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영원히 살기 위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라는 겁니다.

    
거시기 (08-11-02 20:48)
 
맞는 말씀이네요. 곱씹고 반성할 부분이죠. 어떤 때보면, 무당 굿거리하는 분위기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무속인을 비하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비도 (08-11-02 19:01)
 
거시기님 반갑습니다.^^ 신학적 입장은 다르지만 거시기님의 신학적 고민의 진정성은 충분히 느껴집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서로간에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 거시기님께 한가지
만 부탁드리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서 되도록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거시기님 좋은 가을 되시길 바랍니다.^^

    
거시기 (08-11-02 20:50)
 
반갑고요. 글쓰는 재주가 없어서 그리니 양해바랍니다.

정관 (08-11-03 13:13)
 
싸우다가 정든다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미워하면서 닮는 다고 그러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게 일반적인 속성이지만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도 그러니 너희는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특히 의견은 다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것이지 의견을 옹호하고  동의하니까 좋아하고 하는 세력이 모이다 보면 우상이 생기게 되고
그러한 그룹에 결국 뭐가 남겠어요.

미선이 (08-11-03 17:02)
 
거시기님께 드리는 답변

서로 충돌나는 지점만 분명하고 명료하게 얘기하시진 않고
너무 장황스런 얘기들을 늘어놓으신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님 스스로 시인하듯 그렇게 곁길로 나갈 이유는 없지요.

님이 바르트에 대해서 늘어놓는다고 해서 저 역시 그에 비판을 줄줄 못대는 것도 아니니까요.
단지 애초의 논의 맥락에서 줄줄 벗어나는 식의 논의라면 곤란하다는 얘깁니다.
상대방에 대한 논박을 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상대방의 논지에서 출발해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해야 할 터인데
그 출발이 공유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썰만 풀어놓는다면 생산적인 논쟁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르트 얘기라면 저 역시도 드릴 얘기 없는 건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바르트 신학에 대한 한계를 너무 많이 경험하는 바니까요.
혹시라도 거시기님만 바르트를 공부했고 저는 안했다고 생각진 않으시길 바랍니다.
님이 제게 언급하는 바르트 얘기들은 저로서도 워낙 물리도록 들은 바라 전혀 새롭지도 않구요.
아래의 글은 <미래에서 온 기독교>에도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르트에 따르면, 진정한 성서해석은 인간학적 사유방식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개입되는 그분의 계시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았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사적인 접근이나 심미적 차원에서 추적해본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 그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며, 전적인 초월자이다.
따라서 그분을 인간의 인식능력 안에서 규정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며, 죄라고 보았었다.
성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문화적 인식을 뛰어넘는,
전적인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학적인 역사비평학에 대한 한계도 같이 놓여 있다고 바르트는 보았었다.

하지만 바르트는 글자와 텍스트의 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문자주의나 성경주의(Biblicism)를 비난한다.
성경은 무오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책이지만 하나님의 초월적인 말씀을 증거하는 책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인간의 말인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결국 그 자체로서 말해지고
들려지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었다. 계시 앞에 인간은 기다릴 뿐이고
그러한 성경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성경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꺼이 성경이 자신들을 해석하도록 할 것과
성령이 본문을 통해 독자에 대해 판단의 말씀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었다.

그렇기에 바르트의 해석학은 <계시의 해석학>이라고 불릴 순 있겠지만
적어도 의미를 비판하고 고찰하는 의미작용의 해석학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러한 계시의 해석학은 매우 구체적이지 않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얘기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계시에 대한 기다림 그리고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나
성령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얘기들은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식의 동의반복일 뿐이잖은가.
결정적으로 바르트는 성경 해석에 적용하는
이 같은 공리들은 모든 해석에 미리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었다.

즉, 이것은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모든 인간적 비판들이 불허되는
면제 영역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바르트는 바로 이 같은 점을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해석학적 입장 그 자체에 대한 비평적 성찰 없이 그의 해석학적 공리들을 받아들일 경우,
그것은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결정하는 데 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바르트는 <절충적인 보수주의자>로 볼 뿐이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점은 나로서도 동의하지만,
그렇다면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고 발견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얘길 안할 수가 없잖은가. 그런데도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인간의 접근 가능성은 봉쇄되기에 그저 “기다려라”, “순종하라” 등등
매우 추상적인 대답으로 인도되고 있다. 흔히 그의 신학은 <기다림의 신학>이라고도 불려진다.

굳이 거론해본다면, 바르트는 인간 인식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증언에 기대어 이 하나님에 대해
“단지 몇 마디로 더듬거리고 암시하고 약속할 수 있을 뿐”이라면서,
<삼위일체론적 시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 삼위일체론적 시각이란 게 앞서 지적한 것처럼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술인데,
도대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고, 결국은 이러한 시각이
오히려 ―바르트가 의도했든 안했든 간에― 기독교 전통이라는 근본주의적 교리로
귀결되는 사태를 낳고 있다는 점은 이같은 바르트 신학의 분명한 한계를 보여주는 시사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님은 자꾸만 '환원', '환원' 하시는데 도대체 '환원'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이해하시는지요?
우리가 진리에 대해 설명하고 해명을 하는 것자체를 두고 얘기하는 건가요?
게다가 우리의 진리 탐구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그것이 환원이 된다고 보시는 건가요? 

가치중립 자꾸 부르짖으시는데 세계 안에 가치중립적인 게 어디있나요?
그러면 거시기님의 바르트 신학은 가치중립적이라고 보시나요?
하나님만이 가치중립적이다 라고 주장하면 가치중립이 이뤄지는 것인가요?

흔히 바르티안들은 하나님의 계시는 신비이니 스스로 말하도록 기다리라고
언뜻 은혜스럽게 말하지만 이것은 불가해한 영역에 대한 방치이자
오히려 그 탐구 자체를 환원이라는 미명하에 봉쇄하는 것밖에 되지 않지요.
그것이 바로 바르티안들에게서 나타나는 사유의 폭력성이기도 하구요.
물론 자신들은 뭐가  사유의 폭력인지 가늠하진 못하고 있겠지만요.

님은 애초부터 제가 말한 '수행 패러독스'라는 용어의 의미도 잘 파악하시진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수행 패러독스란 어차피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되고 있는 명제들을 갖고서
자신도 분명히 해당되면서도 이를 얘기할 때는 자신만 예외로 두고 있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말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님은 <허수아비의 오류>도 종종 범하고 있는데 저로선 그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과정철학이나 민중신학 속에서만 하나님의 계시와 신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하시면 안되잖아요. 님이 그런 말을 제게 한다는 것은
제가 주장하는 바에 대한 이해부터가 선행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한 반증만 될 뿐이랍니다.

그리고 님은 세기연을 무슨 종교 비판 연구소로 알고 있다면
보수 근본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처럼 아주 착각하는 바죠.
오히려 안티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예수와 기독교 붙잡고 있냐는 식으로 나오건만..

이원론에 대한 극복이라는 건 거기에 걸맞는 대체 사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오히려 정용섭 목사는 기독교 전통신학은 초기에만 이원론적이었고
일찌감치 이를 극복하고 전승되었다고 얘기하시는데
이런 얘기 어디가서 얘기하면 웃음거리 될 지도 모르지요.
기독교가 언제 새로운 형이상학에 기반해서 새로운 신학을 전개했었는지..
전통으로 자처하면 내려왔던 주류 메인 스트림은 결코 그렇지 않았지요.

그리고 보수에 대한 눈높이을 강조하시는데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과
이를 극복하는 대안을 내놓다는 것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세기연이 다비아를 따르고 싶은 맘은 없답니다.
아직 한국교인들이 워낙 보수적이니 다비아의 정목사 정도가 매우 혁신으로 보일 따름이죠.
그것도 매우 안정적인 테두리에서 개혁이니까 그 얼마나 안성맞춤인가요. 인기가 좋을 수 밖에요.
죄송하지만 세기연은 애초부터 그 길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그걸 굳이 저희에게 권하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리고 글을 쓰시면서 끝까지 <허수아비의 오류>를 범하시는데
제가 언제 과정철학만이 최고라고 얘기하던가요? 님은 이곳 세기연의 백두근본주의 글이라도 권하고 싶군요.
사실 거시기님이 비판하는 세기연은 애초부터 거시기님의 선입견에 의한
거시기님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세기연이었지
정말로 이곳 세기연을 파악하시고서 논하는 세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그래서 제가 님에게 허수아비의 오류를 말씀드린 것이랍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곳 세기연은 <오류>와 <비극>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한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던가요.
심지어 더 분명하고 극단적으로까지 말씀드린다면
어쩌면 오류와 비극의 문제는 과정철학이나 예수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되기도 한답니다.

끝으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님이 장황하게 글을 쓰면 쓸수록 논의가 너무 벗어날 수 있는데다가
애초 제가 님에게 반문을 드린 얘기들도 님이 곁길로 늘어놓는 얘기 속에 희석될 수도 있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바르트 신학만 토론하자고 하시면 저로서도 그렇게 하겠지만
애초 바르트 신학을 거론하지도 않은 저희에게 바르트 신학을 굳이 줄줄 강변하실 필요는 없지요.

우리가 흔히 쓰는 추상적 신앙적 언명들의 무기력함과 공허함을 저로선 바르티안들에게서도 종종 보는 바인데
바로 그래서 http://freeview.org/bbs/tb.php/b001/114 이 글을 참조하길 바랬는데
아니나다를까 거시기님 역시 이를 환원으로 몰아가고 싶은 것은
제가 보기엔 더없이 바르티안들의 한계를 잘도 드러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를 테면, 하나님만이 가치중립이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신비라서 뭐 어쩌라는 얘긴가요?
그렇다고 그런 얘기 자체를 저희가 부정이라도 하던가요? 그래서 그저 골아픈 철학 공부나 파지말고
인내심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며 그분의 계시와 신비에 맡기고 순종하고 기다려라??
제가 보기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계시와 신비를
오히려 자신들의 사유의 폭력의 도구로밖에 쓰이지 않는 걸로만 보입니다.
 
물론 님이 보시기에 이곳 세기연이 루터, 칼뱅, 바르트, 몰트만 등등 그런 은혜스럽고도
위대한 독일신학자들도 모른 채로 세계와 기독교 변혁 연구를 한다고 보시는 건
거시기님께서 세기연을 그렇게 보시고 싶어하시는 거시기님의 그 편견이 저지르고 있는 자유지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건대, 상대방을 제대로 비판하고자 하실 때는 제발
상대방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논지들을 온전히 파악하시고서나 논박하시는 게
토론과 논쟁에 있어 기본적인 매너가 아닐까 싶군요.

안바쁘실때 답변은 언제든지 올리셔도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리지요.

늘오늘 (08-11-04 08:07)
 
거시기님의 아름다운 글에
늘오늘이 받은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
솔직하고 투명한 입장표명, 예리하고 섬뜩한 문제제기, 유려하고 따뜻한 문체,
저로서는 거의 숨이 막힐 듯한 박진감을 느끼며,
미선이님과의 공방을 지켜보았습니다.

쟁점들이 살아 꿈틀거리면서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정말이지 보기 드문, 멋진 논쟁을 지켜보는 즐거움/포만감과 함께
님께서 제기하신 심각한 쟁점들, 보여주신 논쟁의 모범은
큰 숙제가 되어 저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거시기님. ^^

    
미선이 (08-11-04 08:22)
 
아마도 늘오늘님께선 거시기님이 계속 글을 올려주시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싶지만 논박을 할 경우엔 지나치게 너무 장황스럽게만 안했으면 바랄 따름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하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얘기를 마치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얘길 내뱉는 것은
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생산적 논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요.

    
바비도 (08-11-04 13:01)
 
거시기님의 11월3일의 댓글은 아주 긴글 이었지만 결국 "신앙과 신학"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희 세기연이 무의식적으로 "신앙과 신학"의 관계를 "신앙 = 신학"으로 바
라보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에 거시기님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성은 있다고 봅니다.

        
미선이 (08-11-04 13:48)
 
신앙=신학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신학과 무관한 신앙은 결코 없습니다. 하다못해 그 어떤 단순 보수 기독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에 대한 그 어떤 신학적 관점과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철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철학의 입장에 불가피하게 발담그고 있는 입장과도 마찬가지죠. 바로 그래서 건강한 신앙일수록 건강한 신학이 요구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때 신앙과 신학의 관계에서 신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같은 신앙이 왜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죠.
반면에 신앙은 설명의 차원이라기보다 경험을 묘사하는 기술의 차원이요, 고백의 차원일 따름입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와도 유비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역으로 만일 신학은 필요없고 신앙만 원하는 그런 자세를 원한다면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해명 또는 이론 작업들은 머리만 아픈 것이니 그다지 필요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자칫 <반주지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내포되어 있기에 그 역시 바람직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현재 위치가 어디에 서 있든 간에
적어도 지금 현재보다는 좀더 나은 가능한 변화들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거시기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았군요. 신학자나 철학자가 꼭 되어야 구원과 해탈을 경험하지는 않지요. 어차피 경험의 차원이란 삶의 전방위적 차원이기에 굳이 배움이라는 과정이 꼭 들어가야 하나님의 신비 구원 혹은 해탈 경험을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그런데 이는 구원과 해탈에 대한 개념 정의가 또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보는 구원과 해탈에 대한 정의와 해석들이 제각기 다르니까요).

신학자나 철학자의 임무는 종교적 경험을 포함한 인류사의 다양한 경험들을 해명하고 정리하여
다음 세대에게 보다 유익하고 생산적인 삶의 경험으로 다시금 인도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좀더 우리네 경험의 시행착오들을 줄이고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건강한 삶을 지향하자는 데에 있는 것일테죠..

            
바비도 (08-11-04 14:41)
 
미선이님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신앙과 신학의 긴장관계를 놓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점에 대한 거시기님의 충고는 귀담
아 들을 필요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미선이 (08-11-04 17:37)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로선 구체적으로 세기연의 어떤 점이
무의식적으로 "신앙=신학"으로 바라보는 오류가 있었는지는
오히려 제가 잘 몰라서 그러하답니다.
말씀하신대로 좋은 충고라면 정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지요.

                    
바비도 (08-11-04 20:41)
 
"신앙=신학"으로 바라보는 오류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없이 모든 신학 또는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세기연이 신앙=신학 으로 바라보는 오류에 빠져있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세기연도 신앙=신학 으로 바라보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거
시기님의 그러한 충고에 대해서는 경청을 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미선이 (08-11-04 20:52)
 
아, 바비도님~ 애초 제가 말씀드린 건 바로 세기연의 오류 가능성을 논할 수 있는 그 근거를 모른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바비도님께서 그 같은 오류 가능성은 모든 신학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오류라고 말씀하시니
저로서도 더이상 할 얘기도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ㅎㅎ 

어차피 그러한 얘기는 말씀하신대로 당연히 귀담아 들어야 할테지만 역으로 말해서
거시기님도 예외일 수 없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그런 말은
결국은 수행 패러독스가 된다는 점도 덧붙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이점은 제가 거시기님께도 앞서서 누차 강조해서 말씀드렸기도 했었구요.

이젠 무슨 뜻인지는 바비도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비도 (08-11-04 20:58)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거시기 (08-11-05 12:44)
 
그동안 글이 몇 개 오고 갔네요.
그 중에는 강길님이 저를 바르티안으로 매도(?)한 글도 있고요. 저야 뭐 영광입니다. 사실 바르트의 신발끈도 풀지 못하는 필부거든요. 그런데요. 사실 칼 라너나 바르트를 인용한 것은, 그들의 신학하는 자세에 대한 설명에서 나온 거고요. 바르트는 특히 그의 성서관으로 인해 좀 길어진 겁니다. 예수라는 샘물에서 한 우물을 퍼 먹는 자들이라는 점이 중요하거든요. 동시에 다양한 고백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수용하는 입장이고요. 우물물이 좀 이상하다고 돌 던지고 돌아서는 것은 예(도)가 아닙니다. 더 퍼내서 그 정수를 맛보아야지요. 바닥까지 파봤나요?

바르티안으로 오해를 받았으니, 설명을 좀 드려야겠지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다만, 전 예수의 제자이고 싶군요. 많은 제자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초대교회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신비주의자들을 동정하는 사람입니다. ‘실재’와 ‘우유성’을 소재로 오해를 좀 풀어보려고 합니다. 내용이 상당히 어려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성의를 다해보죠. 

아시겠지만, 초대교회에서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칼케톤신조가 나올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양자택일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선겁니다. 엄청난 전투가 벌어진 거죠. 그 끝은 아무래도, 몬타누스파의 정죄에서 마무리되죠. 둘 사이의 투쟁과 고민을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몬타누스는 영지주의 계열이고, 흔히 지금 영지주의자라고 하면, 이단시되는 분위기이지만, 당시에는 교회를 순회하는 예언자들이라고 볼 수있죠. 대부분 여자분들이었으니, 여사제 정도 될 겁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나타내심과 능력’ 속에서 개척되고, 유지될 때는 사실 많은 순회 예언자들이 있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지교회의 장로나 감독들과 마찰이 빚어지기 시작하죠. 그 이유는 아실겁니다.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보존하고 존속시키는 문제가 크게 대두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권위의 문제가 불거졌고, 당연히, 순회예언자들은 성령을 통한 직접 계시를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지교회를 이끌어가야 하는 장로나 감독들은, 선포된 말씀으로부터, 즉 드러난 계시의 우위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푸코가 제대로 관찰했듯이 가치투쟁이 시작된 겁니다. 양측 다 옳은 말처럼 보이고요. 결론은 합리주의자들의 승리였습니다. 은폐된 계시의 드러난 부분으로부터, 즉 합리성으로부터 시작하자는 쪽의 승리입니다. 당연한 귀결이고요. 왜냐면, 예언자 전통이 승리했다면, 계시는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그리스도교는 초기에 역사에서 사라졌거나, 변방의 한 미신으로 명맥을 유지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예언자 계열은 영지주의자들로 타락했거든요. 그렇다고, 예언자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죠. 성례전에서 약간 보존되어 있습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세례와 주의 만찬의 형식으로 보존되어 있죠.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쪽은 더 발전시켰고요. 중세시대에는 칼빈보다 루터쪽을 주목해야 되고요. 루터보다는 쯔빙글리가 더 중요합니다. 근현대사에서는 웨슬리가 만났던 모라비안들, 제세례파, 퀘이커교도, 아미쉬 등등에서 그 흔적이 남아있죠. 순복음주의계열도 그 흔적입니다.

자, 다같이 실재를 만났습니다. 인간의 눈에 은폐된 하나님의 신비가, 예수를 통해서 가시적 세계로 내려온거죠. 예수는 은폐된 신비의 드러난 부분이고요. 그의 말씀 즉 성서는 드러난 신비의 우유성이죠. 예수 자체는 신비입니다. 신비는 드러난 부분이 있고, 은폐된 부분이 있죠. 처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신비 속에서 드러난 부분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 말은 다시 신비의 우유성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는 그들의 경험을 옮긴 성서를 들여다 보는 입장이고요. 즉 굴절된 상을, 거울에 반사된 희미한 부분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성서를 통해서는, 굴절된 상만 볼 뿐입니다. 드러난 신비라는 합리성 중에서,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틀린 보습만, 굴절된 상만 보는 셈이죠. 우리는 다 그 우유성을 가지고 ‘감 나와라 대추 나와라’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로고스로 그것도 호로고스로 부르지만, 빛으로도 유비됩니다.
아시다 시피 빛은 실재와 우유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빛은 실재와 우유성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죠. 빛의 속도는 실재이지만, 빛의 입자와 파동은 빛의 우유성이죠. 빛의 입자와 파동은 빛이 광속으로 물체를 통과하면서 반사하거나 부수어버립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굴절된 상만 보는 거고요. 빛은 이미 광속으로 저 멀리 가버린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우유성이라는 기표 속에 실재를 은폐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반면에, 성례전은 드러난 우유성을 통과해서, 실재를 직접적으로 만나게 합니다. 신비를 대면하게 하기 때문이죠. 포스트 모던적 관점에서 언어 또는 말씀을 봐도 동일합니다. 비트겐쉬타인의 말처럼, 이 앞에 놓여있는 커피 맛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을 담아낸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언어의 상대성은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해석되어야 하고요. 언어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님의 글보다는 차라리 시 한편이 더 하나님을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가히 성서는 제의적 시어가 아닌가요?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겁니다. 모르신다면, 참 난감한 상황이 앞에 놓여 있는 겁니다. 시를 한번 음미해 보시죠.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실재이신 하나님은 광속으로 이미 가버렸는데, 그 사랑에 귀먹은 시인(구도자)의 사모의 정이 절절히 흐릅니다. 결국은 침묵하죠. 왜 침묵을 할까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시는 것을 경청하는 겁니다.

강길님은 어떤 사모곡을 부르시는 지 궁금하군요. 님은 벌써 멀리 가버렸는데...
강길님이나, 다비아 정목사님의 사모곡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지성수 목사님이나, 문익환 목사님, 김재준 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분들은 온몸으로 사모곡을 키셨고, 키는 분들이죠.

민중 또는 화이트헤드로 켜는 사모곡은 그것이 아무리 절절하다고 하더라도, 사모곡일 뿐입니다. 판넨베르크, 노자로 켜는 사모곡도 동일선상에 있고요. 실재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는데, 기표를 가지고, 굴절된 상을 가지고 만지작 거리는 모습이죠. 몇 개의 모자이크를 손에 넣고, 열심히 메스를 가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과정철학이나, 상처받지 않은 이성은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봅니다. 그저 기표 속에서 헛발질을 하는 모습만 보이고요.

제 말이 좀 심했죠?
택스트를 아무리 두드리고 파해쳐도, 과학자의 눈에는 종이에 잉크가 덧입혀진 것만 보이듯이, 과정철학을 분석틀로 삼고 아무리 택스트를, 컨택스틀 뒤집어봐도, 얻은 것은 드러난 신비, 우유성만 볼 뿐입니다. 이것은 정목사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실재는 이미 떠나고 없는데, 이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가지고, 그 심층으로 들어가보려고 하는 시도는, 그 노력은, 존중하지만, 택스트 속에서 얻는 것은, 아무리 인문학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비신화화한다고 해도 별로 없습니다. 단지 몇 조각의 합리성만 추출할 뿐이죠. 신학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니, 서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신비는 그렇게 해서라도 보존됩니다. 그래서 해석은 자유롭게 하자는 입장이지만, 성서는 변개를 하지말자는 입장이고요. 이점은 바르트와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걸까요? 
우유성이 지시하는 곳을 보는 눈이 필요하겠죠.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지말고, 달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요.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애초에 달이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딱 한마디면 족하죠. 루돌프 오토가 했다는 말.

“누미노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책을 보지 말 것을 권합니다.”

우유성을 가지고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실재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도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석가를 만나거든 석가를 죽여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예수를 만나려거든 예수를 죽여야합니다. 성서를 집어던져야하고요. 역설이죠. 강길님이 말하는 패러독스입니다. 화이트헤드를 집어던져야 예수를 만납니다. 판넨베르크를 집어던져야 예수를 만나고요. 다 싹 지우고 다시 시작해야하니 어렵죠. 뒤틀린 상, 그것도 희미하게 반사된 상을 가지고, 아무리 닦고 채색을 해도 그건 그냥 스테인드 글라스일 뿐입니다. 빛은 이미, 가버렸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전 다행이다 싶어요. 애초에 신학이 뭔지 배울 겨를이 없었으니.... 그냥 일상에서 죽어라 달려오다, 필요한 때 이것 저것 읽어보고, 확인해보고, 배를 갈아타고 온 것 같네요. 그래서 사람들 눈에는 바르티안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비안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서를 원래대로 보존하자고 하는 입장을 말하면, 보수 꼴통이라고 소리도 듣고......

시간이 없어서 존 호트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나중에 뵙죠.
존 호트는 현대 과학 특히 진화론과 대화하면서 다윈 이후의 '진화론적 신학'을 적극 모색하는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과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와 과학', '생태 신학', '진화론적 신학'에 관련된 10여 권의 저서는 그가 진화론에 가장 정통한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요. ‘다윈 안의 신’,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같은 책들이 번역되어 있으니 함 읽어보시길 바라고요.

제가 관심가는 부분은 그의 독특한 텍스트리딩(text reading)입니다. 성서는 중층적으로 읽혀진다는 거죠. 기표를 강조하는 분들은 반드시 유념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성서무오성을 주장하는 분들과 과학자들 특히 과학적 환원론자들이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고요. 철학적인 합리적 이성이라는 잣대를 가진 신학자들도 주의를 해야하는 부분이고요.

성서는 한마디로, 실재를, 그것도 은폐된 실재의 드러난 부분을, 즉 합리성들을 담은 신앙고백어라는 겁니다. 그것도 시적으로 쓰여진, 제의적 용어가 뒤섞인 상징어입니다. 그래서 유비적, 비유적, 적응적 해석이 중요합니다.

성서를 해석한 후에는, 성서는 실재의 몇 가지 조각을 담은 드러난 신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침묵해야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실재이신 하나님의 말 건넴이 시작되죠. 빛이 스스로 빛을 비추는 모습이죠......


나중에 또 글 올리고요.
한가지 답을 해드려야 될 듯해서,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유무식을 안가리죠. 그래서 복음이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지만, 수 많은 오클로스들에게는 진리가 된거죠.

    
미선이 (08-11-05 15:20)
 
거시기님글은 > 표시로 제 글은 -로 표시로 답변드리지요.


>그동안 글이 몇 개 오고 갔네요.
>그 중에는 강길님이 저를 바르티안으로 매도(?)한 글도 있고요. 저야 뭐 영광입니다. 사실 바르트의 신발끈도 풀지 못하는 필부거든요. 그런데요. 사실 칼 라너나 바르트를 인용한 것은, 그들의 신학하는 자세에 대한 설명에서 나온 거고요. 바르트는 특히 그의 성서관으로 인해 좀 길어진 겁니다. 예수라는 샘물에서 한 우물을 퍼 먹는 자들이라는 점이 중요하거든요. 동시에 다양한 고백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수용하는 입장이고요. 우물물이 좀 이상하다고 돌 던지고 돌아서는 것은 예(도)가 아닙니다. 더 퍼내서 그 정수를 맛보아야지요. 바닥까지 파봤나요?

- 거시기님은 자신을 바르티안으로 오해 했다고 매도 했다고 말씀하시지만, 솔직히 거의가 바르트를 끌어쓰고 인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르트 이론에 잘도 동조하는 편이잖아요. 이미 쓰신 글에서는 분명하게 바르트 입장을 대변하고 있으면서, 이제와선 나는 바르티안이 아니니 오해하고 매도하면 안된다라고 얘기하시면, 영구가, 분명히 영구 있는데도, “영구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도대체 뭐가 다르나요?
무엇보다 님의 글의 논지들은 제가 얘기하는 다른 바르티안들에게서도 많이 발견하는 모습이랍니다.


>바르티안으로 오해를 받았으니, 설명을 좀 드려야겠지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다만, 전 예수의 제자이고 싶군요.

- 예수의 제자라.. 그렇게 따지면 저 역시도 마찬가지겠군요.
그런데 솔직히 이런 얘긴 하나마나한 얘기지요...
누구나 자신을 복음주의라고 주장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구..


>많은 제자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초대교회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신비주의자들을 동정하는 사람입니다. ‘실재’와 ‘우유성’을 소재로 오해를 좀 풀어보려고 합니다. 내용이 상당히 어려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성의를 다해보죠.  아시겠지만, 초대교회에서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칼케톤신조가 나올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양자택일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선겁니다. 엄청난 전투가 벌어진 거죠. 그 끝은 아무래도, 몬타누스파의 정죄에서 마무리되죠. 둘 사이의 투쟁과 고민을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제는 애초 위의 본문과도 점점 동떨어진 논의들을 꾸역꾸역 계속 끼워 넣는
님의 장황스런 논의들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몬타누스는 영지주의 계열이고, 흔히 지금 영지주의자라고 하면, 이단시되는 분위기이지만, 당시에는 교회를 순회하는 예언자들이라고 볼 수있죠. 대부분 여자분들이었으니, 여사제 정도 될 겁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나타내심과 능력’ 속에서 개척되고, 유지될 때는 사실 많은 순회 예언자들이 있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지교회의 장로나 감독들과 마찰이 빚어지기 시작하죠. 그 이유는 아실겁니다.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보존하고 존속시키는 문제가 크게 대두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권위의 문제가 불거졌고, 당연히, 순회예언자들은 성령을 통한 직접 계시를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지교회를 이끌어가야 하는 장로나 감독들은, 선포된 말씀으로부터, 즉 드러난 계시의 우위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푸코가 제대로 관찰했듯이 가치투쟁이 시작된 겁니다. 양측 다 옳은 말처럼 보이고요. 결론은 합리주의자들의 승리였습니다. 은폐된 계시의 드러난 부분으로부터, 즉 합리성으로부터 시작하자는 쪽의 승리입니다. 당연한 귀결이고요. 왜냐면, 예언자 전통이 승리했다면, 계시는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그리스도교는 초기에 역사에서 사라졌거나, 변방의 한 미신으로 명맥을 유지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예언자 계열은 영지주의자들로 타락했거든요. 그렇다고, 예언자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죠. 성례전에서 약간 보존되어 있습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세례와 주의 만찬의 형식으로 보존되어 있죠.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쪽은 더 발전시켰고요. 중세시대에는 칼빈보다 루터쪽을 주목해야 되고요. 루터보다는 쯔빙글리가 더 중요합니다. 근현대사에서는 웨슬리가 만났던 모라비안들, 제세례파, 퀘이커교도, 아미쉬 등등에서 그 흔적이 남아있죠. 순복음주의계열도 그 흔적입니다.

- 합리주의자들의 승리? 님은 합리성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합리주의의 승리를 얘기하려면 저는 애초부터 교회사를 님의 구도와 다르게 해석합니다.
새로운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통해 예수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새 술은 새 부대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다들 낡은 틀 안에서 뭘 찾자는 건지요.



>자, 다같이 실재를 만났습니다. 인간의 눈에 은폐된 하나님의 신비가, 예수를 통해서 가시적 세계로 내려온거죠. 예수는 은폐된 신비의 드러난 부분이고요. 그의 말씀 즉 성서는 드러난 신비의 우유성이죠. 예수 자체는 신비입니다. 신비는 드러난 부분이 있고, 은폐된 부분이 있죠. 처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신비 속에서 드러난 부분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 말은 다시 신비의 우유성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는 그들의 경험을 옮긴 성서를 들여다 보는 입장이고요. 즉 굴절된 상을, 거울에 반사된 희미한 부분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성서를 통해서는, 굴절된 상만 볼 뿐입니다. 드러난 신비라는 합리성 중에서,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틀린 보습만, 굴절된 상만 보는 셈이죠. 우리는 다 그 우유성을 가지고 ‘감 나와라 대추 나와라’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로고스로 그것도 호로고스로 부르지만, 빛으로도 유비됩니다.
아시다 시피 빛은 실재와 우유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빛은 실재와 우유성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죠. 빛의 속도는 실재이지만, 빛의 입자와 파동은 빛의 우유성이죠. 빛의 입자와 파동은 빛이 광속으로 물체를 통과하면서 반사하거나 부수어버립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굴절된 상만 보는 거고요. 빛은 이미 광속으로 저 멀리 가버린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우유성이라는 기표 속에 실재를 은폐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반면에, 성례전은 드러난 우유성을 통과해서, 실재를 직접적으로 만나게 합니다. 신비를 대면하게 하기 때문이죠. 포스트 모던적 관점에서 언어 또는 말씀을 봐도 동일합니다. 비트겐쉬타인의 말처럼, 이 앞에 놓여있는 커피 맛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을 담아낸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언어의 상대성은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해석되어야 하고요. 언어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님의 글보다는 차라리 시 한편이 더 하나님을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가히 성서는 제의적 시어가 아닌가요?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겁니다. 모르신다면, 참 난감한 상황이 앞에 놓여 있는 겁니다. 시를 한번 음미해 보시죠.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실재이신 하나님은 광속으로 이미 가버렸는데, 그 사랑에 귀먹은 시인(구도자)의 사모의 정이 절절히 흐릅니다. 결국은 침묵하죠. 왜 침묵을 할까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시는 것을 경청하는 겁니다.

- 님이 만해 한용운의 시까지 인용하며, 장황스럽게 올려주신 글의 요지가 결국은 실재 자체가 아닌 드러난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자기 드러냄때까지 기다리고 경청해야 한다는 게 궁극적 요지 아닌가요?

그런데 님의 그런 얘기들이 이미 바르트나 그 추종자들이 줄창 하는 얘기라서 제가 앞서 그렇게 보는 신학에 대한 비판까지 쓴 것인데, 제대로 안읽어보셨는지요. 계시의 드러냄이나 기다림 및 경청을 강조하는 신학이 주는 폐해들 말이에요.


>강길님은 어떤 사모곡을 부르시는 지 궁금하군요. 님은 벌써 멀리 가버렸는데... 강길님이나, 다비아 정목사님의 사모곡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지성수 목사님이나, 문익환 목사님, 김재준 목사님을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분들은 온몸으로 사모곡을 키셨고, 키는 분들이죠.  민중 또는 화이트헤드로 켜는 사모곡은 그것이 아무리 절절하다고 하더라도, 사모곡일 뿐입니다. 판넨베르크, 노자로 켜는 사모곡도 동일선상에 있고요. 실재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는데, 기표를 가지고, 굴절된 상을 가지고 만지작 거리는 모습이죠. 몇 개의 모자이크를 손에 넣고, 열심히 메스를 가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과정철학이나, 상처받지 않은 이성은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봅니다. 그저 기표 속에서 헛발질을 하는 모습만 보이고요.

- 다양성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다양성 간의 충돌을 해결하지 못하고서
물과 기름을 동시에 포용하겠다는 얘기들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철저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해줄 따름입니다.

다비아 정용섭 목사와 문익환 목사를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얘기가
철학에서 마치 들뢰즈와 헤겔을 동시에 인정하겠다는 모순과도 다르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들의 신학적 일관성이 아닌 그저 인간적 모습으로 사모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요.



>제 말이 좀 심했죠? 택스트를 아무리 두드리고 파해쳐도, 과학자의 눈에는 종이에 잉크가 덧입혀진 것만 보이듯이, 과정철학을 분석틀로 삼고 아무리 택스트를, 컨택스틀 뒤집어봐도, 얻은 것은 드러난 신비, 우유성만 볼 뿐입니다. 이것은 정목사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실재는 이미 떠나고 없는데, 이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가지고, 그 심층으로 들어가보려고 하는 시도는, 그 노력은, 존중하지만, 택스트 속에서 얻는 것은, 아무리 인문학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비신화화한다고 해도 별로 없습니다. 단지 몇 조각의 합리성만 추출할 뿐이죠. 신학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니, 서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신비는 그렇게 해서라도 보존됩니다. 그래서 해석은 자유롭게 하자는 입장이지만, 성서는 변개를 하지말자는 입장이고요. 이점은 바르트와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걸까요?  우유성이 지시하는 곳을 보는 눈이 필요하겠죠.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지말고, 달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요.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애초에 달이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딱 한마디면 족하죠. 루돌프 오토가 했다는 말.
“누미노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책을 보지 말 것을 권합니다.”

- 그런 얘긴 거짓 수행가들도 종종 얘기합니다. “이러이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함부로 까대거나 나대지 말라”고..
그야말로 폭력적 횡포가 아닐 수 없지요.
신비와 계시 경험을 빙자한 폭력이란 게 성립되지 않을꺼라고 보나요?


>우유성을 가지고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실재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도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석가를 만나거든 석가를 죽여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예수를 만나려거든 예수를 죽여야합니다. 성서를 집어던져야하고요. 역설이죠. 강길님이 말하는 패러독스입니다. 화이트헤드를 집어던져야 예수를 만납니다. 판넨베르크를 집어던져야 예수를 만나고요. 다 싹 지우고 다시 시작해야하니 어렵죠. 뒤틀린 상, 그것도 희미하게 반사된 상을 가지고, 아무리 닦고 채색을 해도 그건 그냥 스테인드 글라스일 뿐입니다. 빛은 이미, 가버렸고요.

- 오해하셨군요. 제가 말하는 패러독스란 그 패러독스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도 분명히 예외가 아니면서 담론에서 자신만은 예외로 치부하며 말하는
그 패러독스를 얘기한 것이랍니다. 그것 역시 바로 사유의 횡포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전 다행이다 싶어요. 애초에 신학이 뭔지 배울 겨를이 없었으니.... 그냥 일상에서 죽어라 달려오다, 필요한 때 이것 저것 읽어보고, 확인해보고, 배를 갈아타고 온 것 같네요. 그래서 사람들 눈에는 바르티안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비안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서를 원래대로 보존하자고 하는 입장을 말하면, 보수 꼴통이라고 소리도 듣고......

-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유 행태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강길’이라는 실재에 대해 아무리 사람들이 비판하고 까댄다고 해도
그것은 ‘정강길이라는 실재 자체’가 못되기에 함부로 규정하고 판단하지 말고
그냥 자기를 드러내기까지 기다리고 경청하는 태도나 가져라“라고 저도 똑같이 되돌려서 말할 수 있답니다.

역으로 거시기님이 파악하는 세기연이나 정강길은 실재 자체인가요?
아니면서 그렇게 세기연을 그렇게 판단하고 정강길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요?
실재가 아니라 우유성을 경험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아무렇게나 말해도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인가요?



>시간이 없어서 존 호트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나중에 뵙죠.
존 호트는 현대 과학 특히 진화론과 대화하면서 다윈 이후의 '진화론적 신학'을 적극 모색하는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과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와 과학', '생태 신학', '진화론적 신학'에 관련된 10여 권의 저서는 그가 진화론에 가장 정통한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요. ‘다윈 안의 신’,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같은 책들이 번역되어 있으니 함 읽어보시길 바라고요.

- 이미 읽어봤으며 이곳 세기연 게시판에도 책소개가 되어 있답니다.



>제가 관심가는 부분은 그의 독특한 텍스트리딩(text reading)입니다. 성서는 중층적으로 읽혀진다는 거죠. 기표를 강조하는 분들은 반드시 유념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성서무오성을 주장하는 분들과 과학자들 특히 과학적 환원론자들이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고요. 철학적인 합리적 이성이라는 잣대를 가진 신학자들도 주의를 해야하는 부분이고요.
성서는 한마디로, 실재를, 그것도 은폐된 실재의 드러난 부분을, 즉 합리성들을 담은 신앙고백어라는 겁니다. 그것도 시적으로 쓰여진, 제의적 용어가 뒤섞인 상징어입니다. 그래서 유비적, 비유적, 적응적 해석이 중요합니다.
성서를 해석한 후에는, 성서는 실재의 몇 가지 조각을 담은 드러난 신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침묵해야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실재이신 하나님의 말 건넴이 시작되죠. 빛이 스스로 빛을 비추는 모습이죠......

- 제가 앞서 소개한 성서관은 성서는 계시와 오류의 뒤섞임물이라는 거죠.
바로 그래서 오류야말로 계시로 나아가는 관문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거구요.
이에 대해서는 http://freeview.org/bbs/tb.php/b001/30 참조


>나중에 또 글 올리고요.
한가지 답을 해드려야 될 듯해서,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유무식을 안가리죠. 그래서 복음이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지만, 수 많은 오클로스들에게는 진리가 된거죠.

- 네 이미 저희도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으로 보고 있답니다.

저도 끝으로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여전히 제가 반론을 드린 부분에 대한 핵심은 계속 비껴서 말씀하시는데
부디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나중에 또 글을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거시기 (08-11-06 17:31)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젠 침묵하면서, 자신이 펼친 논지를, 삶으로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길님의 글에 댓글 성격이 아니고, 윗글에 대한 후반부 글입니다. 댓글 한번 더 다시고 토론 종료해도 될 듯합니다. 토론해서 풀리는 문제이었다면, 아마 수많은 사람들의 사상 속에서 이미 풀렸을 겁니다.

이전 글에서 신학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서 숙고해 보라고 글을 올렸는데요. 결론부터 말하면 신학은 인간학입니다. 신의 신비의 영역은 결코 터치를 못하죠. 그렇다고 신학이 무용하다는 생각은 결코 아니고요. 올바른 신학은 신비의 드러난 부분, 그 중에서도 합리적이라는 단편들을 가지고, 체계를 세우는 학입니다. 그 체계를 통해서나마, 은폐된 신비의 길이 보존되는 측면이 있기에, 아주 중요하죠. 그 체계를 교의학으로 발전시킨 것이 신학의 의의이자 역할입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드러난 신비의 보존이라는 측면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하나의 무속신앙으로 타락했을 겁니다.

신학의 또 다른 의의는, 드러난 신비를 해석의 지평으로 열어놓는다는 데 있죠. 이게 중요한 겁니다.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하기에, 다양한 해석의 길이 열려야 합니다. 특히 ‘삶의 정황’이 시대마다, 공동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성서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하고요.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삶의 정황을 가지고, 21세기의 삶의 정황을 이해 하기는 어렵죠. 그래서 해석이 필요한 겁니다. 그렇다면, 해석은 필연적으로 자기 삶의 문화와 대화를 하도록 유도합니다. 현재의 시대 조류, 세속성과 다원성으로 대표되는 조류와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한 거죠. 기독교의 역사를 촘촘히 들여다보시면 아시겠지만, 시대와의 대화에서 도망간 역사가 없습니다. 적극적인 대화와 주체적인 수용이 있었죠. 멀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페르시아, 바벨론, 헬라문화, 문예부흥, 근대의 합리주의, 경험주의, 합리적 이성의 시대, 그리고 오늘 날의 해체의 시대인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대화를 해온 겁니다. 대화를 하려면, 일단 자신의 관점이 있어야 될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초기의 신비 자체인 그 분과의 동행했던 경험과, 그 기억을 이성을 통해 사유하면서 구축한 교의 또는 신학에 비추어서, 자신의 시대와 대화를 하는 거죠. 가다머는 이를 두 지평의 대화, 대화를 통한 융해를 말했고, 해석학의 지평을 열어놓은 겁니다. 역사에서도 이런 말이 있죠.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고, 카아가 기존의 랑케식 실증주의 사관의 한계를 적시한 말에서요.

그래서 신학은 중요합니다. 다양한 물줄기를 퍼 올려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혼탁한 한국 기독교 상황에서는 더욱더 중요하죠. 세속성과 다원성으로 대표되는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신을 대신한 물신주의, 자신의 가치가 절대적이라는 독단주의 등의 옹졸한 모습이 보입니다. 세속적인 세계에서, 다원화된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들의 가치혼란, 정체성의 혼란을 보고 있는 겁니다. 전통과 정통성이라는 무기로 자신을 울타리 치는 보수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보수신학이 가지는 규범적인 모습 또는 구심력을 볼 수 있고요. 이를 해체해서, 비신화화하려는 진보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그것을 벗어나려는 원심력을 봅니다. 여기서 요점은 자신들의 신학이 자신의 삶의 정황을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느냐 아니냐에 있을 겁니다. 설명을 못하면 도태될 것이며, 새로운 신학이 자리를 잡겠죠. 그래서 신학은 인간학입니다. 좀 더 세밀히 구분하면,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표출된 현상을 다루는, 종교적 현상을 다루는 종교학이죠.

신학이 졸지에 종교학이 되어서 서운할 겁니다. 종교적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종교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일, 신학이, 신비의 드러난 부분, 즉 성스러운 대상에 대한 경험부분, 다시 말해서 누미노제를 이성을 통해서 합리성을 추출하고, 그 합리성에 대한 추론작업을 한다면, 신학은 종교학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봐야합니다. 이성을 통한 추론 작업은, 필연적으로 경험 너머에 있는, 그 대상을, 신비자체, 계시자체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주관적 경험, 그 경험 속에서 합리성을 추출한 학문과, 그 학문이 지시하는 대상,  즉 경험 너머에 있는 객관적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실, 신학은 여기서 난관에 봉착합니다. 여기서 신학자는 신학할 수 없다는 좌절을,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선포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거죠. 이성의 학문인 신학은, 인간의 인식론적인, 존재론적인 바탕을 둔 학문이기에, 계시자체, 신비자체를 단지 추론, 사유만 할 수 있을 뿐이지, 대상 자체를 경험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상 자체를 설명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불가시성을 가시화할 수 없는 거죠. 합리성 너머의 초합리적인 영역을 합리적 이성으로 불러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이성의 틈새이자, 신학의 틈새입니다. 단편적인 조각 몇 개를 가지고 전체의 모자이크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추론만 할 수 있죠. 저기에 뭐가 있을 것이라고 손으로 가리킬 수만 있습니다. 이 절망선 앞에선 자신의 모습을 경험한 신학자들은 침묵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은 사유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고요. 신은 사유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무신론자들이 전자이고, 유신론자들이 후자입니다. 물론 그사이에 회의론자 또는 범신론자들이 있겠지만요…….

니체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봐야합니다. 포이에르바하의 판단도 옳았고요. 그래서 마르크스의 결론이 정당한 겁니다. 사유의 토대는 오로지 사물뿐이다. 물질만이 사유의 시작이고, 나머지는 다 픽션이다라는 결론도 설득력이 있죠.  이원론의 극복이라고 볼 수 있죠. 반면에 칸트는 같은 선상에 있으면서도 다르죠. 순수이성으로는 신을 사유할 수 없다. 인간의 오성도 마찬가지다. 다만, 경험 이전의 뭔가 있다. 그것이 인간의 ‘아프리오리’한 측면이죠. 니체의 칸트비판은 신랄합니다. 서구문명의 이원론적 토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니체는 칸트의 현실과 초월, 참세계와 그림자, 구원과 처벌의 이원론에 반영된 인간의 욕망의 세속성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다비아 정목사님의 철학과 세기연의 과정철학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싸움을 하는 거고요. 그 싸움의 근저는 기독교가 수용한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에 근거한 것이니 쉽게 결론이 나오기 힘들 겁니다. 니체 칸트의 차이는 논의의 주제가 아니니 그만하고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오성과 이성은, 종교적 현상을 다루는데 성공적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들이 내린 판단은 정확했다고 봅니다. 신은 없거나, 적어도 이성과 오성의 범주는 벗어나 있다고 봐야합니다. 즉 신학은, 적어도, 이성 너머의 신비 자체, 계시자체를 사유하는  신학은, 이성과 오성의 영역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겁니다. 사유가능성한 분야는 오로지,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적 현상만 남은 셈이죠.

남겨진 것은 ‘선험성’인데, 이것은 판단하는 자의 몫이죠. 사적 토대를 기초로 한 마르크스 진영에서는 허구에 불과하며, 인간 소외의 증거일 뿐이고, 칸트와 같은 이원론 자에게는, -기독교 전통적 사고 유형- 이성 너머의 초월적 영역입니다. 실천을 담보로 한 영역이기에, 윤리적일 수밖에 없고, 그 초월자가 있다면, 윤리적인 영역에서만 살아남죠. 결론은 이성과 오성을 통한 인간의 학문은 신비자체, 계시자체를 손으로 가리킬 수밖에 없는 선험성의 영역에서만 확보된다는 겁니다.

이게 신학의 한계라고 봅니다. 인간의 이성과 오성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는 신학의 한계이죠. 만약에, 신비가 드러나는 순서를 역추적하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하신다면, 그 자체로 신학은 학문의 영역에서 자리를 내놓게 물러난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죠. 왜냐면, 합리적 추론 이전의 인간의 계시경험으로, 그것도 굴절된 상만 남아 있는 경험으로 후퇴해야 되기 때문이죠. 더 들어가서, 계시 자체를 지시한다고 해도, 그것은 추론적 영역이지, 검증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신비를 검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꼼수를 써서, 인식론적 지평과 존재론적 지평은 다르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보는 존재론적 지평은, 이성의 합리성을 전제하기에, 역시 검증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존재론적 지평 너머에 또 뭔가가 있다고 설정을 해야 하는데, 합리적 이성은 이를 용납 안합니다.

신 존재자체, 계시자체, 신비자체는 철학과 신학 너머에 있는 영역입니다. 철학은 이성의 학문이고, 신학은 이성 너머의 학문이라고 강변을 해도, 결국은 사유의 토대가 합리적 이성이기에 성립 불가능한, 모순을 안고가야 합니다. 신학은 신비 자체를 추론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다목적인 성격이라서 좀 장황합니다. 이해 바라면서…….

그럼에도 뭔가 찝찝할 겁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수많은 진리논쟁과 투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자세히 그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논쟁들 대부분이 다 종교적 현상에 대한 논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봐야 교의학이고, 결과는 신학 담론끼리 서로 치고 받는 모습만 보이는 거죠.

신의 존재 영역은 전혀 터치를 못합니다. 안전한 영역에 있는 거죠. 신은 종교적 현상 너머에 계시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다들 좀 심하게 말해서, 헛발질을 하고 있다고 봐야할 겁니다. 신이라고 불리는 허수아비를, 이미테이션을 하나씩 품에 안고, 서로 누가 더 좋은 짝퉁인지 다툼을 하고 있는 거죠. 이미테이션에 아무리 상처를 낸다고 해도, 진퉁과는 전혀 상관없죠. 헛발질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죠. 헛발질이라고 했다고 투쟁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짝퉁들의 투쟁은 더 나은 짝퉁이 만들게 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싸우다가 자기가 가진 짝퉁이 진퉁이라고 우기는 사태가 오면 심각해지죠. 진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문제를 만듭니다. 수많은 부정적인 종교적 양태는 여기서 비롯됩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수많은 어처구니없는 종교적 병폐, 병리적 현상들에 대한 고발입니다. 우리의 종교적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고요. 내용물은 팽개쳐버리고 포장지인 문자에 매여서, 전통에 매여서, 증오의 칼을 갈고 있는 분들이 있고요. 반대쪽에서는, 이를 해체하려는 분들이 대치하고 있는 양상입니다. 얼핏 보면, 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 다 헛발질을 하는 겁니다. 이미테이션끼리 싸우는 거죠. 허수아비를 두고서……. 그래서 라이온 일병 구하기는 할 필요가 없죠. 신은 안전선 밖에 있거든요.

혹시 이곳에서 눈팅 중이신 보수 열혈분자분들이 있다면, 한 말씀 드립니다. 이곳, 또는 다비아, 아니 다른 무신론 사이트를 가더라도, ‘신 구하기’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그들의 글을 읽고서, 기독교가, 종교계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곱씹고 반성해야 할 겁니다. 몽학선생들이거든요. 이곳에서도 신을 비판하는 글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촘촘히 보시면, 다 종교적 현상에 대한 비판이고요. 다비아도 동일 선상에 있는 겁니다. 무신론도 마찬가지고요.

신은 이미 광속으로 지나갔습니다. 남은 것은 굴절된 허수아비만 있는 거고요. 신학은 그 허수아비를 가지고 매스를 가하는 겁니다. 다만, 세기연과 다비아를 비교하자면, 조금 차이가 있죠. 먼저 강길님이 대답하실 부분부터 시작하죠. 유사기독교라는 혐의를 벗어야 한다고 봅니다. 창조와 구속 종말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거든요.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원용하셨던 것은 높이 삽니다. 새로운 신학적 돌파입니다. 그렇지만, 강길님의 신학이, 현실에 정초한 기독교 신학이라면, 과정철학으로 이 부분을 증명해야하는 것이지 차버리면 안 되는 거죠. 다른 것은 다 내팽겨 쳐도 구속과 종말, 3위일체에 대한 해석에 난관을 걷어 내야합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죠. 과정철학으로 이것을 증명하는 길이고, 아니면, 콜럼버스처럼 계란을 깨는 수밖에 없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요. 신학은 철학이나 사회학이 아닙니다. 종교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학문입니다. 예수와 같은 카리스마를 보여주거나, 논리를 보여줘야 하는 거죠. 유대교를 정죄한 예수의 카리스마와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아시죠? 이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버리던지, 아니면, 다소 불편하더라도 이전의 옷을 입고 시작해야 합니다. 둘 다 아니면, 강길님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겁니다. 그것은 유사기독교입니다. 혹시 정목사님이 어리석어서 그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통전적 신학을 강조하는 그 분이, 강길님의 생각처럼 화이트헤드와 이원론에서 양다리 걸치기를 한다고 생각하나요? 혹 옷이 다소 불편하더라도,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 자신의 신학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새 옷만 입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죠. 그 옷이 자신에게, 적어도 기독교 안에 정초한 신학을 한다고 하는 자신에게 맞아야 합니다. 강길님이 위에서 말한 기독교 교의문제를 해결하신다면, 그분도 말을 갈아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영 아니거든요. 욕조의 물을 버리려다가 애기까지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다비아에 대한 생각은 강길님과 좀 다릅니다. 비판의 각도가 다르죠. 이성으로 신을 추론하고 가리킬 수 있다는 정목사님의 생각에 동의가 안 되는 입장입니다. 이 부분은 위에서 설명했기에 부연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이 시점에서 그분의 신학이 반짝이는 것은, 보수신학의 이미테이션보다 더 반짝인다는 사실입니다. 문자에 매여, 성서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하는 보수신학의 한계를, 그 허구를 칼질했다는 점입니다. 비신화화하고 해체를 시도하고 있는 거죠. 문자 너머, 문자가 지시하는 신비자체를 보자고 하는 거죠. 그렇지만, 그분 신학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성의 신학이기 때문이죠. 추론으로는 신비자체를 볼 수 없습니다. 이성의 한계이죠. 신비자체는 이성 너머에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분의 신학이 종교적 현상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면모를 보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신비자체에 대해선 별 소득이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정목사님이 합리적 이성론자라는 말은 아니고요. 합리적이라는 말이 이성 앞에 들어가면, 이성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는 이신론자의 혐의가 있거든요. 판넨베르크도 이신론자는 아니고요. 보수 측에서 의심을 하듯이……. 

그분의 성서해석관을 보면, 문자의 표피를 걷어내고, 심층으로 들어가자는 말을 자주하십니다. 그곳에 진리의 은폐된 신비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성으로는 신비자체를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시할 수 있죠. 추측컨대, 신비자체는 아니고, 신비의 아우라 정도를 보신 거  아닌가 생각됩니다. 음악이나 바둑을 통한 비유에서 그런 흔적이 보이고요. ‘숭고’를 보신 듯합니다. 신비자체는 아니고, 신비를 둘러싼 아우라죠. 자연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기도 하죠. 하나님의 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비췹니다. 인간의 선험성으로 아우라를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숭고’는 ‘거룩’이라는 감정하고 다르다고 봅니다. 거룩은 회심한 인간이 신 자체를 대면할 때 발생하는 겁니다. 신의 현현 앞에서, 자신이 티끌과 잿더미 같다는 느낌입니다. 자의식이, 존재감이, 그분의 현존 앞에서, 끝없는 바닥으로 함몰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할까요. 이런 경험이 쌓여서, 엄청난 친밀감도 오겠지요. 그런데 ‘숭고’는 이런 ‘거룩’과는 좀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거룩’한 감정은 자신과 신과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경험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신 존재를 향해 수렴되는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요. 하나가 된 느낌. 때로는 온 나-너-사물의 구별 없이 만물이 그분에게 수렴되는 모습을 보게 되고요. 마치 구속을 열망하는 만물이 하나님께 두 손을 높이 들고 빨려가는 모습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죠.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성을 하나님과 동등선에 두지 않습니다. 아니 적어도 이성으로 성서를 칼질하려고 하는 생각을 품지 못하죠. 왜냐면, 칼질해서 그런 경험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다만, 그들이 설명에 좀 약합니다. 어쩌면 설명 불가해성한 영역이라는 것이 더 타당할 겁니다. 그래서 보수기독교인들이 불 어쩌고저쩌고 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험 자체도 자신의 마음 판에 굴절을 일으킨 감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편차가 있다고 보고, 종교 간에도 편차가 있다고 봅니다. 이 경험은 숭고의 경험과 다르죠. 숭고의 경험은 외부에서 잠시 느껴지다 사라지는 경험이라 볼 수 있고, ‘거룩’함을 경험하는 것은, 잠시의 경험이 아니라 수렴되는, 함몰되는 경험으로 내적인 ‘동행’의 경험입니다. 외부에서 왔다가 잠시 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거하는 경험이고, 그것이 우주에 편만하다는 통찰을 가져옵니다. 이걸 전 성령의, 생명의 영의 편재성이라고 봅니다. 성령의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경험이죠. 이 경험은 처음에는 구멍 난 항아리에서 물이 쭉 빠지는 느낌과 서서히 차오르는 느낌입니다. 흘러넘치기도 하고요. 로이드존스 목사가 설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잘 언급했듯이, 이분과의 동행이, 충만이 없으면 설교 불가능한 겁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양태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존재감이 무화된다는 충격을 동반합니다. 그분으로 충만하게 채워진다는 겁니다. 정목사님의 성서해석을 보면, 생명의 영이 넘치는 카리스마가 반영된 부분이 없어서, 감히 숭고미 정도 경험하신 것이 아닌가 추론합니다. 설교는 수필이 아니거든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 말처럼, ‘불붙은 논리’입니다. 이 불이 없어요. 이 부분만 보완된다면, 양수겸장이니, 한국 신학사의 큰 흐름으로 남을 듯한데 좀 아쉽네요. 사실 설교자는 생명의 영인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담은 초라한 질그릇입니다. 능력이 심히 큰 것은 설교자에게 없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영이 잘 드러나도록, 겸손하고 비워져야합니다. 이성의 설교는 이걸 이룰 수 없습니다. 설득하고 교화하는 것은 설교자가 아니라 영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참다운 목회자는 설교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겁니다. 성령의 불이, 생명의 영이 넘쳐흘러서, 설교자의 존재 자체가 타버리거나, 소멸되는 경험을 가지고, 강단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현현, 또는 자기계시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이성이 쓰임을 받고 빛을 발하는 거죠. 회심하지 못한 이성은 방해물이 되는 셈이고요.

바울사도를 보면, 이 부분이 잘 대조됩니다. 바울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현현을 목도 합니다. 거룩한 광채가 비취는 동시에, 온 존재가 무너지죠. 자신의 이성, 오성이 다 무너진 겁니다. ‘사울아’라고 부르는 그 한마디에, 자신의 존재감이, 예수의 제자들을 죽이려던 , 기세등등했던 자의식이 재와 티끌로 함몰된 거죠. 그러나 후에 그의 죽음을 불사하는, 오히려 죽음을 소망하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 항아리에 물이 가득차서 넘치는 충만한 카리스마를 봅니다. 날마다 죽어야 생명의 영이 살아나는 역설을 온 몸으로 배운 겁니다. 자신이 무해져야 예수가 들어오는 신비를 안 겁니다. 다메섹에서의 신비 체험은 -이성적 추론이 아닌- 이성과 오성에 커다란 스티그마를 준거죠. 지울 수 없는 첫사랑처럼……. 
 
정목사님의 성서해석이 가지는 한계를 말했는데요. 성서해석은 성서해석일 뿐이라는 결론입니다. 그 해석이 신비 자체를 지시하는 해석이어야 한다는 데는 일치하지만, 성서를 파고드는 모습에서, 그 해석 방법에 대해선, ‘아니다’는 결론이죠. 스티그마를 가지지 못한 이성적 해석의 한계입니다. 그분에게서 성서를 비신화화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을 봅니다. 올바른 방법이 아니고요. 그런 방법으로, 신의 현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시는 말 그대로 지시일 뿐이죠. 거기서 끝이죠.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당시의 삶의 상황에 대한 컨택스트나 정황지식이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고요. 그것은 다만, 뒤틀린 경험을 ‘엑시던츠’를 조금 풀어서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거죠. 그 엑시던츠는 분석될 뿐이지, 지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추론적 이성을 통한 성서해석의 한계이고요. 방향이 다른 거죠. 호수에서 돌을 던지면, ‘파문’을 일으키고 돌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나간 ‘힘’은 포착되지 않습니다. 이미 이천 년전에 돌은 지나갔거든요. 파문만 남긴 채로……. 신의 현현, 신비자체, 계시자체는 성서에 있는 말씀 중에서 한두 가지라도 마음에 새기고 삶을 살아갈 때, 그때 비로소 경험됩니다.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도를 행동으로 옮길 때 발생하는 거죠. 또는 마음에 동일한 한계상황에 대한 경험이 잔상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서,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낼 때, 그때야 비로소 신비자체, 계시자체를 체험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만물을 비취시는 빛이기 때문이죠. 빛이 비취나 느끼지 못하는 것이니……. 말씀이 행동을 유발시켜야 제대로 지시된 말씀이라는 결론입니다. 칸트식으로 하면, 실천이성에서 종교가 드러나듯이요.

신비 자체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법 앞에 세운다고 봅니다. 전 존재를 무너뜨려서 세우는 거죠. 그것이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한계 상황을 통해서 올 겁니다. 고통의 문제에 천착한 C. S 루이스의 글에서도 잘 나오죠. 고통과 고난은 이중성을 가진 거죠. 이것들이, 인간을 하나님의 법 앞에 세우는 겁니다. 오성과 이성에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요. 상처를 받은 인간이,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길은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하임이 적시했듯이, 1) 또 다른 우상으로 빠지거나 2) 순종하거나 3) 회의론자가 되거나……. 선택은 인간의 자기결정에 있는 듯이 보이고요. 단지 목사나 신학자는 그 선택 앞으로 인도하는 자들이죠. 상처받은 인간이 반드시 회심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죠.

기독교인들은,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다가오는 한계상황을 자기 비움, 죽어짐, 낮아짐 등을 통해서 신이 채워짐을 경험하는 자들이죠. 게 중에는 수동적으로 질질 끌려가는 삶을 사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반면에, 능동적으로 그 한계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서 돌파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현실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 눈을 감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용맹 전진하는 자들일 겁니다. 이들이 바로, 삶을 차안과 피안으로 나누지 않고, 통전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겠죠. 온 몸으로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자들이죠. 죽으려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자들이죠. 왜냐면, 죽어야만 산다는 역설을 날마다 체험하는 자들이거든요.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일 겁니다. 세상이 마틴 부버의 책에서 잘 나와 있듯이, 더 이상 ‘나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보이고 우리의 관계 더 나아가서 ‘하나’라는 관점이 생깁니다. 오메가점으로 수렴되는 자신을 보는 거죠. 그 도상에 있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보이는 거죠. 오메가점은 닫혀 있을 수도 있고 열려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영원한 신의 관점에서는 닫혀 있는 것이고, 시간 여행자인 인간의 관점에서는 열려 있죠.

마지막으로 그들의 삶의 자세 3가지 정도만 서술하고 마칩니다.

1.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네 앞에 두지마라. 자신을 하나님 앞에 두는 상황을 제일 두려워 할 겁니다. 자신이 이미테이션이 아니라는 착각이 드는 순간 이미 망하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아는 거죠.

2.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어거스틴이 평생 화두로 삼고 살았다는 금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 좀 귀감이 되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이 없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과거를 사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생각이죠. 오늘을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매일 느낄 겁니다. 하이데거의 ‘실존’이죠.

3.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번과 동어반복입니다. 불가시적인 하나님은 사실 가시적인 인간이거든요. 생명이 생명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삶일 겁니다. 미소 짓고 있는데 미워할 수 없죠.

강길님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큰 진보를 바라면서, 잠수 탑니다. 침묵해야 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토론된 내용을 음미하다 어느 때 불쑥 질문을 드릴지도 모르겠지만…….


타고르의 시 한수 드립니다.
문득 우리가 바닷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바닷가에서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같이 고요한데,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껍데기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한 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두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고기잡이할 줄도,
진주를 캐는 이는 진주 캐러 물로 들고 
상인들은 돛 벌려 오가는데,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집니다.
그들은 남모르는 보물도 바라잖고,
그물 던져 고기잡이할 줄도 모릅니다.

바다는 깔깔거리고 소스라쳐 바서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사람과 배 송두리째 삼키는 파도도
아가 달래는 엄마처럼,
예쁜 노래를 불러 들려줍니다.
바다는 아이들과 재미나게 놉니다.
기슭은 희 이를 드러내며 웃습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길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고
흔적 없는 물 위에 배는 엎어져
죽음이 배 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텁니다            (양주동 옮김)

    
미선이 (08-11-06 18:41)
 
이번에는 제 글에 대한 댓글 성격의 글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럴 경우엔
제가 앞서 님에게 조목조목 반론한 글에 대해선 직접적 답변의 글이 되지 못한 게 되겠군요.
그래도 쓰신 글에서 군데군데 몇 가지 생각이 다른 부분들도 있기에 저도 그저 짧게만 몇 자 적는 바입니다.

저 역시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관점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이 올바른지 합리적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결국 드러난 신비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에 대한 문제인 거죠.

그런데 여기서 신 자체는 알 수 없는 신비다 계시다 라는 이런 언급들은
저로서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어차피 하나마나한 얘기라고 볼 따름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얘긴가요?
계시가 자기를 드러낼때까지, 우리가 신비 체험하기까지 기다리고 경청해야 한다는 얘긴지요.

저 역시 인식의 한계가 있는 인간이 합리성을 곧바로 성취할 수 있다고도 보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 존재에 훨씬 더 가깝지요.
저는 바로 그래서 <오류>와 <비극>이야말로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혹은
신비적인 하나님의 계시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보는 것이구요.

그리고 합리성에 대한 이해가 님과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데
님이 말하는 합리성은 근대 합리성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근대 철학의 한계는 이성을 강조했지만
사실 그 이성은 독단적 이성이었고 권력에 오염된 이성의 횡포였기에
근대 합리성의 실체는 오히려 <반합리성>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근대 계몽주의 기획의 실패는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합리성은 인간 이성이 곧바로 성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랍니다.
과학이나 철학도 절대적 진리의 성취에 대해서는 오히려 회의적이지요.
이성은 유용한 도구지만 동시에 절대화할 경우에도 위험스런 폐해를 낳기도 한답니다.
합리성은 오히려 이성의 오류와 실패를 통해서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할 따름이죠.

그리고 과정철학에 기초해서 나온 과정신학이 말하는 교의 체계로서
죄와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이미 이곳 세기연 자료실에도 나와 있잖아요.

과정신학은 새로운 틀로서 전통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여라도 기독교 전통과의 완전 단절과는 혼동하시면 안되실테죠.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얘기는 새로운 해석학적 틀이라는 새로운 형이상학 실재론의 틀로서
기독교 전통의 모든 것을 새롭게 전면적으로 해석해내야 한다는 얘기와도 상통됩니다.

저는 거시기님이 말하는 신비나 계시에 대한 논의들을 보면서
애초부터 수행 패러독스의 오류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차라리 이번에 세기연에 올린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중심의 사고에 감추어진 사유의 폭력>이란 글에 대해서
서로 토론을 나누는 것이 좀더 생산적인 방향이라고 생각됩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224 참조

그리고 님이 쓰신 3가지 삶의 자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주신 말씀도 너무나 지극한 당연한 얘기들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저로선 생산적인 담론에 대한 요원함과 미진함도 같이 느껴지더군요.

타고르의 시에 대해선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시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건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짐작됩니다.
어쩌면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한계를 지닌 영원한 우주의 유아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앞으로도 언제든지 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시기 (09-01-08 20:25)
 
이곳에서 글이라고는 딱 3개 올린 것 같은데.
영양가도 없는 이글을 누가 이렇게 조회를 하는지.
궁금하네요.
.
제 눈에 안경이라고 보고 싶은 글인가요?
.
안경좀 벗고 살자고 올린 글인데.
얼마나 벗으셨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게시물수 1,219건 / 코멘트수 2,022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허위 기재로 가입하실 경우 접속 제한 및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관리자 24045 06-16
[알림] 이곳 자유토론게시판에 펌글을 올리시는 모든 분들께..정확한 출처 표기 바람! 관리자 27491 09-13
★ 회원 가입시 유의 사항 (정확한 메일주소 기입 요망) (1) 관리자 98040 07-10
토론(논쟁)이 주는 즐거움과 가치 미선이 33221 01-28
몸학기독교는 '예수'보다 '오류'를 더 섬기는 곳인가요? (12) 미선이 36870 06-14
이곳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 포지션 : 기존 기독교 및 안티기독교에 대한 입장 관리자 35600 02-10
★ 이곳에 처음 오신 기독교인이라면 필히 읽어주세요~^.^! 정강길 45201 07-02
[필독] 기독교 전통에 대한 몸학기독교의 입장 (2) 관리자 38357 05-30
[논쟁3] 다비아 정용섭 목사와의 논쟁 (헨리 나우웬과 전통 기독교에 대한 시각차이 논쟁) (12) 미선이 61581 11-28
♣ 지난 날에 썼던 정치 사회 시사적인 글모음 정강길 52442 11-11
[필독] 논쟁(혹은 토론)의 기술 : 참다운 자유토론을 위하여 관리자 48282 04-22
519 진짜인지 가짜인지? (4) 맑음 4682 11-27
518 Obamerica의 도전과 시련 (1) 장동만 4905 11-27
517 혹시 '휴메니버시티'에 대해 아시는지... (사진자료 첨부) 미선이 5557 11-26
516 새 문화를 연다 (5) 맑음 4432 11-25
515 "광신도여! 예수를 더 이상 욕되게 말라" (1) 치노 5232 11-24
514 [12/2 저녁7:30] 대화마당 <병역거부 특별하지 않은 우리주변이야기> Artizen 4359 11-24
513 아담과 이브, 그 관계의 시초 Adam & Eve - The Origin of Relationship (1) 미선이 5642 11-21
512 거짓말. 거짓말들-퍼오기 되네요 (2) 정관 4964 11-20
511 [펌] IQ에 대한 상식. 그리고 실과 허. 미선이 8086 11-18
510 미선이 님의 글이 신천지에서 사용되고 있네요. (2) 하랑 5586 11-18
509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 (2) 치노 4902 11-17
508 대동문화센터 소식지 <진실의 소리> 2호-성경의 모순과 오류(2)-서로 다른 복음서의 기록들 한솔이 4854 11-16
507 (강추!!) 좋은 책들을 엄청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1) 미선이 6719 11-11
506 종교정치 논쟁에 휩싸인 미국정치 (강인규) (1) 미선이 5583 11-08
505 안마시술소 여종업원 자살 (1) 정관 6354 11-07
504 [펌] 한의 정서와 기독교 부패의 침묵 기독교와 사회 (4) 미선이 7588 11-07
503 [11/21 저녁7:30] 이부영(서울시교육위원) 국제중논란과 MB정권, 공정택교육감의 교육정책 (1) Artizen 4364 11-06
502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페미니즘 (2) 통전적 신… 5168 11-05
501 세기연이 기독교 정통신학과 함께 갈 수 없는 이유 하나.. (4) 미선이 5195 11-02
500 세기연은 명칭을 세계와 종교 변혁 연구소로 바꾸는 것이 낫지 않을까? (31) 거시기 11234 10-31
499 세기연은 무엇하는 곳인가요? (10) 손오공 5102 10-29
498 다비아(정용섭 목사의 신학노선)에 대한 짧은 단상 (24) 미선이 11277 10-27
497 참다운 용서 (3) 정관 5221 10-24
496 불교계 대학교에서 어찌 이런 일이 (3) 정강길 6891 10-22
495 허물고 다시 세우는 기독교? (2) 통전적 신… 4913 10-16
494 [10/30 저녁8시] 25차 문화나눔마당 <망명의 티베트 불교> Artizen 4495 10-16
493 최진실의 자살과 한국사회 그리고 기독교 신앙 (5) 치노 6131 10-15
492 [펌] '종교재판' 받은 진보신학 / 문동환 (1) 미선이 6394 10-14
491 한국씨알공동체 대동문화원 소식지 제1호 (3) 한솔이 6558 10-11
490 이벤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2) 통전적 신… 5120 10-07
489 [베낀글] “교회의 영적인 전쟁과 사영리 목회” (9) 늘오늘 6211 10-06
488 진실의 소리(3)-현대고고학이 밝혀 낸 성경의 실체 한솔이 5129 10-02
487 [자료] 정철의 관동별곡 원문 및 현대해석문-대역본 한솔이 11718 09-29
486 대형교회들이 작당하기를.. 정관 5188 09-27
485 예수의 신학 (2) 통전적 신… 5952 09-26
484 정강길 님과 언제 대화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1) 통전적 신… 7107 09-25
483 진실의 소리(2)-성경의 모순과 오류(도표) (4) 한솔이 24481 09-19
482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 (3) acecard 8280 09-16
481 [9/30] 24차 문화나눔마당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무료관람] Artizen 4716 09-12
480 현실적 존재와 쿼크, 힉스, 초대칭 입자 (1) 한솔이 7816 09-10
479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 정관 5691 09-08
478 진실의 소리(1)-성경을 믿지 맙시다 (2) 한솔이 8874 09-05
477 [서명합시다]식량난으로 여동생이 굶어 죽었습니다. (2) 생명을 밥 5697 08-29
476 ‘하나님 중심의 삶’을 오해하는 삶 (3) acecard 8650 08-25
475 역사적 근거가 없는 신앙고백은 망상에 불과하다 (6) 한솔이 6042 08-21
474    예수와 교리는 다르지 않나요? 정강길 5466 08-22
473 [한대수 영상편지] 8/20 저와 같이 선율을 맞춰 봅시다! Artizen 5401 08-10
472 [자료]광개토대왕 비문 원문 및 해석문 한솔이 7505 08-04
471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적'이 나타났다 (1) 별똥별 6917 07-25
470 "기륭노동자들과 함께 한 넉 달...시시때대로 눈물이 난다" - 민중의 소리 (1) 마루치 6131 07-25
469 마광수 교수에 대한 넋두리. (1) 별똥별 6452 07-20
468 [자료]영한성경-창세기 1~11장-인문학적 입장에서 본 창세기 강해 한솔이 6463 07-20
467 촛불 心志가 사른 것들 장동만 5614 07-19
466 [긴급]굶어 죽어가는 우리 동포들을 살려주세요!!! (1) 생명을 밥 6222 07-18
465 [인터뷰] '살림이스트' 신학자 현경 교수를 만나다 (3) 관리자 7209 07-11
464 촛불정국을 바라보는 연합교회 공론탐색 이야기 (1) 작은불꽃 5300 07-09
463 BBC다큐 붓다의 일생을 보고서.. 정강길 7188 07-05
462 모든 신론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4) 한솔이 6089 07-03
461 대전신학대 김덕기 교수의 "최신 역사적 예수 연구" 특강 (1) 관리자 8922 07-03
460 성경 번역, 무엇이 문제인가? (6) 한솔이 7587 06-30
459 종교와 보수 (2) acecard 5960 06-30
458 성경공부 좀 합시다! 먼저 창세기부터 (3) sydney 6686 06-24
457 [7/9 저녁 8시] 영화마당 <로메로(Romero)> 무료상영! Artizen 4993 06-22
456 "예수는 좌파다 -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설교를 보고" - 한겨레 토론방 마루치 14918 06-18
455 "목사가 다 그렇진 않다" - 시사IN (4) 마루치 6702 06-13
454 이순신은 사탄이라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신도들이 작성한 글(펌) (7) 치노 10719 06-12
453 뉴라이트 (2) 지영 5245 06-11
452 (동영상) 뼈의 최후통첩 마루치 4950 06-10
451 신에 대하여 더 이야기 하고 싶어요 어리버리 5700 06-07
450    답변입니다. 정강길 7076 06-07
449 (동영상) 넘어져있는 여학생을 발로 짓밟고 차는..... (5) 마루치 5870 06-01
448 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어리버리 7335 05-27
447    답변입니다. 정강길 5621 05-28
446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읽어 보셨는지요? (3) 통전적 신… 6636 05-26
445 한겨레 만평 모음 미선이 6570 05-26
444 도올 초청 ‘큐복음서’의 예수 재조명 : 27일 화요일 감신대-한신대 합동 심포지움 마루치 7283 05-25
443 연기론과 심리치료 (2008년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 봄 학술대회) 관리자 5928 05-23
442 <공개강좌> 김수행교수와 함께 하는 한국경제, 세계경제 알기 마루치 5482 05-21
441 [6/10 저녁7:0] 정웅기 - 2008년 봄, 티베트에선 무슨일이 벌어졌나? Artizen 4798 05-19
440 불교와사회 특별강좌-'마음챙김과 심리치료' 로널드 시글 박사 초청강연 미선이 6622 05-18
439 이명박은 기독교인가? (1) olivgrun 5603 05-16
438 '밥'과 '신앙' 거래하는 종교단체, 이제 그만(펌) 치노 6814 05-15
437 여전히 풀리지 않는 오해, 문화선교 (1) 별똥별 4897 05-08
436 [한겨레신문 20주년 기념] 평화의 나무 합창단 제 1회 정기 공연 두둥~~~(효과음 ^^;;;) (1) 컨설턴트 8957 04-30
435 [알림] 이명박씨 대통령직 사임촉구 범국민서명운동에 동참부탁드립니다!!! 미선이 6101 04-30
434 미국은 광우병 소 처치가 곤란해서 다른 나라에 수출을? (1) 미선이 5720 04-30
433 [펌] '조중동식'의 해석 (풍자) (1) 미선이 5222 04-28
432 정치인들 넘무 부자다 장동만 5234 04-24
431 이명박 패러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1) sydney 8068 04-20
430 [5/13] 다큐 <세개의 이름을 가진 영화인> 그리고 감독과의 만남! Artizen 5541 04-18
429 새 벽을 넘어 쑥향 4718 04-17
428 존재의 의미 쑥향 5020 04-17
427 4월9일(수) 오후3시 티베트 평화를 위한 아시아인의 연대 미선이 4705 04-08
426 [4.16 저녁7:30] 도로시 데이 <어둠속의 천사> [무료관람입니다] (1) Artizen 6770 04-03
425 예수님 부활이 3일 만에 이루어지는 이유 (3) 김영순 7432 03-31
424 [펌] 습관을 보면 내 몸 보인다 미선이 5069 03-31
423 [펌] 게시판에서 쌈이 나는 이유ㅋ 미선이 5326 03-29
422 재림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오신다 김영순 6342 03-28
421 [펌]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왜 우리는 가난한가 미선이 5343 03-27
420 물로 다스리는 건강법 미선이 6074 03-22
 1  2  3  4  5  6  7  8  9  10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